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엘리자벳을 사랑했다, 엘리자벳은 삶을 사랑했다

양형모 기자 2026. 9. 1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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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엘리자벳'을 몇 번이나 보고 나면 어쩐지 새삼스러운 질문 하나가 남는다. 엘리자벳은 정말 죽음을 사랑했을까.

뮤지컬 '엘리자벳'은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1837~1898)의 삶에 '죽음'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끌어들인 작품이다.

그렇다면 '엘리자벳'은 죽음을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에게조차 자기 삶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여자의 이야기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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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사랑했다, 엘리자벳은 번번이 삶을 택했다 ‘나는 나만의 것’, 황실과 죽음 모두에게 보낸 선언 루돌프를 잃은 뒤 뒤집힌 관계…이번에는 죽음이 거절했다 이지혜의 엘리자벳, 죽음을 밀어내는 소녀를 오래 품다

뮤지컬 ‘엘리자벳’의 ‘마지막 춤’ 공연 모습. ‘죽음’ 역의 서경수(왼쪽)가 ‘엘리자벳’ 역의 이지혜(오른쪽)를 향해 노래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를 죽음의 천사들이 가로지르며 엘리자벳을 향한 ‘죽음’의 유혹을 형상화한다.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뮤지컬 ‘엘리자벳’을 몇 번이나 보고 나면 어쩐지 새삼스러운 질문 하나가 남는다. 엘리자벳은 정말 죽음을 사랑했을까.

프롤로그에서 루케니는 주장한다. 엘리자벳이 평생 죽음을 사랑했다고. 그런데 정작 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먼저 반한 쪽은 오히려 죽음이 아닌가.

뮤지컬 ‘엘리자벳’은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1837~1898)의 삶에 ‘죽음’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끌어들인 작품이다. 자유분방한 소녀 엘리자벳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사랑에 빠져 황후가 되지만, 황궁에 들어간 뒤 시어머니 소피의 통제와 엄격한 궁정생활에 부딪힌다.

자유를 찾아 끊임없이 황궁 밖으로 향하고 아들 루돌프의 죽음까지 겪는다. 그의 곁에는 매혹적이며 신비로운 남자의 모습을 한 ‘죽음’이 평생 따라다닌다. 마지막에는 실제 역사처럼 무정부주의자 루이지 루케니의 흉기에 찔려 생을 마친다.

어린 엘리자벳이 사고로 죽음과 마주했을 때 죽음은 그에게 매혹된다. 자신의 세계로 데려갈 수도 있었지만 살려 보낸다. 이후에도 끈질기게 엘리자벳의 삶에 끼어든다. 황궁에 갇혔을 때, 남편에게 상처받았을 때. 삶이 무너질 때마다 나타나 손을 내밀며 노래한다.

“나에게 오면 자유로워질 수 있어.”

하지만 엘리자벳은 번번이 그 손을 뿌리친다.

재미는 여기서 생긴다. ‘죽음과 사랑에 빠진 황후의 이야기’라고만 보기에는 둘이 좀처럼 박자가 맞지 않는다. 죽음은 계속 구애하고 엘리자벳은 끌리면서도 돌아선다. 황실에도, 남편에게도, 죽음에게도 자신을 내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엘리자벳의 저 유명한 넘버 ‘나는 나만의 것’은 프란츠와 소피에게만 던지는 선언이 아니다. 죽음에게 보내는 말로도 들린다.

아직은 네 것이 아니라고.

뮤지컬 ‘엘리자벳’의 ‘내가 춤추고 싶을 때’ 장면. ‘엘리자벳’ 역의 린아(가운데)가 황후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노래하고, ‘죽음’ 역의 카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엘리자벳과 죽음 사이의 긴장과 밀고 당김을 시각적으로 드러낸 명장면이다.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죽음 역시 꽤 복잡한 연인이다. 그는 엘리자벳에게 자유를 약속한다. 황실은 제도에 따르는 황후이기를 요구하고, 프란츠는 순종하는 아내이기를 원하며, 루돌프는 자신을 구원해줄 어머니를 찾는다. 죽음만은 황후도, 아내도, 어머니도 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역시 결국 엘리자벳을 갖고 싶어 한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겠다는 여인에게 가장 완벽한 자유를 약속하는 존재가 동시에 마지막 소유자가 되려 한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달콤한 연애보다 긴 줄다리기에 가깝다. 엘리자벳의 삶을 누가 결정할 것인가. 죽음은 손을 내밀고 엘리자벳은 그 손을 잡을 시간을 자신이 정하려 한다.

둘의 위치가 뒤집히는 것은 루돌프를 잃은 뒤다.

그전까지 죽음은 엘리자벳을 데려가려 했고 엘리자벳은 삶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아들이 죽자 이번에는 엘리자벳이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한다.

뜻밖에도 죽음은 거절한다.

이 대목은 볼수록 묘하다. 죽음이 원한 것이 엘리자벳의 목숨뿐이었다면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는 기다린다. 절망에 떠밀려 오는 엘리자벳이 아니라 언젠가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일 엘리자벳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죽고 싶은 것’과 ‘죽음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는 듯.

루돌프를 잃은 직후의 엘리자벳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마지막의 엘리자벳은 다르다. 오랜 방랑과 고독을 거친 뒤 삶의 끝에 닿았을 때 죽음은 다시 찾아온다. 이번에는 밀어내지 않는다. 마침내 찾아온 죽음을 받아들인다.

평생 살기 위해 죽음을 거부했다. 자신의 시간을 다 써버린 뒤에야 그를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엘리자벳’은 죽음을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에게조차 자기 삶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던 여자의 이야기로 읽힌다.

‘나는 나만의 것’을 부르고 있는 ‘엘리자벳’ 역의 이지혜. 어두운 고딕풍 무대와 밝은 의상이 강한 대비를 이루며,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려는 엘리자벳의 의지를 부각한다.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이렇게 보면 내가 본 이지혜의 ‘엘리자벳’도 달리 보인다. 이지혜는 소녀 시절의 엘리자벳을 오래 품고 간다. 잘 웃고, 잘 뛰고, 사랑에도 쉽게 마음을 연다. 무엇보다 살아 있는 쪽의 기운이 강하다. 그래서 극 초반 죽음과의 관계도 연애라기보다 죽음의 일방적인 구애에 가깝게 느껴진다. 죽음은 이미 사랑에 빠졌는데 엘리자벳은 아직 세상에서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앞서 ‘엘리자벳’을 연기한 많은 선배 배우들이 황후가 된 뒤의 위엄과 저항에 무게를 실었다면, 이지혜는 황후가 되기 전의 소녀에 더 오래 머문다. 덕분에 죽음을 밀어내던 소녀가 마지막에 그를 받아들이기까지 지나온 세월이 더 길고 선명하게 느껴진다.

죽음은 처음부터 엘리자벳을 사랑했다. 엘리자벳은 끝까지 삶을 사랑했다.

오랫동안 엇갈렸던 둘은 아주 늦게, 정말 마지막이 되고서야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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