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42만원 그녀의 선택은 '남자 고르기'... 양귀자 '모순'이 지금에 말해주는 것

조태성 2026. 9. 11. 14:0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참 신기한 소설이다. 이런 소설인데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2026년, 여전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그것도 상위권에 이름이 오르내린다.

동시에 소설의 반전 결말은, 반전이라기엔 어쩌면 이 때부터 충분히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모순'을 두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같다는 말이 나온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10분 정복']

참 신기한 소설이다. 처음 출간된 건 1998년이다. 그러니 '삐삐' '공중전화' 같은 단어가 수시로 등장한다. 집에 있는 동안 연락이 제대로 안닿을까봐 집전화를 집안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묘사도 있다. '카세트 테이프' 같은, 이젠 발음해본 지도 오래된 것 같은 단어들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멀티플렉스가 아닌 개봉관 시절이어서 극장이 모인 곳을 찾아가 줄을 서야 표를 구할 수 있던 풍경도 있다. 이런 소설인데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2026년, 여전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그것도 상위권에 이름이 오르내린다.

짐작하다시피 이 책은 양귀자의 '모순'이다. 지금은 작품 활동도 거의 없고 바깥 활동도 안하는 작가라 하지만, 그는 '원미동 사람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천년의 사랑' 등의 작품으로 각인된 1980~90년대 최고 인기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잡은 작가라는 평도 받았다.

'모순'은 그 흐름 아래 있던 1998년 출간됐고, 당시에도 그 즉시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이 정도야 책이 제법 읽히던, 특히 국내 작가들의 소설이 잘 읽히던 그 시절, 인기 작가에게 어울리는 얘기일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소설가 양귀자 집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교보문고가 집계한 주간 종합베스트셀러 자료를 보면 '모순'은 첫 출간 뒤 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달성하고 그 이후에도 10위권 안을 맴돌았다. 1년쯤 지난 1999년 하반기부터는 주간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다. 2013년 출판사를 바꿔서 재출간된 이후에도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간혹 100위권 너머에 얼굴을 내미는 정도였다. 크게 도드라지지 않더라도 은은하게 읽히는 스테디셀러 정도로 안착하는 모양새였다.

'69주간' 베스트10 ... 소설론 첫 기록

그러다 2023년 4월 즈음부터 주간 종합베스트셀러 50위권 안에 들기 시작하더니 2024년 들어서는 10위권 안에 진입했다. 2024년 12월 4주부터 2026년 4월 3주까지 1년 4개월 동안 줄곧 주간 종합베스트셀러 순위 10위 안에 머물렀다. 51주간 종합 1위를 기록한 자기계발서 '미움받을 용기'가 10위권 안에 있던 기간이 100주였는데, 이 책은 69주에 달한 것이다.

김현정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담당은 "무려 69주 연속 주간베스트셀러 10위권 안에 머문 기록은 소설로서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70주에서 이 기록은 멈췄지만 그 말 또한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기' 보다는 '연속이 끊겼을 뿐 지금도 10위권 언저리를 계속 드나들고 있다'에 가깝다. 한 때 100만부 이상 나갔던 소설이 세월이 흘러 다시 100쇄 이상 팔린 셈이다.

소설은 크게 복잡하지 않다. 주인공은 전 재산이 42만 8,000원이라고 말하는 25세 여성 안진진. 술만 들어가면 사람이 변하던 아버지는 기어코 행방불명자가 됐다. 생계를 떠맡은 엄마는 시장의 억척 장사꾼이다.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은 그저 조폭 보스 흉내내는데 여념이 없다. 이러니 애써 들어간 대학일랑 접어둔 안진진은 돈 버느라 바쁘다.

이런 안진진이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 결심한다. "내 인생에 내 온 생애를 다 걸겠다"라고. 삶의 무게에 치인 사람이 각성하는 어떤 순간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조금 당혹스럽게도 그래서 진행하는 작업은 '남자 고르기'다. 가난하지만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김장우냐, 부유하고 안정적이지만 재미없는 나영규냐 라는. 그것도 무슨 어장 관리하듯 두 남자를 분리해서 따로 만나는 방식으로 말이다.

소설가 양귀자의 장편소설 '모순'의 표지. 2쇄마다 표지 색상을 변경하는 이 작품은 100쇄 이상 팔렸다. 쓰다 제공

젊은 여성이 어느날 문득 비장하게 결심하고 선언한 인생이 결국 그런거냐, 싶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욕 좀 먹을 거 같다 생각했을까. 작가는 안진진의 입을 빌어 이렇게 항변한다. "이제 나는 더이상 나를 학대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특별하고 한적한 오솔길을 찾는 대신 많은 인생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택하기로 했다."

인생에는 제 각각의 길이 있는 법. 무슨 주의니 이념이니 해서 남의 인생에 대해 무책임하게 이러쿵저러쿵 재단할 일은 아니다. 동시에 소설의 반전 결말은, 반전이라기엔 어쩌면 이 때부터 충분히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제인 오스틴이란 평가도

그래서 '모순'을 두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같다는 말이 나온다. '오만과 편견'으로 각인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한꺼풀 벗겨놓고 보면 19세기 영국판 '나는 솔로'에 가깝다. 멋있지만 불안한 남자와 안정적이지만 재미없는 남자, 이상과 현실 사이의 끝없는 저울질.

물론 오스틴의 소설엔 작가의 지독한 '장난기'로 인한 비틀기, 유머, 위트, 반전 등이 숨어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내 짝 찾기'다. 이 때문에 실제 독서모임 등에서는 '모순'과 오스틴의 소설을 함께 읽는 일이 잦다.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키이라 나이틀리. 한국일보 자료사진

'모순'에 대한 엇갈린 반응도 여기서 나온다. 일부 독자들은 '요즘 세상에 삶의 막다른 길에 내몰린 25세 여성의 제 짝 찾기 이야기를 봐야 하는가'라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렇기에 이 소설이 한국 사회에서의 사랑, 결혼, 계급 재생산에 대한 일종의 리얼한 보고서 역할을 한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고보면 오스틴 소설이 '19세기 영국 젠트리 계급의 사회문화사'로 평가받는 지점과 겹친다.

차이점이라면 오스틴의 소설은 그래도 현실과 이상을 적당히 타협시킨다는 점이다. 등장 인물들이 제각각 적당한 깨달음을 얻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식으로 결론이 난다. 19세기 낭만적 소설의 전형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모순'은 끝을 그렇게 마무리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깨달음과 타협에 성공하는 게 아니라 한 방향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의 결과는 행복인지 불행인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남겨둔다. 그런 의미에서는 조금 더 현대적 소설이란 평가를 받는다.

안진진의 선택에는 엄마와 이모의 엇갈린 인생도 작용했다. 엄마와 이모는 외모, 말투, 행동 등 모든 게 다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 둘의 인생이 엇갈리는 건 중매에서다. 뭔가 특별한 중매였던 것도 아니다. 그 옛 시절 여자들 인생이 얼추 다 그러했듯, 중매 서려는 이가 처음 가져온 남자 사진은 '10초 언니'였던 엄마의, 그 다음에 가져온 남자 사진은 동생인 이모의 몫이 됐을 뿐이다. 10초라도 언니니까 언니가 먼저 하라고 이모가 양보한 결과물일 뿐이다.

연애 예능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연출한 남규홍 PD. 이 프로그램을 두고 수많은 얘기들이 오가지만, 엄청나게 인기 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SBS Plus, ENA 제공

단지 그랬을 뿐인데, 엄마의 남편은 술주정뱅이였고 이모의 남편은 성공한 건축가였다. 그로 인해 그 아이들 인생까지 달라지게 만들었다. 이건 또 한번의 반전을 낳는다. 그랬기에 엄마는 억척 생활력을 지닌 천하무적 여성으로 다시 태어난다.

※ 이 기사는 한국일보의 프리미엄 기사입니다. 더 자세한 기사 내용은 한국일보닷컴에서 로그인 후 무료로 보실 수 있습니다. 링크를 복사해 주소창에 붙여 넣으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90408590001381

조태성 선임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