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대 4위, 서울대 57위…학문 등산길, 단거리 경주 아니다

한겨레 2026. 9. 14.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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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하는 일을 바둑에 비기기도 하고 장거리 경주에 비기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을 등산에 비기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모든 소중한 것들이 그렇듯 학문도 끝없이 활동하고 갱신해 나가야 하는 생물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는 학문 숭상의 전통이 오래전부터 이어져왔고, 역대 학자들이 늘 제 몫을 다한 것은 아니나 그들의 자리는 사회적으로 존중되어왔다. 당연한 일이지만 학문의 내용과 그 사회적 기능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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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물리학자 장회익 경계를 넘어] 10화 학문과 대학 그리고 교수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학문하는 일을 바둑에 비기기도 하고 장거리 경주에 비기기도 하지만, 나는 이것을 등산에 비기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바둑이나 경주와는 달리 등산은 승부에 매달리지 않고 경쟁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자기 능력과 취향에 맞게 목표를 정하고 자기 흐름에 따라 걸음을 조정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정상을 목표로 삼고 여기에 빨리 이르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지만, 이것이 등산의 본령은 아니다. 이건 오히려 등산의 백미를 놓치게 한다. 산에 오르는 묘미는 산과 나 사이의 조화에 맞추어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는 데서 느껴지는 작은 즐거움을 이어가는 데 있다. 서 있는 나무, 돋아나는 들풀, 그리고 간혹 지나가는 다람쥐들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같은 듯 달라지는 주변 경관에 넋을 놓는다. 날이 맑으면 원경이 보여서 좋고 안개가 덮이면 가까운 수목 하나하나가 제 모습을 드러내 좋다. 그러다가 고지에 올라 탁 트인 조망을 만나면 그것 나름대로 큰 즐거움이다.

학문은 말하자면 일생을 두고 오르는 등산길이다. 빨리 올라가 남이 오르지 못한 새 봉우리에 첫발을 디뎠다는 영예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길게 보면 이것은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해 더 이상의 진전을 어렵게 만들기도 하고, 성급하게 발을 잘못 디뎌 다치게 될 위험도 키운다. 오직 자기 삶과 학문의 세계를 하나로 조화시켜 그 안에서 지속적인 즐거움을 찾아 나가는 길만이 장기적인 성취를 가능케 하며, 설혹 특별한 성취가 없더라도 그 삶 자체로 값지다.

등산길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의 길에도 가파르고 힘든 고비가 있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황막한 여정도 있다. 이때 위안을 주는 것이 좋은 동반자들이다. 다행히도 교단에 서게 되는 이들에게는 동반자가 있다. 교단은 단순히 학문을 나누어 주는 자리가 아니다. 동료와 학생이라는 동반자들과 학문의 길을 함께 걷는 여정이다.

대학이 있고 교수라는 자리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다행한 일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평생 학문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마땅히 그 뜻을 펼칠 자리가 없었을지 모른다. 대학은 인류가 높은 수준의 문명을 지어나가는 데 중추 구실을 하는 기관이고, 교수는 인류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 할 학문 그 자체를 다듬고 전수해 나가는 자리라 할 수 있다. 모든 소중한 것들이 그렇듯 학문도 끝없이 활동하고 갱신해 나가야 하는 생물이다. 인류 문명을 사람 몸에 비유한다면 학문은 바로 그 사람의 의식이며 그 삶을 이끌어 갈 정신적 지주이다.

그렇기에 이런 자리를 지켜 나가는 사람들 역시 보상 여부에 무관하게 보람과 긍지를 느끼게 된다.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는 학문 숭상의 전통이 오래전부터 이어져왔고, 역대 학자들이 늘 제 몫을 다한 것은 아니나 그들의 자리는 사회적으로 존중되어왔다. 당연한 일이지만 학문의 내용과 그 사회적 기능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그 자체로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감으로써 학문 그 자체를 발전시키고 인류의 문명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대학 또한 이 사회 안에서 홀로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국가 또는 주변 사회의 적극적 지원 아래 그 기능을 다하게 되며 이들과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크게 발전할 수도 있고, 또 상대적으로 낙후할 수도 있다. 이 점과 관련해 두가지 사례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나는 1965년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리버사이드 캠퍼스)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그때가 미국 대학, 특히 캘리포니아 대학의 최전성기였다. 당시 클라크 커라는 거물급 총장이 재임 기간(1958~1967)에 9개 캠퍼스 체제로 대학을 엄청나게 키우고 그 위상을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학계에서는 많은 칭송을 받았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본 사람도 있었다. 그중 중요한 인물 한명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인데, 그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자마자 첫번째로 한 일이 이 대학 예산을 20% 삭감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에 커 총장은 대학 전체의 입학 사정을 중단시키고, 만약 예산을 복원하지 않는다면 학생 수를 20% 줄이겠다고 맞섰다. 그러자 주지사 레이건은 그 즉시 커 총장을 파면했다. 이때 교수진 동요가 심했는데, 내 지도교수였던 조지프 캘러웨이(1931~1994)도 학교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마침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에 학술진흥(Center of Excellency) 프로그램이 있어서 캘러웨이 교수를 특별우대 교수로 영입했고, 나 또한 그를 따라 학교를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삼십년 뒤, 내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아시아 물리교육 네트워크(Asia Physics Education Network)의 한국 대표로 한동안 활동한 일이 있는데, 당시 중국 대표로 있던 사람이 베이징대학 물리학과 교수이면서 그 대학 부총장을 하던 분이었다. 그때 그분이 말하길 베이징대 물리학과 교수가 대략 100명이라 했다. 당시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가 대략 30여명 수준이었기에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100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교수실을 다 마련해 줄 수 없어 일부는 자기 집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지금 10개 캠퍼스 체제인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은 여전히 세계의 우수 대학으로 꼽히지만, 이미 상대적 위상은 많이 떨어졌다. 국제적으로 영향력 있는 논문의 기여도를 평가하는 ‘네이처 인덱스’(Nature Index)를 보면, 2025년 자연과학 분야에서 베이징대학은 세계 4위에 오르고 캘리포니아 대학(버클리 캠퍼스)은 21위에 머물러 있다(참고로 서울대는 57위).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왔나? 내 머리에 아른거리는 것은 내가 들은 100명이라는 물리학 교수 수이다. 당시 어느 기준으로도 베이징대가 서울대보다 나을 게 없었는데, 교수실조차 마련해 주지 못한다던 이 100명의 교수가 차이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요즘 중국이 첨단 과학기술의 많은 분야에서 미국을 제치고 있는 저력은 바로 이런 교육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간단히 말해 대학 안에 학자들을 모아 놓는 것만으로도 학문은 발전하게 되어 있다. 많은 지원을 하지 않더라도 학문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학문할 토대만 마련해 주면 학문은 저절로 성장한다.

언젠가 나는 학문 발전의 모형으로 ‘모닥불 모형’을 제시한 일이 있다.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기는 어렵지만 몇몇 마른 장작을 모아 일단 불만 붙여 주면 여기에 웬만큼 젖은 장작을 가져다 얹어도 다 함께 타들어 간다는 것이다. 재정적 지원은 거기에 기름을 붓는 셈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을 모아 함께 타들어 갈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다. 일단 학문적 기질을 가진 학자들을 모아 놓고 이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일할 여건만 만들어 주면, 그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자기 보조에 맞추어 필요하다면 서로 협력하면서 학문을 해 나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학문 활동이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그리고 삶의 보람으로 느껴질 때 성과는 정점을 찍는다.

요즈음 교수들이 마치 단거리 경주나 하듯 무자비한 경쟁 체제로 내몰리고 있는 세태가 걱정스럽다. 힘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어느 정도 경쟁 심리를 발동시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등산을 단거리 경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사회가, 대학 당사자들이, 그리고 동료들까지 나서 이러한 경쟁을 부추기고 있지만 여기에 지나치게 놀아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바로 교수 자신이다.

이럴 때 나는 어느 조용한 하루를 내어 가까운 산에 올라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어떻게 올라갔다가 어떻게 내려오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일인지를 직접 온몸으로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자연처럼 좋은 스승은 없기 때문이다.

장회익 | 1938년 경북 예천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30여년 교수로 일하다 퇴임하고, 지금은 충남 아산에서 살고 있다. 자유로운 사색을 통해 통합적 학문의 모습을 그려보는 ‘소요거사’로 지낸다. 물리학 말고도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의 이해, 동서 학문의 비교 연구, 온전한 앎의 성격 등에 관심이 있다.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생명을 어떻게 이해할까?’, ‘공부도둑’(‘공부 이야기’),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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