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 회고록] 김주열 주검에 시를 붙여 부산일보에 실었다, 김태홍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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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내가 부산고 시절에 문예반 멤버로 활동한 것으로 상정한다.
내가 재학할 당시 부산고에는 김태홍(金泰洪 1925~1985), 안장현(安章鉉 1928~2003), 두 문인 선생님이 재직하고 있었다. 1950년대 초 부산 시내 고등학교 교사 손동인, 안장현, 김태홍 세 사람이 시 동인회 시문(詩門)을 결성했다.
부산고 교사와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던 김태홍 시인은 1960년 4월 12일 자 부산일보에 감동적인 시를 기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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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상고 재직 때 신영복을 글 세상으로 이끌었다


부산고 문예반
많은 사람들은 내가 부산고 시절에 문예반 멤버로 활동한 것으로 상정한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 3학년 이래 장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열망을 접었다. 고교 시절 내내 글을 쓸 심리적 여유도, 어떤 동아리 활동도 도모할 의욕이 없었다. 1학년 때는 철저한 외톨이였고 2학년 중반 이후로는 관성이 붙은 외톨이 생활을 즐기며 읽는 것으로 만족할 뿐 감히 스스로 작품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산고는 문예반 전통이 강한 편이었다. 이들 '문청'들은 대부분 4년제 명문 대학에 진학했지만 작가를 필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나의 9년 선배 김춘복(1938∼)이다. 나의 동향 출신인 김춘복은 「계절풍」, 「운심이」 등 사회성과 토속성이 짙은 작품을 썼다. 그는 부산중학 시절에 학생잡지 「학원」에 기고하여 국어 선생으로 재직하던 작가 오영수의 지도 아래 문학 수업을 받는다. 부산고에 입학해서는 자신과 같은 '학원 등단생'들을 규합하여 동호인 잡지를 발행한다. 후일 검찰총장이 된 정구영 등이 동인 멤버들이다. 이들 문예반 OB들은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독서 동호회를 이어가면서 지성과 감성을 아우르는 독서 세대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나의 한 해 위 학년에 유난히도 문예반원이 많았다고 한다. 법대에도 넷이나 진학했다. (정영일, 박종우, 박구하, 강신철). 한 해 늦어 나와 함께 대학에 입학한 박구하는 시조 시인으로 필명을 날렸다. 그는 편경(扁磬), 생황(笙簧) 등 전통악기의 연주자로도 열의를 쏟았다. 생업에서 은퇴하여 본격적인 한류 문화 활동에 나서다 갑자기 타계하였다. 2009년 박구하의 1주기를 맞아 고교 동기생들이 유고 시집을 출간해 주었다. (《햇빛이 그리울수록: 박구하 유고시집》, 해와 달.)

김태홍과 안장현: 두 문인 선생님
내가 재학할 당시 부산고에는 김태홍(金泰洪 1925~1985), 안장현(安章鉉 1928~2003), 두 문인 선생님이 재직하고 있었다. 1950년대 초 부산 시내 고등학교 교사 손동인, 안장현, 김태홍 세 사람이 시 동인회 「시문(詩門)」을 결성했다. 손동인은 그 시절을 회고하는 글에서 "우리는 목소리를 같이하여 전쟁을 저주하고 인간 회복을 절규했다. 우리는 이때 부정(否定)의 미학을 배웠고 거부의 철학을 배웠다."라고 했다.
안장현, 김태홍, 두 국어 선생님은 국어로서의 한글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대조적 입장을 취하는 듯했다. 안 선생은 외솔 최현배의 열렬한 추종자로 한글전용주의자였다. 안선생은 수업 시간에 한글의 창조성과 우수성을 소리높여 외쳤고 자신의 시에는 한자가 한 자도 없다며 자랑했다.
반면 김태홍 선생은 국한문 혼용자로 한문을 즐겨 썼다. 부산고에 앞서 부산상고 재직 시절에 학생 신영복으로 하여금 백일장에 출전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부산고 교사와 부산일보 논설위원을 겸하고 있던 김태홍 시인은 1960년 4월 12일 자 부산일보에 감동적인 시를 기고한다. 4월 11일, 실종되었던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3월 15일 자유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시민의거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모습이었다. 부산일보는 그 시체 사진과 함께 김태홍의 시 〈마산은!〉을 크게 실었다. 부산일보로서는 사운을 건 보도였을 것이고 필자 김태홍도 신변의 위험을 각오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산은 / 고요한 합포만 나의 고향 마산은
썩은 담사리 비치는 달그림자에 서정을 달래는 전설의 호반은 아니다.
봄비에 눈물이 말없이 어둠 속에 괴면
눈동자에 탄환이 박힌 소년의 시체가/대낮에 표류하는 부두!
… …
정치는 응시하라. 세계는 / 이곳 소년의 표정을 읽어라
이방인이 아닌 소년의 못다 한 염원들을 생각해 보라고.
무수히 부딪쳐 밤을 새는 피 젖은 조류의 아우성 있다.
이듬해인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에 김태홍과 손동인은 해직, 구금된다. 손동인은 교원 노조 결성 운동을 주도했었다. 김태홍은 그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감방에서」라는 시를 발표한다. 그중 한 구절은 열혈 청년들의 가슴에 오래 남아 있다. "피 찍어 써 본다. 자유여!"
김태홍 선생은 내가 입학한 1963년에야 복직할 수 있었다. 그는 '살매'라는 특이한 한글 호를 썼다. "부리부리한 눈이 사나운 매 그대로야. 살아 있는 회초리, 교편(敎鞭)을 쥔 자로서는 더할 수 없는 호지." 측근 친구의 해설처럼 교직자로서 살아 있는 매(회초리)가 되고자 하는 다짐에서 택한 자호(自號)일 수도 있다.
선생은 수업 시간에 흑판에 한시 한 수를 적었다. 월북한 국어학자 이극로(1893~1978)의 작품이라고 했다.
無窮時空歷史空(무궁시공역사공) -
무한한 시간도 역사도 헛된 것
是非善惡皆自空(시비선악개자공) -
옳고 그름, 선과 악 모두가 헛된 것
人生徒勞空又空(인생도로공우공) -
인생의 모든 애씀도 헛된 것
超越達觀我亦空(초월달관아역공) -
이 모든 것을 초월 달관했다고 자처하는
나 역시 따지고 보면 허무 그 자체
'공(空)'을 운자로 삼아 '철저한 허무'를 노래한 수작이라는 코멘트도 붙였다. 월북 작가의 시를 공공연하게 언급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시절이었는데 더구나 내놓고 찬양하는 용기가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1973년에 그는 제5시집 《空(공)》을 낸다. 선생은 우리 학년보다 몇 년 후까지 이 시를 즐겨 가르치셨던 모양이다. 검사 출신인 듯한 한 부산고 졸업생이 블로그에 이 구절을 옮겼다. (https://blog.naver.com/tedcho01/80050493224 "선배 임채진 검찰총장의 장인이신 고(故) 살매 선생님이 수업 중에 써 주신 한시입니다." 임채진도 부산고 졸업생이다.)
안장현 선생의 수필집 《달에게 묻는다》(1962)가 부산고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창원시립 마산문학관에 안장현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제목은 〈낚시꾼〉이다.
"낚시꾼은 / 고기를 낚지 않는다. / 시간을 낚고 / 고독을 낚고 / 그리움을 낚는다."
2000년 김희보가 펴낸 《한국의 명시》에 안장현의 시가 실려 있다. 〈어느 정신병원에서〉라는 예사롭지 않은 제목과 시구들이다.
… …
끝내 함께 미칠 수 없는 마음이 부른 곳
그곳이 정신병원인가
미친놈이라고 욕하지 말라
누가 미친놈인가는 언젠가는 세월이 가름하리라
(중략)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아 돌아가지만
꽃은 살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것
말할 수 없는 분노와
가슴의 피가 뭉쳐 꽃핀 그곳
그러나 지금도 정신병원 친구들은
이웃과
사랑을 위해
잠들지 않고 밤을 앓는다.
나는 이 시를 실제로 정신병원에서 '조국과 사회'를 걱정하며 분노의 염을 키우는 내 동생을 생각하는 매개체로 삼곤 한다. (안석환 《어떤 인생》, 도서출판 밀양, 2022)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