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 ‘레모네이드’와 나미 ‘빙글빙글’ 사이 42년 꿰어…전자음악사 빈칸 채운다

에스파의 ‘레모네이드’는 첫 가사가 나오기 전에 신시사이저가 먼저 나온다. 1984년 나미의 ‘빙글빙글’도 그렇다. 전주에서 전자음이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곡 전체의 인상을 정한다. 42년이라는 시간 차가 무색하게도, 전자음악의 역사를 알고 나면 비로소 들리기 시작하는 소리가 있다
이대화 음악평론가는 두 곡을 나란히 놓고 들어보라고 권했다. 그는 “시대가 많이 달라졌으니 완전히 같다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그 시대에 가장 트렌디한 사운드를 흡수해 아주 멋진 댄스 음악을 만든 케이스라는 건 둘이 같다”고 말했다. 에스파 노래에서 자주 들리는, 금속을 긁거나 두드리는 듯 날카롭고 차가운 전자음을 팬들은 ‘쇠맛’이라고 부른다. 그 소리의 출처가 전자음악이다. ‘빙글빙글’ 역시 김명곤이 전자음을 앞에 놓고 만든 한국형 신스팝이었다.
이 평론가는 최근 <일렉트로닉 뮤직 명반 가이드북>을 냈다.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에 한정하지 않고 1968년부터 2020년대까지 대중음악 속 전자음악을 훑는다. 앞서 클럽과 DJ 중심 전자음악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백 투 더 하우스>, 2010년대 EDM 열풍기를 뮤지션 50명 인터뷰로 묶은 <댄스 뮤직 아카이브>를 냈다. 지금은 내년 출간을 목표로 <한국의 전자음악>(가제)을 쓴다. 1970년대 국내에서 신시사이저가 처음 쓰인 시점부터를 훑는 작업이다.
한국 음악평론이 밴드 사운드와 가창 중심으로 쌓여오는 동안 전자음악사는 비어 있었다. 전자음악을 다루는 웹진과 매거진은 여럿 있고, 그도 “나 혼자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다만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통사로 정리하는 사람은 그뿐이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던 빈칸을 채우며 흩어진 선구자들의 족적을 기록하는 그의 작업이 단순한 평론을 넘어선 ‘역사적 발굴’로 다가오는 이유다. ‘빙글빙글’을 작곡한 김명곤의 혁신적인 시도 또한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한 전자음악의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이 평론가가 이번 책을 위해 가장 만나고 싶었던 두 사람이 김명곤과 이호준인데, 둘 다 세상을 떠난 뒤였다. 지난 9월 7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자음악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이 책이 다루는 범위를 설명해달라.
“출발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전기 회로로 만들어낸 인공음, 즉 신시사이저를 쓰는 음악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녹음해둔 소리를 자르고 늘이고 뒤집어 곡의 재료로 쓰는 방식이다. 새소리든 기계 소리든 녹음하면 그게 악기가 된다. 이 책은 전자음악이 대중음악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1960년대 후반부터를 다뤘다. 1968년을 출발점으로 잡은 건 웬디 카를로스의 <스위치드 온 바흐>가 신시사이저를 세상에 널리 알린 앨범이기 때문이다. 기준은 새로운 기술을 도구 삼아 예전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던 소리의 영역을 개척했느냐다. 기타는 한 번 튕길 때마다 줄을 바꿔 끼울 수 없지만, 컴퓨터를 쓰면 음 하나하나에 다른 악기를 대응시킬 수 있다.”
-지금 쓰는 책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갔나.
“이장희 3집 <그건 너>에 실린 ‘촛불을 켜세요’를 들어보면, 기타나 피아노가 아니라 신시사이저가 연주하는 선율이 뚜렷하게 깔린다. 1973년이다. 1974년 영화 <별들의 고향> 사운드트랙에도 같은 소리가 쓰였고, 같은 해 송창식의 ‘새들’에도 쓰였다. 셋의 공통점은 당시 건반 연주자이자 편곡자였던 이호준이다. 아주 드물게 신시사이저를 먼저 연주한 분이다. 자료가 더 나오면 시점은 앞당겨질 수 있다.”
-조용필을 비중 있게 다룬다고 했다.
“‘단발머리’가 실린 1집 <창밖의 여자>를 들어보면 한 곡이 아니라 여러 곡에 신시사이저가 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역시 이호준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한국 전자음악 1세대라고 하면 보통 1990년대 윤상, 서태지 같은 미디 1세대를 얘기하는데, 1970~1980년대에 크게 히트한 음악 안에도 잘 들어보면 신시사이저가 있었다. 신스팝이 세계적으로 터지는 건 1981년인데 이미 1980년에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했다는 게 흥미롭다.”
-김광민 인터뷰에서 뜻밖이었던 이야기는.
“1980년대에 전자음악만의 미학을 가진 장르 음악은 한국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다. 그런데 신시사이저만큼은 생각보다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녹음실은 밴드가 쓰도록 장비를 갖춰놔야 하니, 무그와 폴리무그 같은 신시사이저는 물론 신시사이저는 아니지만 값이 비쌌던 전기 피아노 펜더 로즈까지 두고 있었다. 다만 제대로 다룰 사람이 없어 널리 쓰이지 못했다. 이호준, 김명곤, 변성룡, 김광민 같은 분들은 건반을 잘 치던 연주자 중에 앞선 사운드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이다. 배울 데가 없으니 독학하거나 자기들끼리 알음알음 익혔다.”
-장비는 어떻게 구했나.
“아무 데서나 살 수 있는 악기가 아니었고 가격이 너무 비쌌다. 오버하임이라는 유명한 신시사이저는 한국에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조용필이 미국에 갔다 오면서 사왔다더라. 김광민에게 들었다. 예전에 윤상을 인터뷰했을 때도 그 시절 얘기가 나왔다. 신시사이저를 볼 수 있는 데가 낙원상가밖에 없어 중학생 때 찾아갔더니, 1981년 한 악기사 쇼룸에 롤랜드 주피터-8이 있었다고 한다. 가격표를 80만원으로 읽고 대학 등록금보다 비싸다며 놀랐는데 다시 보니 800만원이었다. 10분 동안 0을 세어봤다더라. 윤상이 처음 산 신시사이저는 1987년에 50만원 주고 산 카시오 CZ-5000 중고품이었다.”
-‘뚜아에무아’ 출신 이필원이 집에 장비를 갖추고 혼자 전자음악을 만든 첫 사람일 수 있다고 했다.
“교차 검증을 하고 있다. 이필원 이전에도 이호준, 심성락처럼 신시사이저를 쓴 분들이 있다. 그분들이 기존 가요에 신시사이저 연주를 얹은 정도였다면, 이필원은 집에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연주와 작곡, 녹음을 혼자 해냈고 결과물도 전자음악이었다. 밴드 사운드에 새 소리를 하나 더하는 것과 전자음만으로 전자음악을 만들겠다는 건 태도부터 다르다. 윤상도 이필원을 국내에 신시사이저를 처음 수입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초등학생이던 윤상은 토크쇼 <11시에 만납시다>에서 이필원이 신시사이저를 연주하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방송에는 이필원이 ‘국내에 없던 기계를 어렵게 들여와, 처음 악기 상자를 풀고 소리를 듣던 날 감격해 며칠을 울었다’는 회고도 담겨 있었다.”
-이필원은 어떻게 찾았나.
“연락처를 구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을 뒤지다 용인일보에 실린 짧은 만남 후기 같은 글 하나를 찾았다. 그 필자에게 e메일을 써 답장을 받고 겨우 찾아뵀다. 가보니 1984년 6월 ‘음악동아’에 실린 자기 인터뷰를 갖고 계시더라. 스튜디오 사진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신시사이저들이 다 들어가 있고, 그때 기자가 그를 한국 전자음악의 선구자라고 적어놨다. 이제는 그 시절 신시사이저를 만지던 분들의 연락처조차 구하기 힘들다. 더 늦으면 끝난다.”

-실제로 늦었다고 느낀 적이 있나.
“가장 만나고 싶었던 분이 이호준과 김명곤이다. 한국 신시사이저의 거목인데 두 분 다 돌아가셨다. 그때 느꼈다. 기록은 빨리 해야 하는구나. 두 분이 들려줄 이야기가 제대로 된 역사였을 텐데, 그게 가장 큰 난관이다.”
-반대로 당사자가 자기 일을 기억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나.
“김광민 인터뷰가 그랬다. 해외에서도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신시사이저를 쓴 게 대중화의 계기였으니, 동서남북의 ‘나비’에 들어간 그의 연주가 중요하다고 봤다. 그런데 본인이 ‘내가 동서남북에서 신시사이저를 썼나’하며 계속 헷갈려 했다. ‘이 부분이요’하며 들려드리니 마지막에야 ‘내가 이렇게 했구나’ 하더라. 시나브로의 ‘을지문덕’에서도 신시사이저 솔로를 연주했는데, 그건 뭘 모르고 한 연주라 자랑스럽지 않다고 말했다.”
-전자음악만의 신은 왜 1990년대 후반에야 생겼나.
“세계적으로 전자음악이 대중화된 건 1980년대인데 그게 뉴웨이브 흐름의 하나였다. 뉴웨이브는 팝의 대안이던 록이 기성화되자 나온 대안이다. 그러니까 전자음악은 대안이 아니라 ‘대안의 대안’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대안조차 자리 잡기 힘들었다. 록과 포크는 국가가 탄압했고, 팬층도 두껍지 않았으니 대안의 대안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평론가에게도 진입장벽이 높다. 귀에 걸리는 멜로디나 리듬이 없는 음악은 평론가도 듣기 힘들어한다. 동료 평론가가 테크노를 듣고 ‘왜 7분 동안 똑같은 비트만 나오냐’고 한 적이 있다. 그 매력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차별화를 위해 시작했다고 했는데, 지금은 내가 안 하면 역사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하우스와 테크노의 역사를 원서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공부한 록이나 소울만큼, 혹은 그 이상 재미있었다. 이 역사가 소개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얼마 전 한국 1세대 DJ인 DJ 엉클이 돌아가셨는데 부고 기사가 두세개밖에 안 났다. 그분이 한국 DJ의 역사를 만들어온 이야기는 반드시 남겨야 한다. 다행히 예전 책에 길게 인터뷰해둔 게 있었다.”
-이 일을 택하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도 있나.
“2019년 4월 크라프트베르크가 내한했을 때 ‘보그 코리아’가 리더 랄프 휘터를 인터뷰하면서 나를 불렀다. 전자음악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해외에서도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아 한국 기자들도 만나본 적이 없다. 전자음악에서 전설을 하나만 꼽으라면 크라프트베르크고 그중에서도 랄프 휘터인데, 만난 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동시에 한국에 이걸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그 자리에 갔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길을 택하길 잘했구나’ 싶었다. 그때 받은 사인이 내 책 <백 투 더 하우스>에 있다.”
-이 작업으로 들어오는 돈이 있나.
“전혀 없다. 방송 준비와 칼럼 마감, 신곡 챙겨 듣기까지 끝나야 그다음에 책 집필을 시작한다. 저녁 늦게나 아침 일찍 머리가 맑은 시간에 쓴다. 크레디트가 적힌 실물 음반이나 옛 잡지 희귀본을 구하는 데도 돈이 든다. 이 책이 나와도 많이 팔릴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인기 있던 장르는 정보가 인터넷에 다 퍼져 있어 차별화된 이야기를 갖기 어려운데, 한국 전자음악사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나만의 이야기를 가질 수 있다.”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
“웹진 시절을 겪지 못한 음악 팬들은 내가 처음부터 전자음악만 팠다고 생각하더라. 그만큼 전자음악 저널리스트로 굳어졌다. 기회이자 족쇄다. 차별화는 되지만 전자음악 콘텐츠를 원하는 곳은 많지 않으니까. 그래도 기회 쪽을 보려 한다. 다만 올인하지는 않겠다. 팝과 록, 인디, 가요를 다루면서 동시에 전자음악도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
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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