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 도라지가 꽃을 피운다는 걸 몰랐다 [임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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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식물은 식탁 위에서 더 자주 마주한다. 강원도 고성에서 예술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내던 중, 산책길에서 바람결에 우아하게 하늘거리는 도라지 꽃밭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얼마 후 그 길을 다시 지났을 때, 도라지꽃은 모조리 시들해지고 있었다. 애초에 꽃이 핀 도라지를 보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평범한 풍경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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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식물은 식탁 위에서 더 자주 마주한다. 그 식물이 자연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실제로 보거나 상상해보는 일은 드물다. 내게는 도라지가 그랬다. 뿌리를 먹는다는 것만 알았지, 흙 위의 도라지는 어떤 모습인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강원도 고성에서 예술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내던 중, 산책길에서 바람결에 우아하게 하늘거리는 도라지 꽃밭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어느 집 담장 아래 별 모양의 보라색·하얀색 꽃이 떼 지어 자라는 모습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씨앗을 뿌려 몇 해 동안 키운 뒤 뿌리를 수확해 먹을 수 있는데, 그사이 피는 꽃도 아름답다. 여러 화단에서 도라지를 보았지만 이렇게 빼곡히 심어진 화단을 본 건 처음이었다. 자신의 꽃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큰 키의 도라지들이 힘없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종종 보았는데, 이곳에선 어떻게 도라지가 꼿꼿이 서 있는지 신기했다.

가만히 보니 빼곡하게 자란 도라지들은 줄기와 잎이 서로 맞닿아 있었다. 띄엄띄엄 자란 도라지와 달리 서로에게 기대고 있어서인지 훨씬 꼿꼿해 보였다. 고성에서 내가 가장 길게 머무른 숙소 마당 한쪽에 있던 도라지는 몇 포기 없어서 힘없이 축 쓰러져 있었다. 숙소 사장님인 명자 할머니가 일부러 몇 포기만 심으셨을 리는 없을 것 같아 여쭤보았다. “할머니, 여기 도라지는 왜 몇 포기 안 심으셨어요?” “씨를 많이 뿌렸는데 발아가 다 잘 안되었어. 새가 쪼아 먹은 거 같아.” “할머니, 그냥 새 밥 준 거 아니에요?” 할머니가 깔깔 웃으셨다. 사람 입장에선 농사에 실패한 것이지만, 새로서는 횡재가 아니었을까. 어쩐지 할머니 댁에 새가 유난히 많이 놀러 온다 싶었다.
도라지를 보며, 어떤 식물의 한 부분만 알고도 그 식물을 다 안다고 생각해왔음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무꽃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먹는 뿌리로만 알았지, 무가 꽃을 피운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먹는 부분’을 주로 생각하며 식물을 대했던 것 같다. 식물을 아는 것은 무엇일까? 이름이나 요리법을 알아도 어떤 잎이 나고 어떤 모양의 꽃을 피우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알고 있던 도라지와 무는 식물 전체라기보다 먹는 식물의 일부분에 가까웠다.

얼마 후 그 길을 다시 지났을 때, 도라지꽃은 모조리 시들해지고 있었다. 겨울을 준비하는 도라지가 내게 서늘한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처음에 꽃을 보고 예쁘다며 연신 사진을 찍었지만 시든 도라지는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애초에 꽃이 핀 도라지를 보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 평범한 풍경일 터다.
식물을 아는 것은 이름과 쓰임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이 피었을 때는 멀리서도 눈에 띄지만, 꽃이 지고 나니 도라지는 주변의 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곳에 도라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전처럼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다. 꽃이 없는 모습도 도라지의 한때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식탁에서 도라지를 만나면 예전처럼 뿌리만 떠올리지는 않을 것 같다. 별 모양의 하얀색·보라색 꽃, 서로 몸을 맞대고 서 있던 줄기들, 꿀을 먹으러 온 벌과 꽃이 진 뒤의 시든 모습까지 함께 떠오를 것이다. 도라지는 그대로인데 내가 아는 도라지의 모습은 조금 더 풍성해졌다.
백수혜 (‘공덕동 식물유치원’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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