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모르는 연무와 국경 앞에 멈춘 아세안[동남아시아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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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원인은 국경 너머에 있는데 피해는 오롯이 이웃 나라에 돌아간다는 점에서 동남아시아의 연무(haze)는 동북아시아의 황사 및 미세먼지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아세안은 2030년까지 연무 없는 깨끗한 아세안을 만들기 위해 산불감시와 예방조치 등이 포함된 '아세안 초국경 연무오염 협정'(AATHP)을 2002년 체결했다.
아세안은 2024년 '아세안 월경성 연무오염 통제 조정센터'(ACC THPC)를 출범시키고, 앞으로 실천할 계획을 단계별로 정리한 '제2차 아세안 연무 없는 로드맵 2023 2030'을 추진하며 동남아 지역 대기오염과 월경성 연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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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의 소비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동남아를 모릅니다.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남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서강대 동아연구소 필자들이 격주로 소개합니다.

국경을 모르는 연무
올해 8월 말레이시아 행정수도인 푸트라자야에 있는 총리 집무실 건물 프르다나 푸트라 청사가 짙은 연무에 잠겼다. 말레이시아 환경부가 밝힌 공기가 얼마나 나쁜지를 보여주는 지수인 대기오염지수(API)는 대기질을 바깥에서 활동하면 안 될 정도로 나쁘다는 뜻의 해로움(Unhealthy) 단계로 규정했다. 보르네오섬에 위치한 사라왁의 주도인 쿠칭은 일시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대기질이 나쁜 도시로 표시됐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와 칼리만탄(보르네오섬을 다르게 부르는 말)에서는 물기를 머금은 채 죽은 식물이 두껍게 쌓여 만들어진 땅인 '이탄지'(peatland)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남서풍 바람을 타고 말레이시아 반도뿐만이 아니라 싱가포르, 브루나이를 넘어 필리핀 중부까지 날아갔다. 싱가포르의 아세안전문기상센터(ASMC)는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칼리만탄 등에서 발생한 화재 발생 지점을 집계해 8월 하순 해당 지역 연무 경보를 가장 높은 단계인 3단계로 올렸다. 나아가 적도 부근 바닷물 온도가 평소보다 높아지는 현상인 엘니뇨와 평균보다 적은 비의 양 때문에 10월까지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남부 아세안 지역을 휩쓴 연무 현상은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매년 봄이면 서해를 넘어오는 황사와 미세먼지로 인해 하늘이 뿌옇게 흐려지고, 방역 수준의 마스크 없이는 외출이 꺼려지는 상황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은 국경 너머에 있는데 피해는 오롯이 이웃 나라에 돌아간다는 점에서 동남아시아의 연무(haze)는 동북아시아의 황사 및 미세먼지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두 문제는 그러나 오염물질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미세먼지는 무수한 공장, 발전소, 자동차, 가정 등 배출원 하나하나를 콕 집어내기가 쉽지 않다. 반면 연무는 팜유와 펄프 농장을 조성하기 위해 이탄지와 산림을 태우기 때문에 불이 시작된 곳과 시점을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미세먼지 문제보다 연무 문제가 해결하기 쉬워 보이면서도 오랜 기간 동안 여전히 큰 국가 간 문제가 되고 있다.
연무가 그리는 지도

연무 문제는 주로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두 국가 사이의 문제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사실 아세안 대부분의 나라가 함께 겪고 있는 문제다. 가장 많은 불이 나는 인도네시아가 물론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국가이다. 인도네시아의 서칼리만탄(보르네오섬)의 경우 9월 초 학교 수백 곳이 휴교에 들어가 약 20만명의 학생이 집에서 비대면 수업을 들어야 했으며, 폰티아낙 인근 공항은 가시거리가 100m에 불과해 비행기조차 이착륙하지 못하는 상황도 맞았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역 농민들을 소방 인력으로 동원하고 인공 강우 작전 등을 통해 산림과 토지 산불을 진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인도네시아 인접국의 피해도 상당했다. 말레이시아의 사라왁주에서만 100곳이 넘는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말레이시아 총리인 안와르 이브라힘은 8월 브루나이 국왕과 협의를 통해 이 문제를 아세안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자고 제안했다. 싱가포르는 요양시설과 유치원 등 취약계층 시설을 중심으로 마련해 둔 대응 계획을 가동했다. 상당한 거리에 있는 필리핀 역시 남서풍을 타고 날아온 연기로 수도 마닐라를 포함한 중부 지역 주민들에게 마스크 착용 권고가 내려졌다.
원인과 계절을 달리하긴 하지만 유사한 연무 사례가 태국에서도 나타난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의 경우 1~4월이 건기에 해당하는 데 이때 옥수수 경작지 소각과 미얀마와 라오스와 접한 국경 지역에서 숲에 불을 놓아 밭을 만드는 화전 농업이 이뤄지면서 매년 심각한 대기오염을 겪고 있다. 올해도 초미세먼지 수치를 나타내는 PM 2.5 농도가 기준치의 10배인 300마이크로그램을 넘어 3개 주에 재난 지역 선포가 이뤄진 바 있다.
이러한 남부와 북부에서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아세안은 각각 다른 장관급 협의체를 두고 있다. 문제는 각국의 대응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연무 주요 발원지인 인도네시아의 경우 자신들이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반면, 영향을 받는 국가들에서는 인도네시아가 이를 계절성 자연재해로 간주하고 사후 대응에만 집중해 피해 예방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 2015년 대규모 연무 사태가 발생했을 당시 인도네시아 고위 관계자가 이웃 나라의 항의에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고 발언했다가 결국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던 사례는 이 문제가 주권 문제를 둘러싼 국제문제라는 점을 잘 보여줬다. 이러한 점은 왜 연무 문제가 수십 년 동안 뚜렷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경에 갇힌 협정

오랜 시간 묵어온 문제인 만큼 갈등도 있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도 점진적으로 이뤄져 왔다. 아세안은 2030년까지 연무 없는 깨끗한 아세안을 만들기 위해 산불감시와 예방조치 등이 포함된 '아세안 초국경 연무오염 협정'(AATHP)을 2002년 체결했다. 대기오염을 다룬 국제협약 가운데 특정 지역이 주도해 만든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크지만, 정작 연무 문제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어 잊을만하면 되풀이되는 상황이다.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우선 연무의 주요 발화지인 인도네시아가 해당 협정에 가장 늦게 서명하여 2014년에야 협약 당사국이 되면서 국제법적 효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다음으로 협정 자체도 한계가 뚜렷했다. 구체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인 이행 의무나 다툼이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는 절차인 분쟁 해결 장치 없이, 서로 협력하자는 말뿐인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또한 소각 행위가 영세농의 생계형 화전과 연결되어 있어 이를 단속하는 것이 지역 주민 생존권을 약화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탄지의 경우 불이 쉽게 붙지만 잘 꺼지지 않는 특성이 있어 기후변화가 심화하고 있는 최근 구조적인 위험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무속에서 내딛는 걸음

이와 같은 상황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눈여겨볼 만한 새로운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아세안은 2024년 '아세안 월경성 연무오염 통제 조정센터'(ACC THPC)를 출범시키고, 앞으로 실천할 계획을 단계별로 정리한 '제2차 아세안 연무 없는 로드맵 2023 2030'을 추진하며 동남아 지역 대기오염과 월경성 연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각국은 사전 예방을 위한 다양한 노력에도 나서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이탄지 배수 금지와 복원 사업, 그리고 이탄지 보호를 위한 재정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는 기상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화재위험지수 시스템(SEA-FDRS, South East Asia Fire Danger Rating System)의 관측망을 확충해 산불 발생 가능성과 확산 속도를 예측하는 기후변화에 맞춰 미리 대비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에 나서고 있다.
메콩 소지역에서도 장관급 협의체를 기초로 태국, 라오스, 미얀마 접경의 소각 관리와 조기경보 공유를 논의하고 있다. 올해 10월 베트남에서 개최될 예정인 '제21차 아세안 월경성 연무오염 협정 당사국 총회'에서는 올해의 유례없는 연무 사태를 기초로 실제 도움이 될 만한 방안들이 논의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결국 동남아시아를 둘러싼 연무 문제는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만의 문제가 아니라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태국, 라오스, 미얀마가 얽히고설킨 지역 전체의 문제다. 그리고 이는 한국이 겪는 국경 간 대기오염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배출은 국경 안에서 이뤄지지만 영향은 국경을 넘어서 일어난다는 점, 가해국과 피해국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여러 협력 논의가 있지만 피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아세안의 연무 대응은 동북아 대기 오염 관련 협력에도 참고할 만한 지점들이 있다. 잿빛 하늘 아래에서 국경을 넘는 문제에는 국경을 넘는 책임과 힘을 합쳐 함께 하는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이 다시금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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