“변방의 문화로 여겼던 동남아…이젠 영감 주고받는 파트너죠” [이사람]

이혜진 선임기자 2026. 9. 1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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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라고 하면 야자수가 드리워진 휴양지와 생산공장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은 최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재단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는 저 역시 동남아 문화를 '변방의 문화'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백 이사장은 "창업주께서는 동남아 근로자들의 노동을 바탕으로 회사가 세계시장에서 성장할 수 있었기에 늘 마음의 빚을 갖고 계셨다"며 "이들에게 보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문화 사업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재단을 시작할 때 원했던 것도 결국 동남아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이었어요. 이제는 도와줘야 하는 국가나 시장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문화적 파트너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도록 이 역할을 꾸준히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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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
김동녕 회장 ‘마음의 빚’서 출발했지만
단순 지원서 문화 교류로 한 단계 확장
생소한 동남아 작품 국내 꾸준히 소개
동시대의 젊은 작가·독자와 접점 넓혀
기초 인문학 연구도 지속적으로 후원
“이런 예술 있는지 몰라” 호평 큰 보람

동남아시아라고 하면 야자수가 드리워진 휴양지와 생산공장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풍부한 자원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력, 빠르게 성장하는 소비 여력 등 경제적 이득을 취할 만한 시장으로도 여겨왔다. K팝과 드라마 등 한국 콘텐츠가 현지에서 뜨겁게 환영받는 동안에도 정작 그들의 문화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최근 동남아가 동시대 예술의 활발한 창작 현장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이 역시 다소 생소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이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동남아시아문학총서와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한세예스24문화재단은 동남아를 바라보는 이 같은 고정관념에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균열을 내왔다. 2014년 설립된 재단은 베트남·인도네시아·태국·미얀마·필리핀·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의 미술과 문학을 국내에 소개해왔다.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전시를 열고 책을 펴내고 작가들을 초청하면서 한국과 동남아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공명할 수 있는 접점을 넓혀왔다.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은 최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재단에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는 저 역시 동남아 문화를 ‘변방의 문화’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직접 현지를 다니고 여러 작가와 작품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와 예술이 있었다”며 “이제는 서로 배우고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파트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재단의 출발에는 창업자인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이 가졌던 ‘마음의 빚’이 있었다. 한세실업은 생산법인 대부분을 동남아에 두고 세계시장에서 성장했다. 백 이사장은 “창업주께서는 동남아 근로자들의 노동을 바탕으로 회사가 세계시장에서 성장할 수 있었기에 늘 마음의 빚을 갖고 계셨다”며 “이들에게 보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문화 사업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처음부터 문화에 주목한 것은 아니다. 재단 설립 전에는 대학생 해외 봉사와 외국인 대학원생 장학금 등 ‘지원’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일방적인 지원만으로는 지속적인 관계를 만들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김 회장은 한국과 동남아가 보다 폭넓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호 문화 교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동남아 문화를 체계적으로 국내에 알리기 위해 2014년 재단을 출범시켰다. 백 이사장은 “재단의 사회적 책임이 ‘지원’에서 ‘교류’로 한 단계 확장된 것”이라고 전했다.

문화 교류의 첫 매개는 미술이다. 백 이사장은 미술이 지닌 ‘강력한 즉각성’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처럼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 장르와 달리 미술은 보는 순간 작가의 생각과 그 사회의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며 “동남아 미술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뒀다”고 밝혔다.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이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재단은 2015년부터 한 나라를 선정해 해당 국가의 작가와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국제문화교류전’을 일곱 차례 열었다. 인도네시아·태국·미얀마·필리핀·말레이시아 등의 유명 작가부터 신예까지 다양한 작품을 한국에 소개했다. 작가와 작품 선정은 외부 전문가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백 이사장도 직접 현지를 찾아 작품을 둘러봤다. 그는 “방콕 등 동남아 대도시에선 민간 갤러리에서 1년 내내 다양한 전시가 이어지고 있고 작품 수준도 예상보다 높다”며 “관심 밖에 있어서 몰랐을 뿐 동남아 현지에도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와 수준 높은 작품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강조했다.

초기 전시가 각 나라의 전통과 역사를 보여주는 데 무게를 뒀다면 최근에는 동시대 미술과 젊은 작가들로 시선을 넓히고 있다. 백 이사장은 “작가의 국적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련되고 감각적인 작품도 많다”며 “‘동남아에 이런 예술이 있는 줄 몰랐다’ ‘그 나라를 새롭게 보게 됐다’는 관람객의 반응을 접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지난해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태국전은 이런 변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줬다. 기존 일주일가량이던 전시 기간을 2주로 늘리고 작품도 100점 이상으로 확대했다. 회화 중심에서 벗어나 조각·미디어아트·설치 등으로 장르를 넓혔고 작가와 관객이 직접 만나는 프로그램과 어린이 체험 공간도 마련했다. 사업 시작 후 처음으로 민간 컬렉터들이 작품을 구매하기도 했다. 재단에 판매 수익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동남아 작가와 한국 컬렉터가 직접 연결됐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였다.

당시 화제가 된 작품 중 하나가 임하타이 쑤왓타나씬의 ‘초승달 원숭이’다. 방콕의 한 백화점 옥상 동물원에 갇혀 평생 사람들의 눈요기가 됐던 유인원을 모티브로 한 조각으로 사람의 머리카락과 물고기 비늘 등을 활용해 인간의 탐욕과 환경 문제를 표현했다. 백 이사장은 “현대 문명과 환경 파괴 등에 대한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도 동남아 작가들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미술이 낯선 문화에 대한 선입견을 직관적으로 깨뜨린다면 문학은 그 사회 안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는 통로다. 재단이 ‘동남아시아문학총서’를 펴내는 이유다. 지금까지 베트남·인도네시아·태국·필리핀 등 4개국 작가의 소설과 희곡을 총 7권 출간했다. 국내 출판 시장에서 여전히 비주류인 동남아 문학을 꾸준히 소개하는 작업이다.

상업성만 따지면 선뜻 뛰어들기 어려운 일이다. 현지 전문가들과 작품을 발굴한 뒤 번역과 감수·편집을 거쳐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3년 가까이 걸린다. 특히 어려운 과정은 번역이다. 인도네시아어나 말레이어 등 현지 언어를 한국어로 제대로 옮길 번역자를 찾는 일부터 쉽지 않다. 백 이사장은 “번역과 감수에 비용이 많이 들고 표지와 제작 품질에도 신경을 쓰기 때문에 항상 적자를 보고 있다”면서도 “재단의 사명에서 시작한 사업인 만큼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라고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백 이사장 취임 이후 작품을 고르는 기준도 조금씩 달라졌다. 초기 1~3권은 각 나라의 문학사를 대표할 만한 묵직한 작품을 선정했다면 이후에는 젊은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현대소설까지 폭을 넓혔다. 국내 독자와의 접점을 넓히고 동시대 문화 교류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다. “아무리 작품성이 중요해도 독자들에게 닿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남아에서도 재미있는 작품이 많이 쓰이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어요.”

백 이사장이 특히 좋아한 작품은 필리핀 작가 미카 드 리언의 ‘러브 온 더 세컨드 리드’다. 출판사를 배경으로 두 남녀가 라이벌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그는 “단숨에 읽었다”며 “남녀 주인공의 티키타카가 너무 재미있어서 ‘드라마로 만들어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최근 출간한 인도네시아 소설 ‘시가렛 걸’도 이런 방향의 연장선에 있다. 이미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돼 세계 시청자들과 만난 작품이다. 내년 출간 예정인 차기작은 말레이시아의 ‘영어덜트’ 소설이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재단 활동을 하며 백 이사장이 발견한 것은 한국과 동남아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시대를 겪고 짧은 기간 급격한 경제·사회적 변화를 경험했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개인과 사회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작품에 스며 있다. 반면 불교와 이슬람교 등 종교가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신화적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은 차이다. 백 이사장은 “국내 예술가들은 고유의 토속적이거나 무속적인 속성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인데 동남아에서는 종교나 신화적 상상력이 작품에 강렬한 색채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백수미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이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동남아시아문학총서와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국내 기초 인문학 연구 지원도 재단이 꾸준히 이어가는 사업이다.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커지는 것과 달리 철학·사학·문학·언어학·미술사 등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려운 기초 인문학의 연구 환경은 녹록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백 이사장은 “사회 전반적으로 지원이 줄다 보니 재단 사업의 경쟁률이 높아지고 있다”며 “인공지능(AI)과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해도 인간 사회의 기본 정신은 인문학에 기초하고 있는 만큼 꾸준히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설립 14년 차에 접어든 재단은 이제 개별 전시와 출판을 넘어 한국과 동남아를 잇는 문화 교류 플랫폼으로의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전시가 끝난 뒤에도 현지 갤러리·작가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작품과 전시 소식을 주고받고 출판 역시 현지 작가와 출판계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10여 년간 쌓은 네트워크를 토대로 일회성 ‘소개’에서 지속적인 ‘교류’로 무게중심을 옮기겠다는 구상이다.

“재단을 시작할 때 원했던 것도 결국 동남아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것이었어요. 이제는 도와줘야 하는 국가나 시장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문화적 파트너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교류할 수 있도록 이 역할을 꾸준히 이어가겠습니다.”

이혜진 선임기자 has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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