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신군부 핵심’ 정호용 전 국방장관 사망…끝내 미완으로 남은 5·18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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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 직후 신군부 권력의 핵심에 올라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관여한 책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이 13일 오전 사망했다.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하면, 신군부 핵심 인물 5명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정 전 장관은 최근 건강이 악화해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수원아주대병원으로 옮겨진 뒤 이날 오전 숨을 거뒀다.
서울고법은 정 전 장관이 신군부와 국헌문란의 목적을 공유했고, 시민군이 남아 있던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예상하면서도 작전의 계획과 실행에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정 전 장관은 진상조사위가 전두환·노태우·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황영시 전 육군참모차장과 함께 우선 대면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던 신군부 핵심 인물 5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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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네 차례 광주 방문, 육참총장·내무·국방장관 거쳐 국회의원
사법부, 전남도청 재진입작전 관여 인정…징역 7년 확정 뒤 특별사면
직접 발포 명령은 미규명…생전 책임 인정이나 공식적인 사과 없어
(시사저널=변문우·이태준 기자)

12·12 군사반란 직후 신군부 권력의 핵심에 올라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관여한 책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이 13일 오전 사망했다. 향년 94세.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하면, 신군부 핵심 인물 5명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정 전 장관은 최근 건강이 악화해 서울아산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수원아주대병원으로 옮겨진 뒤 이날 오전 숨을 거뒀다. 유족은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를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 전 장관은 군인으로 출발해 육군참모총장과 내무부·국방부 장관, 재선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 신군부와 함께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1997년 대법원은 정 전 장관에게 반란중요임무종사와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뇌물수수 방조 등의 책임을 물어 징역 7년을 확정했다. 특히 시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전남도청 재진입작전의 계획과 실행을 지원한 책임이 인정됐다.
다만 계엄군의 최초 발포와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를 누가 지시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정 전 장관은 생전 자신에게는 광주 진압작전 지휘권이 없었으며 발포에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법원이 인정한 책임을 공개적으로 수용하거나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별도의 사과 없이 생을 마감했다.
육사 11기·하나회…12·12 직후 특전사령관으로
정 전 장관은 1932년 9월10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 11기에 입학해 1955년 임관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사 동기였으며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초기 핵심 구성원으로 분류된다.
육사 11기와 하나회 인맥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등장한 신군부의 인적 기반이었다. 정 전 장관은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 당시 대구에 주둔한 육군 제50사단장이었다. 전두환·노태우 등과 함께 서울에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거나 병력을 출동시킨 현장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반란 직후 그의 군내 지위는 급격히 상승했다. 신군부는 12·12에 저항하다 부하들에 의해 체포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해임하고 정 전 장관을 후임 사령관으로 발탁했다. 신군부가 군의 핵심 전투부대인 특전사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전두환·노태우의 육사 동기이자 하나회 핵심이었던 정 전 장관이 지휘권을 넘겨받은 것이다.
정 전 장관이 맡은 특전사 예하에는 이듬해 광주에 투입된 제3·7·11공수특전여단이 있었다. 이들 부대는 광주 시민과 학생을 구타하고 총격을 가한 계엄군의 핵심 병력이었다.
1980년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도 정 전 장관은 계엄의 전국 확대에 힘을 보탰다. 계엄 확대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나오자 그는 '사회 안정을 위해 군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취지로 주장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날 밤 비상계엄은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정치활동 금지와 대학 휴교령이 내려졌고 국회는 군 병력에 의해 봉쇄됐다. 정치인과 재야인사, 학생운동 지도자들도 체포됐다. 광주에서는 계엄 확대와 휴교령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됐다.

"작전지휘권 없었다"…광주에서 확인된 81시간
정 전 장관은 5·18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지 않았다고 줄곧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공수여단들이 육군본부 명령에 따라 전투병과교육사령부 등 현지 부대에 작전배속됐다는 데 근거한다. 작전지휘권이 현지 사령관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특전사령관인 자신은 인사와 장비·보급 등 행정·군수 지원만 담당했다는 것이다. 실탄 지급이나 경고사격, 자위권 발동, 발포명령과도 무관하다고 했다.
공수여단에 대한 공식 작전통제권이 현지 지휘부로 넘어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재판과 진상조사에서 확인된 정 전 장관의 실제 행적은 그가 광주 작전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었다는 주장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정 전 장관은 2021년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제출한 진정서에서 1980년 5월20일부터 27일까지 네 차례 광주를 방문했다고 밝혔다. 그가 제출한 자료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광주 체류시간은 모두 약 81시간에 달했다.
진상조사위는 정 전 장관이 처음 광주에 내려간 5월20일 작전 현안을 보고받는 회의를 주재했다는 복수의 진술을 확보했다. 당시 장세동 특전사 작전참모가 회의를 진행했고, 광주에 투입된 3·7·11공수여단장이 참석해 시위 진압 상황을 논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같은 회의는 정 전 장관이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열린 것으로 파악됐다. 전교사 상황실 2층에는 특전사령부가 별도로 사용하는 상황실도 설치됐다.
1980년 5월22일 박충훈 당시 국무총리 서리가 광주를 방문했을 때 촬영된 영상에는 정 전 장관이 군 관계자들과 함께 회의하는 장면도 담겼다. 이 영상은 자신이 광주에서 열린 주요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정 전 장관의 과거 설명과 배치됐다.
정 전 장관은 전남도청 재진입작전을 하루 앞둔 5월26일 밤에도 광주로 내려왔다. 법원과 진상조사위는 그가 공수여단의 특성과 훈련 상태를 현지 지휘관에게 설명하고, 작전에 사용할 가발과 수류탄, 항공사진 등 장비를 마련해 배분한 사실을 확인했다. 작전 투입을 앞둔 예하부대원들을 격려한 사실도 인정됐다.
육참총장과 두 부처 장관 거쳐 재선 국회의원으로
5·18 이후 정 전 장관의 군 경력에는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신군부 정권 아래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특전사령관을 거쳐 제3야전군사령관을 맡았고 1983년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1985년 대장으로 예편한 뒤에도 권력 핵심부에 머물렀다.
1987년 1월 내무부 장관에 임명돼 경찰과 지방행정을 관할했다.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뒤에는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움직임을 초기에 차단해야 한다며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같은 해 7월에는 국방부 장관에 임명돼 전두환 정권이 끝날 때까지 재임했다. 군복을 벗은 뒤 내무부와 국방부 수장을 잇달아 맡은 그의 이력은 당시 정권 내부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보여준다.
정 전 장관은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구 서구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 비리와 5·18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리면서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됐다.
그는 청문회에서도 공수여단들이 현지 부대에 작전배속돼 자신에게는 작전지휘권이 없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노태우 정부와 여권은 5공 청산 여론이 거세지자 그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고, 정 전 장관은 1990년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정 전 장관은 이 과정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해 다시 당선됐다.

내란목적살인 유죄 확정…책임 인정·사과 없어
정 전 장관에 대한 형사책임이 확정된 것은 사건 발생 후 17년이 지난 1997년이었다. 검찰은 1995년 12·12 및 5·18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고, 정 전 장관은 이듬해 내란중요임무종사와 반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업인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는 과정에 관여한 혐의도 적용됐다.
1996년 8월 1심 재판부는 정 전 장관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다만 1심은 전남도청 재진입작전과 관련한 내란목적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정 전 장관이 작전을 직접 지휘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무죄라고 판단했다.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은 정 전 장관이 신군부와 국헌문란의 목적을 공유했고, 시민군이 남아 있던 전남도청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예상하면서도 작전의 계획과 실행에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정 전 장관이 현장에서 특공조를 직접 지휘하지 않았더라도 공수부대의 책임자로서 재진입작전을 지원하고 실행에 관여한 이상 내란목적살인의 공동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다만 항소심은 내란목적살인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면서도 전체 형량은 징역 7년으로 낮췄다. 대법원은 1997년 4월17일 이 판결을 확정했다.
사법부가 인정한 것은 5월27일 전남도청 재진입작전의 계획·지원·실행에 관한 책임이었다. 정 전 장관이 5월21일 집단발포를 직접 명령했다는 사실까지 확정한 판결은 아니었다. 정 전 장관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약 8개월 만인 1997년 12월 전두환·노태우 등과 함께 특별사면됐다. 1980년 6월 광주 진압 공로로 받은 충무무공훈장은 유죄 확정 이듬해인 1998년 12월 취소됐다.
정 전 장관은 이후 자신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군사반란과 내란 관련 유죄 판결로 지급이 중단된 군인연금을 다시 지급해 달라는 소송에도 참여했다. 법원은 헌정질서 파괴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의 연금을 제한한 조치가 정당하다고 보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9년 12월12일에는 전두환, 최세창 등 신군부 인사들과 서울의 한 고급 음식점에서 오찬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군사반란 40년이 되는 당일 관련자들이 함께 식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성 없는 '기념 오찬'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 전 장관은 2021년 5·18진상조사위에 자신의 책임을 다시 조사해 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그는 자신이 5·18 책임자로 지목된 것은 노태우 정부의 정치적 희생양이 됐기 때문이며, 내란목적살인죄로 처벌받은 것은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는 작전회의와 특전사 전용 상황실, 광주 체류 기록, 전남도청 재진입작전 지원 사실 등을 근거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 전 장관은 진정서를 제출한 뒤 미국으로 출국했고, 조사위의 대면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조사위는 서면 답변과 기존 자료를 검토한 끝에 정 전 장관을 광주 진압의 지휘·책임선상에서 제외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조사위는 2024년 기존 형사재판의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았던 5월27일 전남도청 진압 희생자 7명을 추가로 확인했다. 이에 따라 정 전 장관과 당시 공수여단장 등을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수사기관에 고발하기로 의결했다.
2025년 대통령선거 때는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 명단에 정 전 장관의 이름이 올랐다. 5·18 유혈진압 책임자를 선거대책기구에 영입했다는 비판이 일자 국민의힘은 발표 약 5시간 만에 위촉을 취소했다.

규명되지 않은 '발포 명령' 지시
정 전 장관의 역사적 책임은 법원과 진상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 아직 규명되지 않은 의혹들이 맞물리면서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다. 그가 △ 5·18 당시 특전사령관이었고 △ 광주에 네 차례 내려가 약 81시간 체류한 사실 △ 공수여단장들이 참석한 회의를 주재한 사실 △ 특전사 전용 상황실을 운영한 사실 △ 5월27일 전남도청 재진입작전을 지원한 사실은 재판과 진상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재진입작전에 관한 형사책임 역시 대법원의 유죄 판결로 확정됐다.
반면 정 전 장관이 5월21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나 그에 앞선 개별 발포를 직접 지시했다는 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와 계엄사령부·육군본부·특전사·현지 지휘부 사이에서 어떤 비공식 보고와 명령 체계가 작동했는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2024년 활동을 종료한 5·18진상조사위도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의 경위, 최종 명령권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정 전 장관은 진상조사위가 전두환·노태우·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황영시 전 육군참모차장과 함께 우선 대면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던 신군부 핵심 인물 5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다. 앞선 인물들이 충분한 진술을 남기지 않은 채 잇달아 사망한 가운데 정 전 장관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 군 지휘부의 입을 통해 발포와 진압 결정의 전모를 확인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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