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군 같은 무더위 속 '네 평 반 피난처' [낭만야영 가리산]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무더위와 장맛비가 기상 예보를 빗나가는 변덕스러운 날씨의 연속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땀 흘리면 되고, 비가 내리면 시원하게 맞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배낭을 둘러멨다.
평일 오후의 가리산을 우리 둘이서 독차지했다.
암릉을 끼고 돌아 반대편으로 가자 바위에 막혀 있던 바람이 비로소 불어왔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더위와 장맛비가 기상 예보를 빗나가는 변덕스러운 날씨의 연속이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땀 흘리면 되고, 비가 내리면 시원하게 맞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배낭을 둘러멨다. 날씨에 몸을 맡기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시원한 곳으로 가기로 했다. 강원도 홍천 가리산(1,051m)은 결코 낮은 산은 아니지만, 산세가 험하지 않아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여름이면 계곡 물소리가 더욱 풍성해져 비가 오지 않더라도 더위를 식혀 준다. 여름의 가리산은 계곡을 품은 피서지다.

39℃로 예열된 에어프라이어
백패킹의 매력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는 친구 이경실이 이번 산행에 함께했다. 가리산자연휴양림에 도착해 차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차량 에어컨에 얼굴을 들이대고 근육이 마비될 정도로 버티다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이 살인적인 더위에 맞서기 위해서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나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는가. 다이빙도 좋고, 운동도 좋아하지만, 변화무쌍한 산이 좋다. 산은 계절마다, 날씨마다, 심지어 똑같은 산을 올라도 그때그때 느낌이 달라 늘 처음 만나는 얼굴 같다.
하지만 정상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느끼는 감정만큼은 늘 비슷하다. 산 아래에서는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고, 가진 것을 지키고자 분주하게 살아간다. 반면 산 위에는 평소 쉽사리 느낄 수 없었던 여유와 치유가 있다. 이를테면 "나만 없어 삼전닉스!"를 외치다가 "왜 내가 사면 떨어지는 거야!"에 지친 가여운 영혼을 달래 주는 곳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가치투자를 핑계 삼아 손절의 유혹을 견디다 보면, 어느새 산 위에서 작은 해탈 하나쯤은 얻게 된다.

내 몸뚱아리는 39℃로 예열된 에어프라이어 같은 가리산 입구에 서 있었다. 오아시스 같은 계곡을 꿈꾸며 산행을 시작했다. 들머리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곡이 나타났다. 등산로와 하산길이 만나는 그곳에는 수량이 풍부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시원한 계곡물에 씻어냈다.
우거진 나무숲은 뜨거운 태양을 막아줬지만, 바람마저도 스며들 틈이 없어 금세 땀방울이 맺혔다. 계곡 옆에 텐트를 칠까 했지만, 경험상 텐트를 치고 나면 몸이 식어 서늘해질 것이다. 시원한 물소리를 뒤로 한 채 길을 걸었다. 무더위를 빼면 등산로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다만 모래사막을 걷듯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더위만이 쾌적함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오르막은 쉼 없이 이어졌다.
마지막 자존심
앞서가던 경실이가 걸음을 멈췄다. 붉게 핀 하늘말나리를 휴대전화로 찍고 있었다.
"안 돼! 꽃 찍지 마!"
경실이에게 장난스레 외쳤다.
"언니, 이제 나이 들었나 봐. 꽃만 보면 찍고 싶어~"
경실이가 해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나도 그래. 그래도 프로필에 꽃 사진을 올리지 않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야!"

어느새 중년이 된 두 여자는 한바탕 웃고는 꽃을 뒤로 한 채 다시 산을 올랐다. 앞서 걷던 경실이가 숲의 끝에 멈춰 섰다. 능선이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들어 우거진 초록의 물결 위에 윤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햇살조차 다정하게 느껴졌다.
능선은 계단으로 이어졌다. 가리산은 대부분 부드러운 육산이지만 정상부는 세 개의 암봉이 우뚝 솟아 있다. 거대한 바위를 따라 놓인 데크 계단을 오를수록 바위의 위용이 점점 커졌다. 미로처럼 이어진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마침내 가리산 정상에 올라섰다. 암릉을 만나기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이 360도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오후 7시가 가까웠지만, 일몰은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평일 오후의 가리산을 우리 둘이서 독차지했다. 일몰을 느긋하게 감상하기 위해 서둘러 텐트를 쳤다. 해가 서서히 기울자 능선마다 옅은 황금빛이 번졌다. 열기가 가득 차 희뿌옇던 산그리메는 점차 선명해졌다.

요동치는 바다 위로 여명이 밝아오는 듯한 착시를 불러 일으켰다. 겹겹의 산들은 검푸른 실루엣만 남긴 채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빛을 잃어가는 하늘과 땅 사이로 붉은 노을이 짙게 드리워졌다. 세상에 균열이 생긴 듯 갈라진 틈으로 석양이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절벽 위의 작은 텐트에 앉아 있을 뿐인데, 무릉도원을 한자리 차지한 기분이었다.
저 멀리 소양강이 은빛으로 빛났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가리산 2봉과 3봉은 한 폭의 수묵 담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높은 곳에 서기 위함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낮에는 햇살이 계곡을 따라 흐르고, 저녁에는 노을이 골짜기를 채우며, 밤에는 별빛이 어둠을 메운다. 그 중심에 머물러 있으면 마음속 시끄러운 것들이 조금씩 잠잠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집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넓은 정원을 가진 나만의 안식처인 것이다. 미미한 존재이지만 거대한 산맥의 일부가 되어 누리는 감동은 붉은 노을의 잔상처럼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이다.

다음날 이른 새벽, 텐트 밖은 벌써 환했다. 텐트 문을 열자 세상이 온통 하얀 곰탕이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제가 화려한 색채의 가리산이었다면 오늘의 가리산은 색채를 극도로 제한한 수묵 담채화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자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절벽이 드러나더니, 2봉이 점점 선명해졌다. 화려함 대신 신비로움이 감돌았다. 2봉과 3봉은 데크로 이어져 있어 금세 하산길로 들어섰다.
촉촉한 안개는 뙤약볕보다 나았지만, 바람이 없으니 불쾌지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암릉을 끼고 돌아 반대편으로 가자 바위에 막혀 있던 바람이 비로소 불어왔다. 안개에 젖은 피부를 스치는 아침 바람은 상쾌했다. 숲길로 들어서자 다시 덥고, 습하고, 기나긴 하산로가 이어졌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합수곡까지 내달려 안개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시원한 계곡물에 씻어내고 싶었다. 계곡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합수곡에서 멀지 않은 위치였다. 500ml 물병을 손에 든 노부부와 마주쳐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앞서 있던 할아버지가 물었다.
"정상은 아주 먼가요?"
"안타깝게도 정상까지 2시간은 더 올라가셔야 해요. 근데 물이 한 병뿐이에요? 날이 더워서 물이 많이 필요하실 텐데요."

배낭이 없는 걸 보니, 휴양림에서 가볍게 올라오는 듯했다.
노부부는 서로 마주보며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정상까지 가실 거면 제 여분 물 한 병 드릴 게요."
배낭 포켓에서 물 한 병을 꺼내며 말했다.
"어차피 영감이 힘들어해서 정상까지 못 갈 것 같으니, 물은 이걸로 충분해요. 고마워요."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보고 웃으며, 무거운 짐을 메고 하산하려면 물이 더 필요하지 않겠냐며 극구 사양했다. 두 분도 정상에 서서 광활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길 바랐다. 인사를 하고, 다시 하산을 시작했다.

공짜로 맞은 봉침, "돈 굳었네!"
물소리를 따라 조금 걸어 내려오니, 바로 합수곡에 도착했다. 우리는 바위 위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고생한 발을 물에 담그기 위해 배낭에서 타월을 꺼내는데 순간 허벅지가 따끔했다.
"엄마야!"
경실이도 동시에 소리쳤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바위에서 멀찍이 물러섰다. 벌이었다. 바위틈 어딘가에 벌집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선 계곡물에 냉찜질을 했다. 따끔함이 가라앉자 타월을 적셔 땀을 닦아냈다. 더위가 식자 배낭이 놓인 바위로 다가갔다. 벌집은 바위틈이 아닌 바위벽 중간에 길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딱 허벅지 높이였다. 어쩌면 허벅지로 벌집을 건드렸을지도 모를 만큼 가까웠다. 멀찌감치 서서 휴대폰 카메라로 확대해 보니, 기다란 벌집에는 열댓 마리의 벌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을 건드렸으니, 벌침 한방으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미안!"
벌에게 알아듣지도 못할 사과를 건네고, 재빨리 배낭을 집어 들고 나왔다. 경실이에게 괜찮냐고 묻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언니, 돈 주고 봉침도 맞는데, 우리는 공짜로 맞았으니, 돈 굳었어!"
경실이의 낙관적인 말에 긴장이 풀렸다. 이후 며칠 동안 가려움에 고생은 했지만, 무료 봉침 덕분에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민미정 깨알 팁
<아무도 묻지 않아도 알려주고 싶은 정보>
산행 정보
산행 코스
가리산휴양림~합수곡~무쇠말재~정상~가삽고개~합수곡~가리산휴양림 (원점회귀)
산행거리와 소요시간
7km, 4시간 (휴식시간 포함)
산행 중 벌에 쏘였을 때
1 벌침이 보이면 바로 제거한다.
·핀셋이 없으면 카드처럼 평평한 물체로 긁어내듯 제거한다.
·손가락으로 침을 세게 눌러 짜내는 것은 절대 금물!
·말벌은 일반적으로 침을 남기지 않지만 여러 번 공격하므로 즉시 그 장소에서 벗어난다.
2 쏘인 부위는 냉찜질한다.
·붓기를 막기 위해 물에 적신 옷을 이용해 10~20분 정도 냉찜질한다.
·반지나 시계처럼 조이는 물건은 손가락이나 팔이 붓기 전에 바로 뺀다.
3 전신 증상을 살핀다.
·벌에 쏘인 후 숨이 차거나, 목·혀가 붓고, 어지러움, 전신 두드러기와 함께 혈압이 떨어지는 등 이상 증세가 있으면 응급상황이다. 하산을 시도하기보다 119에 신고하고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4 상비약으로 항히스타민제를 준비한다.
·벌에 쏘인 뒤 가려움이나 두드러기 같은 알레르기 증상 완화에 도움을 준다.
·졸음을 유발하는 제품도 있으므로 복용 후 운전이나 위험한 산행은 피한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