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주 더봄] 트렁크의 비밀

양선주 시인·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 2026. 9. 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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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주의 미니픽션]
어마어마한 악기들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1

무엇을 넣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몽땅 다 때려 넣고 싶었다. 텅 빈 트렁크, 우선 필요한 것들을 고르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음악, 물론 책도 필요하다. 옷은 두 벌이면 적당하다. 여행하는 동안 이 트렁크와 함께할 것이다. 그러므로 트렁크는 나 아닌 내 것들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또한 이유 없이 들끓는 내 안의 분노와 절규를 이 트렁크도 함께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결해 줄 그 무엇. 터질 듯 가슴을 폭파할 무엇. 그것을 트렁크에 넣어야 한다. 이제 트렁크와 나는 한 몸이다. 트렁크와 함께 갈증을 해결할 곳으로 떠나야 한다.   

거대한 트렁크. 원하는 어떤 물건도 다 집어넣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짐을 싸자. 어떤 것도 무방하다. 트렁크에 넣는 것은 모두 각별하다. 

우선, 몇 권의 소설책과 화집을 넣는다. 잠자리의 필수인 잠옷, 격식을 갖춘 옷들은 짐만 될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음악. 이 들끓는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주는 것은 오직 음악뿐이다. 이제 나는 악기와 더불어 연주를 해야 한다. 이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표출해야 한다. 물론 어느 곳이든 방음은 형편없을 것이다. 어디 간들 내 안의 시끄러움을 충분히 해소할 장소는 없다. 그러나 내 안의 절규를 부르짖고 싶다. 이 분노와 울분을 신나게 두들기고 싶다.    

트렁크에 악기가 될 만한 것들을 모두 넣는다. 두들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오케스트라를 연상시키는 물건들, 그 어떤 것도 악기로 충분하다. 라면을 끓였던 냄비, 밀가루 반죽을 밀던 방망이, 들썩거리던 주전자 뚜껑. 길고 억센 쇠 국자, 그 무엇도 괜찮다. 여기저기 찾아보면 물건은 즐비하다. 30센티 철제 자를 넣고, 모서리가 뚝 부러진 깔때기를 넣었으며, 책상 서랍 속 모둠으로 묶인 유아용 심벌즈와 캐스터네츠, 태극 북을 넣었다. 아직 트렁크는 휑하다. 더 넣을 수 있고, 가득 채울 수 있다. 집 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악기가 될 만한 새로운 악기를 찾았다. 공구함에서 망치 두 개를 꺼냈고, 마지막으로 구관조가 있는 새장을 넣었다.

—잘 다녀와! 머리 좀 식히고, 구경도 많이 하고.

아내는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내의 눈빛에서 잠깐 구관조의 비웃음을 본 것도 같다. 하지만 나를 보내는 서운함에 맺힌 눈물이라고 나는 멋지게 생각했다. 

—다녀올게. 밥 잘 챙겨 먹고.

우리의 인사는 다정했다. 가벼운 포옹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 입맞춤은 트렁크가 우리 사이에 끼어 있어서 하지 못했다. 아니 자연스럽게 생략됐다.  
미니픽션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임 /제미나이 나노바나나

2

이름은 백장미. 외벽은 허름했으나, 실내는 견고하고 깨끗했다. 총 3층으로 된 계단식 모텔이었다. 주인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침대 방을 원했고,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트렁크를 친구처럼 조심히 데리고 방으로 들어섰다. 방은 오후 햇살을 받아 환했다. 그림자가 긴 목을 빼고 기다린 듯, 창문 틈으로 기웃거렸다. 온종일 걸어 다리가 아팠다. 

집을 떠나 타지를 걷는 동안 분노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백장미에 들어서는 순간, 집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분노와 답답함이 또다시 온몸을 조여 왔다. 이 격정은 내가 머물 201호의 방문을 여는 순간 순식간에 몰려왔다. 복도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방과 방을 잇는 백장미의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다. 그러나 방문을 여는 순간, 무언가 또 내 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내도, 아이도, 한 마리 늑대도 아니었다. 누군가 내 안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숨 쉴 수 없었다. 가까스로 트렁크를 바짝 끌어당겼다. 왼손으로 가슴골을 움켜쥔 채 트렁크를 힘겹게 열었다. 

그런데, 트렁크 안에서, 어마어마한 악기들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온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온몸을 바들대다 트렁크 덮개를 활짝 제치고 하나씩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생뚱맞은 포즈로 서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북들과 어마어마한 콘트라베이스·바이올린·첼로·트롬본·클라리넷··· 있을 수 있는 모든 악기가 한데 뭉쳐 소음이 아닌, 비명과 탄식이 섞인 울분의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집에서부터 안고 있었던 모든 외침과 격분을 부술 것처럼. 그들은 방음 따윈 생각하지 않고, 온몸을 뒤흔들며 무자비한 악단처럼, 지휘하지 않는 나를 지휘자로 두고, 내 앞에서 엄청나고 거룩한 연주를 했다. 그동안 내가 못 한 말들이 악기를 통해 함성을 지르듯, 온몸을 떨어대며 웅장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마지막으로 넣었던 새장이 불현듯 생각났다. 분명 트렁크에 구관조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연주하는 내내 구관조는 보이지 않았다.

—당신 닮았다. 그치? 선물이야.

—당신 닮았다. 그치? 선물이야.

아내가 처음으로 선물한 새장. 아내는 해맑게 웃었고 구관조는 아내를 따라 했다. 이 구관조가 트렁크에 갇혀, 오케스트라의 긴 연주가 끝나는 동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울분을 가라앉히던 연주가, 다시 나를 억누를 수 없는 감정으로 끌고 갔다. 그 이유가 끝까지 보이지 않는 구관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별안간 더욱 큰 절망이 왈칵 솟구쳤다. 

트렁크가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다시 또 트렁크에 무언가를 채워, 백장미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더는 설명할 수 없는 비애와 목마름이 심장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트렁크는 한 소절도 지저귀지 않았다.                          

여성경제신문 양선주 시인·한국미니픽션작가회 회원
zoo-mouse@hanmail.net

☞미니픽션=아주 짧은 분량 속에 완결된 서사를 담아낸 초소형 소설을 말한다. '한 뼘 소설', '손바닥 소설(掌篇小說)', '플래시 픽션(Flash Fiction)' 등으로도 불리며 주로 설명은 생략하고 상징이나 묘사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끝맺는다. 짧은 틀 안에 소설적 재미와 철학을 압축해 놓은 '문학의 에스프레소'라고 할 수 있다. 

양선주 시인·작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응용언어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하며 문단에 데뷔해 시집 <사팔뜨기>를 출간했다. 건강 문제로 인한 긴 공백기 끝에 2025년 시집 <열렬한 심혈관>, 산문집 <시는 내 곁으로 와 눕고>(공저)를 펴내며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소설미학>에서 동화, <월간문학>에서 동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장르를 넘나드는 문학적 역량을 펼치고 있으며, 동화책과 동시집 발간을 앞두고 있다.

*여성경제신문 기사는 기자 혹은 외부 필자가 작성 후 AI를 이용해 교정교열하고 문장을 다듬었음을 밝힙니다.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 중 AI로 생성한 이미지는 사진 캡션에 밝혀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