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울릉의 지붕’ 성인봉... 바다 위 984m, 가을이 먼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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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전 본지는 울릉 도동항에서 KBS 울릉중계소를 거쳐 오르는 코스로 성인봉을 직접 올랐다.
해발 984m. '울릉의 지붕'으로 불리는 성인봉은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하지만 성인봉에 오르면 바다에서 바라본 울릉도와는 전혀 다른 '섬의 속살'을 만나게 된다.
바다 위 984m. 매일 성인봉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주민들에게도, 처음 울릉도를 찾은 관광객에게도 지금 성인봉은 섬의 가을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최적의 목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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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전망대 오르면 나리분지·기암 능선·쪽빛 바다가 한눈에

13일 오전 본지는 울릉 도동항에서 KBS 울릉중계소를 거쳐 오르는 코스로 성인봉을 직접 올랐다.
해안 마을에는 아직 늦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지만, 등산로에 발을 들이는 순간 공기부터 달라졌다. 머리 위를 빼곡하게 덮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잘게 부서져 내렸고, 숲 안쪽에서는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한층 서늘해진 채 몸을 스쳤다.
숲은 여전히 한여름처럼 짙은 초록빛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늘진 목재 계단 위에는 노랗고 붉은 잎 몇 장이 성급하게 내려앉았다. 정상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일부 나뭇잎 끝에도 옅은 붉은빛이 번지고 있었다. 완연한 단풍은 아니었지만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만큼은 분명했다. 울릉도의 가을이 해안보다 높은 산에서 먼저 시작되고 있었다.
해발 984m. ‘울릉의 지붕’으로 불리는 성인봉은 울릉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숫자로만 보면 1000m에 조금 못 미치지만, 가파른 화산섬 지형을 따라 이어지는 오르막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계단과 흙길을 번갈아 오를수록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그러나 고개를 들 때마다 펼쳐지는 울창한 숲이 거친 호흡을 달래준다. 나무 사이로 스며든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는 잎,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을 비껴간 원시림의 풍광이 산행의 피로를 덜어낸다.
이날 산행 중 만난 장덕수(44·울릉읍)씨는 “초밥집을 운영하다 보니 따로 건강관리를 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주말 이른 아침마다 친구나 선배들과 함께 산에 오른다”며 “가파른 길이라 땀은 흠뻑 나지만, 짙은 원시림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와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 일주일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고 말했다.

장씨의 말처럼 성인봉의 진짜 매력은 단순한 높이가 아니라 숲 그 자체에 있다. 정상부 일대 원시림은 천연기념물 제189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너도밤나무와 섬피나무, 섬고로쇠나무 등 울릉도의 독특한 식생이 군락을 이루면서, 오랜 세월 섬의 생태계를 지켜왔다.
울릉 주민들에게 성인봉은 단순한 관광명소나 등산 대상이 아니다. 섬 한가운데서 사방으로 산줄기를 뻗어내고, 비와 눈을 품었다가 계곡과 하천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삶의 터전이다. 성인봉에 내린 비와 눈은 숲과 땅속에 머물다 섬 곳곳의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울릉도의 모든 하천에 물을 대는 거대한 수원지이자, 주민들의 삶을 떠받쳐 온 ‘섬의 젖줄’인 셈이다. 바다를 끼고 살아가는 울릉 주민들에게 산이 그만큼 소중한 이유다.
고도를 높일수록 숲의 표정도 조금씩 달라졌다. 등산로 아래쪽의 짙은 녹음과 달리 정상 가까이에서는 붉은 기운을 머금은 잎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발아래 놓인 바위는 더욱 거칠어졌고, 산길의 경사도 한층 가팔라졌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즈음 빽빽했던 숲이 열리면서 성인봉 정상 표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정상에 오른 산행객들은 표지석을 사이에 두고 두 팔을 들어 올리거나 손가락으로 ‘V’를 그렸다. 땀에 젖은 얼굴에는 가파른 오르막을 이겨냈다는 성취감이 묻어났다. 파란 하늘 아래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고요했던 산정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성인봉 산행의 백미는 정상 표지석에서 약 15m 떨어진 전망대에서 만날 수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자 발아래로 나리분지와 울릉도의 굽이치는 산릉이 한꺼번에 펼쳐졌다. 화산 활동이 빚어낸 깊은 분지와 송곳처럼 솟은 봉우리, 그 너머 끝없이 이어지는 쪽빛 동해가 한 폭의 거대한 풍경화를 완성했다.
산 아래에서 바라보던 바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우고, 산봉우리 사이로 드리운 구름 그림자는 울릉도의 깊고 거친 굴곡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발길을 멈춘 산행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절경이었다.
울릉도를 처음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해안도로와 기암절벽, 독도 여행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성인봉에 오르면 바다에서 바라본 울릉도와는 전혀 다른 ‘섬의 속살’을 만나게 된다. 바다와 원시림, 화산지형을 한 번의 산행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도 육지 산에서는 쉽게 찾기 어려운 성인봉만의 매력이다.

성인봉은 울릉도를 평면적인 섬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입체적인 화산섬으로 확인시켜 주는 장소다. 가을 성인봉은 화려한 단풍보다 계절이 넘어가는 찰나의 순간에 그 묘미가 있다. 짙은 초록 사이로 하나둘 번지는 붉은빛과 나무계단 위에 내려앉은 첫 낙엽, 정상에서 맞는 서늘한 바람이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을 동시에 알려준다.
다만, 울릉도의 산은 날씨 변화가 빠르고, 이슬이나 비가 내린 뒤에는 목재 계단과 바위가 미끄러울 수 있다. 등산화와 식수, 얇은 바람막이를 반드시 준비하고 출발 전 탐방로 개방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울릉도의 가을은 달력보다 높은 곳에서 먼저 시작된다. 바다 위 984m. 매일 성인봉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주민들에게도, 처음 울릉도를 찾은 관광객에게도 지금 성인봉은 섬의 가을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최적의 목적지다.
/황진영 기자 h0109518@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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