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브레이크 밟자”던 美 빅테크들… 뒤에선 가속 페달 밟았다

미국 인공지능(AI) 기업 수장들이 ‘AI 개발 속도를 늦추자’고 나섰지만, 정작 이를 주장한 기업들은 차세대 AI 모델 개발과 데이터센터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위험을 줄이기 위해 함께 ‘브레이크’를 밟자는 제안과 달리, 실제 개발 현장에서는 더 뛰어난 AI를 먼저 내놓기 위한 선두 경쟁이 수그러들지 않는 것이다.
중국은 한술 더 떠 AI가 인간 연구자의 도움을 덜 받고 스스로 학습·발전하는 기술에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미국 기업들만 AI 개발 속도를 늦출 경우 중국이 기술 격차를 좁힐 시간을 벌 수 있다. 결국 속도 조절론이 단지 선언에 그칠 것이라는 ‘무용론’도 나온다. AI의 위험을 줄여야 한다는 명분과 경쟁에서 뒤처질 수 없다는 현실이 충돌하는 것이다.
◇“속도 줄이자”면서 신모델·인프라 경쟁 가속
‘AI 속도 조절론’을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제안한 앤스로픽부터 이런 엇갈린 행보를 보인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스로픽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2일 경쟁 기업들을 향해 프런티어 AI 모델의 성능 향상 속도를 늦춰 안전성을 검증할 시간을 벌자고 제안했다. 정부 규제에 앞서 AI 기업들이 스스로 안전 기준을 만들고 경쟁사와 보조를 맞춰 개발 속도를 조절하자는 구상이다.
하지만 앤스로픽의 실제 행보에선 감속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미 악시오스는 14일 “앤스로픽은 올해 예정대로 미 나스닥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앤스로픽은 이날 금융 자문가의 투자 분석과 포트폴리오 관리 등을 돕는 기업용 AI 서비스도 출시했다. 속도 조절을 제안한 것과 별개로, 자금 조달과 사업 확장을 이어가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도 감속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신모델 개발 경쟁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아모데이의 주장에 “다리오가 맞는다”고 동의했지만, 13일 자신의 X에 “이번 주 2조5000억 파라미터 모델인 그록 4.8이 강화 학습 단계로 넘어간다”고 밝혔다. 파라미터는 AI가 학습 과정에서 조정하는 내부 변수로, 모델 규모를 나타내는 지표다. 강화 학습은 AI가 여러 답이나 행동을 시도한 뒤 평가와 보상을 받아 더 나은 결과를 내도록 학습하는 방식이다.
AI 개발을 위한 컴퓨팅 자원 확보 경쟁도 여전하다. 앤스로픽은 최근 미국 AI 인프라 기업 럼그룹과 6년간 137억달러(약 19조원) 규모의 GPU(그래픽 처리 장치) 컴퓨팅 계약을 맺었다. 오픈AI도 이달 초 AI 인프라 기업 퍼머스와 다년 계약을 체결하고 말레이시아 데이터센터의 컴퓨팅 자원을 공급받기로 했다.
AI 개발 속도를 늦추자면서, 이를 위한 ‘AI 공장’ 확보 경쟁은 더 치열해지는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AI 기업 수장들이 ‘지킬 앤 하이드’ 같은 면모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美 감속 논의에 中은 ‘스스로 진화하는 AI’
속도 조절론의 더 큰 걸림돌은 중국이다. 미국 기업들이 속도를 늦추더라도 중국이 이에 동참할 가능성은 낮다. AI 패권 경쟁이 점점 냉전시대 ‘군비경쟁’을 닮아가면서, 감속에 나선 쪽만 불리해질 수 있다.
중국 AI 기업 즈푸AI는 지난 12일 신주 배정과 전환사채 발행으로 50억달러(약 7조원)를 조달했다. 지난 7월 40억달러를 확보한 데 이어 두 달 만에 또다시 대규모 자금을 끌어모았다. 회사는 신규 자금의 60%를 차세대 AI 모델과 AI가 스스로 학습하는 ‘완전 자율 학습’ 기술 개발에 투입할 계획이다. 미국에서 AI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위험을 이유로 감속을 논의하는 사이, 중국은 AI의 자율성을 차세대 기술로 키우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도 미국발 속도 조절론에 선을 그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아모데이의 주장에 대해 “중국의 AI 발전을 억제하고 미국의 기술 우위를 유지하려는 ‘냉전식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중국 외교부는 “공포를 조장하고 악의적인 경쟁을 벌이는 것은 글로벌 AI 거버넌스를 방해할 뿐”이라고 밝혔다.
선두 기업과 후발 주자,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자율적인 합의만으로 속도 조절론이 현실이 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AI 업계 고위 관계자는 “(속도 조절로) 신모델 출시 주기가 길어지면 선두 기업은 천문학적인 개발비를 아낄 수 있지만, 중국 등 후발 주자에게는 ‘사다리 걷어차기’가 될 수 있어 동참할 유인이 없다”며 “속도 조절론은 선언에 그칠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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