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용까지 떠났다”…끝내 풀지 못한 5·18 발포 명령, 이제 기록·과학으로

황의재 기자 2026. 9. 14.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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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 명령권자 침묵 속 잇단 영면
아카이브·상설 전담 기구 설치 '절실'
암매장 유해 발굴 조사 통한 '역추적'
美 미공개 기밀자료 등 요청 '시급'
"진실 밝히는 것이 생존자의 의무"
5·18유적지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기초연구 사업이 국가유산청 연구지원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5·18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의 핵심 책임자인 신군부 5인방이 끝내 입을 닫은 채 모두 사망하면서 발포와 학살의 실체를 밝혀줄 가해자 증언의 기회가 영구히 사라졌다.

침묵으로 일관한 이들의 입만 바라보던 기존의 조사 한계를 넘어 이제는 관련 사료의 교차 검증과 과학 기술을 이용한 암매장 유해 발굴을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하는 분수령을 맞았다.

지난 13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서 무력 진압의 지휘 책임 선상에 있었던 정호용(94) 전 국방부 장관이 사망했다.

12·12 군사반란과 5·18민주화운동 관련 내란 등의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정 전 장관이 끝내 사죄나 진실에 관한 증언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면서, 전두환·노태우·이희성·박준병을 포함해 당시 신군부 핵심 인물 가운데 발포 명령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이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침묵에 막힌 진상규명…미공개 기밀문서 확보와 사료 대조 시급하다
가해자들의 직접적인 증언을 기대하기 어려워지면서 당시 지휘체계와 최종 발포 명령권자를 규명하는 작업은 남아 있는 군 기록과 관련 사료를 대조하고 추적하는 방식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동안의 조사 역시 가해자들의 침묵과 조직적인 기록 은폐 의혹 등으로 인해 5·18 당시 발포 책임의 윗선을 규명하는 데 뚜렷한 한계를 보여왔다.

실제 2024년 발표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진상조사위) 종합보고서에 따르면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였던 '군에 의한 발포 경위 및 책임 소재' 안건은 끝내 '진상규명 불능'으로 종결됐다.

진상조사위는 1980년 5월20일 광주역 일대에서 제3공수여단 병력에 실탄이 분배됐고 현장 장병들의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처럼 중대한 사안임에도 당시 제3공수여단의 작전상황일지와 전투상보 등 주요 군 기록에는 발포 시간과 장소, 발포 부대 등 구체적인 내용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12·12 군사반란과 5·18민주화운동 당시 유혈 진압에 관여한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 13일 오전 사망했다. 사진은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정 전 장관의 빈소. 연합뉴스

이에 5·18기념재단과 관련 연구자들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미국 국무부 등 해외 기밀문서와 국군방첩사령부의 전신인 옛 보안사의 미공개 자료 등을 추가로 확보·분석하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2020년 5월 미국 국무부는 우리 정부와 외교부의 공개 요청에 따라 관련 문서 82건 가운데 43건을 이관했다.

하지만 5·18 당시 발포와 학살 등 핵심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당시 군사 상황과 지휘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국방부와 군 정보기관, 한미연합사 등이 생산한 관련 기밀문서가 추가로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까지 이들 자료에 대한 추가 공개 여부는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

파편화된 진술과 유해 발굴의 교차 검증…"살아있는 자들의 남은 의무"
상층부의 직접적인 증언을 기대하기 어려워진 만큼 말단 계엄군의 파편적인 진술과 기존 군 기록을 면밀히 대조·검증하는 작업과 함께, 행방불명자 소재를 확인하기 위한 과학적 유해 발굴도 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가해자들의 증언이나 명시적인 발포 지시 기록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학적 조사를 통한 유해 수습은 단순히 실종자를 찾는 차원을 넘어 5·18 진실 규명의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습된 유해에서 확인되는 총상 형태와 탄두의 종류, 매장 방식 등 법의학적 증거를 당시 특정 부대의 작전 구역과 이동 경로 등의 기록과 교차 검증할 경우 발포와 희생 과정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물증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5·18기념재단은 올해 7월 광주 북구 효령동 일원에서 진행한 발굴 조사에서 5·18 희생자와의 연관성이 낮다는 잠정 결론이 나오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행방불명자를 찾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유해 발굴 작업은 중단하지 않고 지속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5·18기념재단과 지역 전문가들은 말단 계엄군의 파편화된 진술과 기밀 해제 문서를 영구적으로 수집·분석할 상설 아카이브 및 후속 연구 전담 기구를 신설해 대응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고재대 5·18기념재단 사무처장은 "핵심 책임자 사망에 따른 증언 확보에 물리적 한계에 직면해 사료 교차 검증 등 조사가 더 중요해졌다"며 "다만 관련 기록물 이관과 접근 권한을 가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를 관리할 상설 조사 전담 기구가 절실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5·18 관련 단체들 역시 신군부 핵심 인물 5인의 사망과 무관하게 철저한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양재혁 5·18유족회장은 "정호용씨가 학살의 주범 중 한 명으로서 진실을 밝힐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외면하고 사과 없이 떠난 것에 대해 참담하고 허망하다"며 "세월이 더 가기 전에 그리고 가해자들이 계속 사망하기 전에 더욱 철저하게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것이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