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체성을 영어로 쓴 시인 “어둠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려 해”

김나연 2026. 9. 1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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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캐나다 시인 에밀리 정민 윤(35)은 첫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한국과 서구 사이 윤의 위치는 한국에선 올해 출간된 두 번째 시집 '내가 우리를 짐승이라 말할 때'에서 두드러진다. 2024년 발행한 영어 시집을 직접 한국어로 옮겼다. "이번 시집은, 과감하게 말하면, 윤의 첫 번째 한국어 시집이다." 시인 스스로도 "쌍둥이를 내놓은 묘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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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캐나다 시인 에밀리 정민 윤 인터뷰]
첫 시집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목소리 다뤄
두 번째 시집은 영어로 쓰고 직접 한국어 번역
시는 아픔·분노·좌절의 에너지에서 나타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사랑으로 끝낸다면’ 고민해”
'2026 서울국제작가축제'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한국계 캐나다 시인 에밀리 정민 윤이 13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불완전한 영어 때문에 위축됐던 고등학생 시절, ‘문법과 발음을 틀려도 괜찮은’ 시로부터 해방감을 얻으면서 시 쓰기의 매력에 빠졌다. 한국문학번역원 제공

“내 불운이란 터질 듯 들어찬 전차. 너무 약한 칵테일. 바에서 한 미국 남성이 하는 말: 미국이 없었다면 한국에서의 네 삶이 완전히 달라졌겠지. 의미: 고마워해라. 캐나다 여자 친구가 던지는 질문: 너희가 그냥 잘 지내면 안 돼? 너희: 일본과 한국. 의미: 넘어가라.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넘어가라, 넘어가라, 넘어가라.” (‘일상의 불운’ 부분)

한국계 캐나다 시인 에밀리 정민 윤(35)은 첫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2018년 영어로 발간했고 2020년 한국어판(한유주 옮김)이 나왔다. 11세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 그는 왜 한국의 역사를 치열하게 파고들었을까. 시집의 첫 시편 ‘일상의 불운’에서 단서를 내비쳤던 시인이 직접 말했다. “번역하기조차 어려운 나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알고 싶었어요.”

에밀리 정민 윤이 출간한 두 권의 시집. 한유주 작가가 옮긴 첫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개인적인 고백으로 초점을 옮겨온 두 번째 시집 '내가 우리를 짐승이라 말할 때'는 영어로 쓴 뒤, 시인 본인이 한국어로 번역했다. 교보문고 캡처

윤은 한국과 캐나다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뉴욕대에서 영문학·문예창작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하와이대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다중의 정체성은 그를 ‘한국을 영어로 이야기하는 시인’으로 키웠다.

한국문학번역원 초청으로 ‘2026 서울국제작가축제’(11~16일)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를 13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통역 없이 한국어로 진행됐다.

에밀리 정민 윤이 13일 서울 종로구 아라아트센터에서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시를 쓴다는 건 시간을 늦추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시는 속독할 수 없는 장르이고, 모든 단어가 중요하고,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고 오래 사유해야 하다 보니 시간을 천천히 가져보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시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문학번역원 제공

“청소년기에 내가/ 곱슬머리를 갖고 싶었다는 게, 백인 소녀들처럼 되고 싶었다는 게 정말 이상하지. (…)/ (…) 여름날 인기 많은 여자애들이 말했어 네 피부색을 가질 수 있다면/ 죽어도 좋겠어” (‘머리카락’ 부분)

윤은 서구에서 아시아인으로 살아가는 경험, 대상화되는 고통을 자주 썼다. 그건 생각과 목소리를 지닌 사람이 아니라, 검은 머리에 노란빛 피부를 가진 ‘인종’으로 뭉뚱그려지는 일이다.

최근 K팝 열풍 등으로 한국이 널리 알려졌을 때의 기분은 어땠을까. 윤은 “달콤씁쓸(bittersweet)하다”고 말했다.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사람들이 드디어 볼 수 있다는 데 대해서, 물론 해방감이 있어요. 하지만 ‘한국인들은 예뻐’ ‘한국인들은 피부가 좋아’ 같은 새로운 스테레오타입이 생겨나는 것이 반갑지는 않아요. 또 다른 대상화가 이어지죠.”

에밀리 정민 윤은 인공지능(AI)에 대해 우려되는 점은 “진정성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연애편지는 제일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속 어딘가에서 진정성 있는 말을 끌어올려 쓰는 것인데, 그걸 AI에 맡긴다면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썼는지 구별할 수 없잖아요. 서로를 진정으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저는 세계 멸망처럼 느껴져요.” 한국문학번역원 제공

한국과 서구 사이 윤의 위치는 한국에선 올해 출간된 두 번째 시집 ‘내가 우리를 짐승이라 말할 때’에서 두드러진다. 2024년 발행한 영어 시집을 직접 한국어로 옮겼다. 한국어판을 펼치면 왼쪽에는 영어, 오른쪽에는 한국어로 쓰여 있다. 스스로 번역했기에 어느 정도 자유로운 재창작이 가능했다. 원문과 행갈이를 다르게 했고, 새로운 단어도 추가했다. 신형철 평론가는 썼다. “이번 시집은, 과감하게 말하면, 윤의 첫 번째 한국어 시집이다.” 시인 스스로도 “쌍둥이를 내놓은 묘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선택의 순간이 많았어요. 사실 라임, 운율처럼 (번역하면) 전달되지 않는 것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그럴 때 ‘잃어버렸구나’ 생각하지 않고 전체적인 멜로디를 살리려면 어떤 장치를 한국어에서 쓸 수 있을까 고민해요.”

가령 사랑의 모습을 한 폭력에 대해 쓴 시 ‘도리’의 원문에는 “wanted me, wanted me not, wanted me with pink cheeks” 등으로 이어진 구절이 있다. 시인은 이 시를 번역하면서 침 뱉는 소리 같은 ‘wanted’의 발음을 포기해야 했지만, 이 단어를 ‘바랐던, 벼르고, 버리고, 바래진’으로 변주하면서 새로운 톤을 입혔다. 시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것’에서는 “First, there was the horse”를 “태초에 말이 있었다”로 번역하며 원문에 없던 중의성을 얹었다. 시인은 “(언어를 바꾸며) 잃어버리는 게 있다면 또 발생하는 게 생기기 마련”이라고 웃었다.

에밀리 정민 윤은 ‘내가 우리를 짐승이라 말할 때’의 해설을 쓴 신형철 문학평론가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냈다. “보통 그렇게까지는 하시지 않는데, 영어와 한국어 둘 다 꼼꼼히 읽어주시고 더 좋은 번역을 제안해 주셨다”면서 “덕분에 몇몇 대목이 실제로 바뀌었다”고 했다. 한국문학번역원 제공

“미래는 아찔하지만 당신과 계속 사는 것이// 기다려져 견딜 수 없다./ 다음 생애에도 날 찾겠다고 약속해, 닦달한다.// (…)// 그렇게 당신이 찾아준다.// 어떤 한 생명체의 모습으로// 당신을 올려다보는 나를.” (‘다음 생’ 부분)

윤의 시는 어두운 사건, 고통, 폭력을 자주 다룬다. 그러나 이따금 지극한 사랑으로 반짝인다. 두 번째 시집에서 특히 그렇다. 마지막으로 배치된 시에 쓰인, 또 다른 생명체가 된 나를 ‘당신’이 찾아주는 순간, “You find me as the creature that I am”은 영어판 제목이 됐다.

‘시는 마음이 어두울 때 더 잘 써지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을 때, 시인은 “정확하다”고 끄덕였다. “시는 어두운 곳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사랑의 시를 쓰는 마음이 무엇인지도 물었다.

“시를 쓰면서 어두운 곳으로 글이 나아가고 있을 때, ‘그래도 어떻게든 사랑으로 끝난다면 어떤 모양일까’ 생각한 순간들이 있었어요. 항상 성공적이지 않고, 시라는 것은 가끔 자기만의 영혼이 생겨서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웃음) 어두운 곳으로 계속 나아가겠다고 하면 그렇게 둬야 하는 순간들도 있어서 그냥 고통으로 끝난 시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항상 시도는 한다”고 윤은 말했다. “결국 ‘사랑으로 끝내고 싶다’, ‘기어를 바꿔 다른 곳으로 가보자’ 한 시가 좋은 시인 것 같아요.”

김나연 기자 is2n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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