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서 갑자기 발작·각혈…그날 이후 친구들은 날 '가습기'라 불렀다

최주연 2026. 9. 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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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행위를 '스포일러(스포)'라 합니다.

피해 학부모들은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학교 측의 가습기 참사에 대한 무지와 냉담한 제도라고 입을 모은다.

20여 년 전, 아이들이 자는 방에 가습기 연기가 더 잘 닿도록 직접 방향을 꺾어주었던 그날의 손길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그의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잘 자라기를 바라며 틀어준 가습기가 죄가 돼 아이 청춘이 날아갔습니다. 엉터리 시행령으로 급을 나누고 선을 그을 게 아니라, 우리가 떠나고 나서 아이들만 남더라도 온전히 살아가도록 국가가 제대로 된 울타리를 만들어줘야죠." 현서씨의 할머니가 단단하고 절박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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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별명은 '가습기', 따돌림, 트라우마로 쌓여가는 무기력
뛰는 것도 힘든 피해 청년, 73%가 현역 판정
"아침에 가슴을 치면서 일어나요" 피해자 부모 괴롭히는 죄책감
편집자주
이야기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행위를 ‘스포일러(스포)’라 합니다. 어쩌면 스포가 될지도 모를 결정적 이미지를 말머리 삼아 먼저 보여드릴까 합니다. 무슨 사연일지 추측하면서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한 장의 사진만으로 알 수 없었던 세상의 비하인드가 펼쳐집니다.
피해자 민수연씨가 8월 3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 서영철 전국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연대 대표가 의료용 산소통을 들고 참석해 있다(왼쪽 사진). 피해자 이현서씨가 9월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성폐쇄성폐질환 환자들이 흡입하는 렐바를 흡입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피해자 이현서씨가 9월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성폐쇄성폐질환 환자들이 흡입하는 렐바를 흡입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나도 친구들처럼 웃통 벗고 운동하고 싶다고!"

이현서(25)씨의 할머니 임재이(80)씨는 몇 년이 지나도 손자가 쏟아낸 분노의 외침을 잊을 수 없다. 태중부터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돼 이른둥이로 태어난 현서씨는 비결핵성 폐질환을 겪으며 병원 입퇴원을 반복했지만, 좀처럼 불만을 내비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담담하던 그도 사춘기 앞에선 한 차례 폭발했다. 거울 속 약물치료, 호흡장애 등으로 오목하게 파인 가슴과 마른 몸을 마주하며, 자신의 삶이 또래 친구들과 전혀 다르게 흘러갈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직격타를 맞았던 영유아기 아이들이 어느덧 청년기를 맞이했다. 환경부가 이용우 의원실에 제출한 피해자 실태조사(1,213명 응답, 2025년)에 따르면, 10대 이하와 20대 피해자가 321명으로 전체 응답자의 26.5%에 달한다. 참사 당시 뱃속 태아나 아기였던 피해자 상당수가 청소년과 성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영유아 참사로만 기억되던 비극은 이제 '학업·병역·취업'이라는 현재진행형 일상으로 피해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피해자 이현서씨의 어릴 적 사진. 이현서씨 제공
피해자 이현서씨가 9월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본보 취재에 응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피해자 이현서씨가 9월 3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성폐쇄성폐질환 환자들이 흡입하는 렐바를 흡입하고 있다. 최주연 기자

피해 청소년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고통은 학교 현장의 무지 속에서 또래 집단으로부터 소외당하는 현실이다. 두 살 때부터 약 10년간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민수연(58)씨의 둘째 아들 A(20)씨는 담당 교사의 오해로 인해 평생 잊히지 않을 트라우마를 얻었다. 늘 체육 시간에 앉아있는 아이를 '배려'한다며 강제로 뛰게 한 것이다. 그날 하교한 둘째는 결국 피를 토해냈다. 황급히 찾아간 병원에서는 "아이 폐 상태는 뛰다가 터질 수도 있을 정도로 약한 상태"는 진단을 내렸다. 이후 극심한 컨디션 난조와 호흡 발작에 시달려야 했던 A씨는 학창시절 내내 양호실을 방문했다.

육체적 통증은 정서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호흡 발작으로 또래들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본 친구들은 A씨를 기피했고, 이는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A씨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조금만 컨디션이 나빠져도 외출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면서 현재는 학업을 중단하고 휴학 중이다. 한 학부모는 "아이들 사이에서 별명이 '가습기'라고 불리는 등 또래 사이에서 기피 대상이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실제 피해자 측에서 직접 환경부에 전달한 피해 청소년 심층 사례 조사(40건)를 보면, 응답 가구 자녀 중 80% 이상이 학교생활과 학업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호소했다. 수업 집중 어려움(67.5%), 친구관계 및 적응 어려움(55%)을 겪은 학생은 절반 이상이었다.

피해 학부모들은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학교 측의 가습기 참사에 대한 무지와 냉담한 제도라고 입을 모은다. 한 학부모는 "아이가 참사 여파로 자살고위험군으로 분류돼 심리치료를 다녀왔는데, 학교에서는 이를 출석으로 인정해주지 않고 미인정 결석 처리했다"며 "아이의 마지막 학업 의지마저 학교가 꺾어 놓았다"고 토로했다.

피해자 이연수씨가 9월 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피해자단체가 설치한 고 서영철 대표의 빈소 앞에 서있다. 최주연 기자
8월 3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4대 종단 추모제에 피해자들이 참석해있다. 최주연 기자

청소년기를 겨우 버텨낸 남학생들을 기다린 것은 '병역 잔혹'이었다. 피해 청소년의 72.6%가 현역(1~3급) 판정을 받는다.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한 현서씨는 훈련소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서리를 친다. 현서씨는 “불침번을 서고 장거리 이동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다 보니 목에서 피가 쏟아졌다.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이 '장거리 이동하다 저산소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며 의견서를 써줘서 훈련소를 조기 퇴소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힘겹게 복무를 마쳤지만 그는 여전히 예비군 소집 대상이다.

청년이 된 피해자들에게 구직의 벽은 유독 더 높다. 현서씨는 특성화고에서 용접을 배웠지만 폐질환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어렵게 들어간 물류센터에서도 부상과 호흡 곤란이 반복되자 주변의 태도는 서늘해졌다. 몸 상태가 안 좋아 조퇴를 하러 사무실을 찾은 날, 친절했던 직원은 굳은 얼굴로 사유도 제대로 듣지 않고 "알겠으니 가라"고 말했다. 그것이 현서씨의 마지막 출근이 됐다. 이후 현서씨는 구직을 포기한 채 집에서 쉬고 있다.

우주비행사를 꿈꾸던 이연수(28)씨도 3살 때부터 약 5년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며 인생이 뒤바뀌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마라톤을 뛸 정도로 건강했지만 기흉을 진단 받은 후 우주비행사는 물론, "외압과 내압이 커지는 스쿠버다이빙이나 해양생물학 등은 절대 안 된다"는 의사의 말에 관심분야를 모두 포기해야 했다.

정규직 취업의 길도 막혔다. 면접관에게 피해 사실을 밝히면 일자리를 얻지 못할까 두려워 병력을 숨긴 채 행사 단기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는 실정이다. 무거운 짐을 들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티를 내지 않는다. 연수씨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상위권이었는데 참사 이후 집중력이 떨어지고 삼수와 단기 알바를 전전하게 되면서 절망감이 컸다"고 고백했다.

피해자 민수연씨가 8월 3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고 서영철 전국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연대 대표의 4대 종단 추모제에 의료용 산소통을 들고 참석해 있다. 최주연 기자
8월 3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4대 종단 추모제 중 서영철 대표의 영정이 집회 전 비닐에 덮여있다. 최주연 기자

이 모든 비극의 그늘 뒤에는 평생을 죄책감과 간병의 굴레 속에서 함께하는 부모들이 있다. 1994년부터 가습기살균제를 썼던 민수연씨의 사연은 가족 단위 참사의 가장 참혹한 단면을 보여준다. 외출할 때마다 산소통을 들고 다녀야 하는 민씨 본인의 극심한 피해는 물론, 독성 여파로 뱃속에서 잃은 아이만 5명이다.

민씨는 여전히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뜰 때마다 가슴을 치며 일어난다. 20여 년 전, 아이들이 자는 방에 가습기 연기가 더 잘 닿도록 직접 방향을 꺾어주었던 그날의 손길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그의 가슴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오는 10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 개정안 시행을 앞두고 있지만, 피해자들은 마냥 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시행령에 피해 등급별로 피해자에게 등록금을 차등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김영환 전 사회적참사특별참사위원회 조사관은 "학습권은 중증도와 관계없이 침해된 것인데 그것에 좁은 지원 기준을 들이미는 것이 문제"라며 "생애주기 지원만큼은 피해등급의 판정과 별개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잘 자라기를 바라며 틀어준 가습기가 죄가 돼 아이 청춘이 날아갔습니다. 엉터리 시행령으로 급을 나누고 선을 그을 게 아니라, 우리가 떠나고 나서 아이들만 남더라도 온전히 살아가도록 국가가 제대로 된 울타리를 만들어줘야죠." 현서씨의 할머니가 단단하고 절박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피해자 이현서씨가 하루에 두 번씩 흡입하는 천식이나 만성폐쇄성폐질환(COPD) 환자들이 사용하는 흡입형 치료제 '렐바 200'. 최주연 기자
8월 31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4대 종단 추모제 중 국화 위로 비가 떨어지고 있다. 최주연 기자

최주연 기자 juic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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