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수장들 “속도 늦추자” 한마디에 반도체 급락… 트럼프 “중국만 좋아할 일”

“인공지능(AI) 개발 속도를 늦춰야 한다.”
지난 주말 미국 실리콘밸리의 AI 기업 수장들이 잇따라 이런 메시지를 내놓자 14일 뉴욕 증시에서 AI 관련주가 일제히 급락했다. AI 산업을 지난 수년간 최대한 빠르게 키워야 한다고 주장해 온 기업들이 돌연 “인류의 안전을 위해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돌아서자 투자자들이 AI 성장률 둔화 가능성을 주가에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는 이날 5.9% 급락했다. 엔비디아(-3.4%)를 비롯해 브로드컴(-4.8%)·인텔(-5.6%) 등 주요 반도체주가 동반 하락했고 나스닥지수도 0.6% 떨어졌다. 다우지수는 0.3%, S&P500지수는 0.5% 하락했다.
AI 기업 수장들과 정반대편에 선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4일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와 전화 통화하면서 “로봇이 세상을 장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AI 위험론을 “사기(hoax)”라고 일축했다. 젠슨 황 CEO도 “미국은 선두를 달리면서 동시에 안전하게 AI를 개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서는 수위를 더 높였다. 그는 AI에 필요한 유일한 통제 장치는 “강하고 똑똑한, 높은 IQ를 가진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AI와 데이터센터를 공격하는 “병든 음모가 있다”며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나라는 중국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AI에서 이기는 자가 승리한다(WHOEVER WINS AI, WINS!)”며 미국이 중국보다 앞서 있고 계속 선두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AI가 세계를 장악하고 인류를 파괴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거듭 “사기”라고 하면서 AI가 “석유·금·다이아몬드·인터넷보다 더 큰 역사상 최대의 경제 성장 엔진”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특히 앤스로픽을 겨냥했다. 그는 AI 개발 속도 조절을 주장한 앤스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CEO를 실명으로 거론하며 “완벽한 작은 천사인 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AI 기업에 대한 미국 정부의 “엄청난 형사·규제 권한”도 강조했다. AI의 위험을 우려해 개발 속도를 조절하자는 실리콘밸리 수장들과 중국과의 기술 패권 경쟁 때문에 오히려 속도를 더 내야 한다는 트럼프 행정부가 정면으로 맞서는 모양새다.
증시가 AI 충격을 받은 같은 날 미국 채권시장에서는 또 다른 경고등이 켜졌다. 중동 불안에 따른 국제 유가 급등과 인플레이션 우려로 미 국채 10년물 금리가 장중 5.012%까지 올라 2007년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후 매수세가 유입되며 4.96%로 내려왔지만, 10년물 금리가 5%를 넘어선 것은 2007년 이후 두 번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요 송유관 가동 중단 여파로 브렌트유는 배럴당 110달러에 육박했다.
◇“AI가 인류 죽일 수도”… 한꺼번에 브레이크 밟은 AI 수장들
AI 속도 조절론의 불을 붙인 사람은 다리오 아모데이 앤스로픽 최고경영자(CEO)다. 그는 지난 주말 공개한 글에서 “AI가 빠르게 고도화되는 만큼 위험을 막을 기술과 제도가 따라갈 시간을 벌어야 한다”며 “업계가 AI 발전의 속도를 늦춰야(slow the pace)” 한다고 주장했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 일론 머스크 xAI CEO, 구글 딥마인드를 이끄는 데미스 허사비스도 아모데이의 주장에 공개적으로 힘을 실었다.
AI 업계 내부의 경고 수위는 훨씬 높아졌다. 최근 앤스로픽을 떠난 연구원 제이컵 콕슨은 오픈AI와 앤스로픽이 “스스로 개선하는 초지능을 향해 질주하며 우리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앤스로픽 연구원 에번 허빙거는 “향후 10년 안에 AI가 모든 인간을 죽일 확률을 10% 이상으로 본다”고 했다.
문제는 AI 기업들의 사업 모델이다. 데이터센터와 AI 칩 등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데 비해 투자 대비 수익이 아직 충분히 입증되지 않자 월가는 이미 AI 기업들에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값싼 오픈소스 AI 모델이 등장하면서 고가의 최첨단 모델을 개발해 수익을 내는 사업에도 의문이 커지고 있다.
특히 오픈AI와 앤스로픽은 기업공개(IPO)를 준비 중이다. 이런 시점에서 등장한 ‘속도 조절론’을 두고 순수한 안전 문제뿐 아니라 사업적 이해관계도 깔려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나온다. 규제가 강화될수록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갖춘 기존 대형 업체는 대응할 수 있지만 후발 주자의 시장 진입은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멈추면 중국이 따라온다”… 트럼프가 브레이크 못 밟는 이유
이런 AI 속도 조절론에 가장 크게 반발하는 건 트럼프 대통령이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이 AI 안전론을 강하게 밀어내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우리는 AI에서 중국을 앞서고 있다”며 “솔직히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 AI에서 이기는 나라가 승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의 추격 속도는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중국 AI는 첨단 AI 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수출 통제로 오랫동안 미국에 뒤처져 있었지만 지난해 딥시크가 훨씬 적은 컴퓨팅 자원으로 미국 최첨단 모델에 근접한 성능을 냈다고 주장하면서 세계 AI 업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알리바바와 Z.AI, 미니맥스, 문샷 등 중국 AI 기업들도 빠른 속도로 새 모델을 내놓으며 오픈AI와 앤스로픽 등 미국 선두 기업과의 격차를 좁히고 있다.
월가에서도 AI 기업 수장들의 주장에 공개적인 반론이 나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직전 미국 주택시장 붕괴를 예측해 영화 ‘빅쇼트’의 실제 모델이 된 투자자 마이클 버리는 AI 기업들의 속도 조절 요구를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한(self-serving)”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버리는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 우선 현재의 AI 챗봇이 인간과 같은 범용인공지능(AGI)으로 가는 길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당장 개발을 억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개발 속도를 늦추면 이미 앞서 있는 대기업에는 유리하고 작은 경쟁 업체들의 추격은 어려워진다. 셋째, AI가 인류를 멸망시킬 만큼 강력하다고 강조할수록 오히려 AI 기업의 기술력이 부각돼 IPO를 앞둔 기업들의 몸값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넷째, 의도적인 속도 조절은 실제 사업 성장세가 둔화할 경우 이를 감추는 명분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버리는 특히 앤스로픽과 오픈AI 경영진이 IPO를 앞두고 “자신들의 힘에 대한 인식을 키우기 위해” 속도 조절을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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