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아닌 ‘순환 생태계’를 만든다… 의류 그 이상의 혁신
순환경제 플랫폼 ‘시스템 0’, ‘스페로 SV’ 재킷에 첫 적용
낡은 사진 한 장이 스크린에 떴다. 빛바랜 재킷을 입은 남자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캐나다 밴쿠버 노스쇼어 구조대의 1세대 대원들이다. 연단에 선 현직 대원이 사진 속 한 사람을 가리켰다. “제 아버지입니다. 1970년에 구조대에 들어오셨죠. 저 열악한 장비로 저 산을 다녔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북미에서 가장 출동이 잦다는 이 자원봉사 구조대는 헬기 아래 90m 로프에 매달려 숲의 나무 사이로 내려가고, 영상 5도에서 영하 30도로 순식간에 옮겨 다니며, 눈사태에 묻힌 사람을 30명이 달라붙어 실어 나른다.
노스쇼어 구조대 대원은 “후드의 반사 소재, 무전기 포켓, 하네스와 간섭하지 않도록 밑단에 넣은 작은 폼 조각 같은 사소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우리가 훨씬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일하게 해준다”고 했다. 이들이 얼마간 마치 또다른 ‘생명줄’처럼 ‘아무도 모르게’ 입고 ‘시험한’ 재킷이 있었다.

◇아웃도어계의 아스트라…‘시스템 0’로 생태계를 새롭게 설정하다
이른바 ‘명품 아웃도어’ 아크테릭스(Arc’teryx)가 새롭게 선보인 ‘스페로 SV(Sperro SV)’가 처음 공개된 캐나다 노스밴쿠버 본사 현장을 다녀왔다. 흔히들 이해를 돕기 위해 ‘아웃도어계 에르메스’ 같은 별칭이 붙는 브랜드지만, 현장에 다녀와보니 ‘아웃도어계 아스트라’라고 붙이는게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오픈AI의 차세대 AI 모델인 GPT-6 아스트라 수준으로 기존의 의류 제작 방식의 차원을 넘어 생태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현장이었다. 이 브랜드의 상징인 알파 SV, 베타 SV 옆에 나란히 설 또 하나의 최상급 하드쉘 제품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 재킷의 진짜 정체는 옷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아크테릭스가 30년 넘게 쌓아온 것을 한 벌에 응축해, 제품을 만드는 방식 자체를 바꾸겠다고 선언한 순환경제 플랫폼 ‘시스템 0(System 0)’의 첫 번째 결과물이다.
시스템 0는 소재 조달, 설계, 생산, 사용, 수선, 그리고 수명이 끝난 뒤의 재생까지 제품 생애 전체를 하나의 고리로 묶는 프레임워크다. 자원을 캐서 만들고 쓰고 버리는 ‘선형 경제’에서, 오늘 만든 제품이 내일의 원료가 되는 ‘순환 경제’로 사업 구조를 옮기겠다는 것이다. 스튜어트 하셀든 CEO는 신제픔 발표 현장에서 “장비가 매립지로 가지 않고 첫 번째 삶 이후에도 쓰임을 이어가는 미래”를 비전으로 제시했다.
전 세계에서 선별된 미디어를 대상으로 한 발표회에 나선 그는 이 발표를 “단순한 신제품 출시가 아니라 우리가 사업을 생각하고 구축하는 방식의 체계적 전환(systemic change)”이라고 규정했다. “이제는 제품이 우리 손을 떠난 뒤의 삶까지 만드는 것입니다.”
순환형 제품을 만들겠다면 대개의 브랜드들은 쉽게 적용할 수 있는 티셔츠 같은 제품을 내세운다. 아크테릭스는 반대로 갔다. 고급 콘셉트(Advanced Concepts) 부문을 이끄는 알렉산드라 플랜트 부사장은 현지 발표에서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워서 하드쉘을 골랐다”고 했다. 하드쉘은 이 브랜드의 가장 상징적인 제품군이자 기술적으로 가장 복잡한 물건이다. 5개년 로드맵에 따라 모든 제품군으로 확장될 것이라는 말은 업계 생태계를 새롭게 형성할 선언문처럼 들렸다.
4년간 아크테릭스 선수로 활동해 온 뉴질랜드 출신 프리라이더 크레이그 머레이는 캠페인 촬영에서 처음 입은 스페로 SV를 “지금까지 입어본 아크테릭스 재킷 중 단연 최고”라고 했다. 그는 알래스카 오지에서 바위와 덤불에 긁히며 몇 달을 이 재킷과 지냈다. “손때 묻은 옷을 고쳐 입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건 제가 자란 방식입니다. 덧댄(수리) 자국은 그 옷과 함께한 모험의 훈장이죠.”

◇인공 피지 실험과 ‘생명 연장’ 리버드 시스템… 의류 그 이상의 혁신
스페로 SV의 겉감과 안감은 이탈리아 아쿠아필(Aquafil)의 재생 나일론 ‘에코닐(ECONYL®)’로 짰다. 고어(GORE)는 이 재생 원사로 만든 겉감과 안감 사이에 ePE 멤브레인을 끼워 넣는 3중 라미네이트를 아크테릭스와 공동 개발했다. 의도적으로 첨가한 과불화화합물(PFAS)이 없는 고어텍스 프로 ePE 원단이 재생·재활용 가능 소재로 구현된 첫 사례다. 흥미로운 것은 자체 개발한 ‘인공 피지’ 테스트다. 피부 기름이 원단과 멤브레인 사이로 스며들어 수년 뒤 박리를 일으키는 현상을 앞당겨 재현하기 위해 합성 피지를 원단에 포화시킨 것이다.

여느 브랜드와의 또 다른 차별점은 재활용 방식이었다. 페트병을 녹여 폴리에스터를 뽑는 ‘열기계적 재활용’은 아이스크림을 녹였다 다시 얼리는 것과 같아서 품질이 떨어지고, 멤브레인과 접착제가 뒤섞인 테크니컬 원단은 아예 처리하지 못한다. 반면 화학적 재활용은 아이스크림을 우유와 설탕이라는 원재료로 되돌리는 일에 가깝다. 수명이 끝난 스페로 SV는 리버드를 통해 회수돼 리코(RECCO®) 반사판, 지퍼, 커프스 같은 부품을 떼어낸 뒤 나머지가 아쿠아필로 보내지고, 나일론 성분은 버진급 품질의 새 에코닐 원사로 돌아온다.
가슴 주머니 안쪽에는 레이저로 새긴 QR코드가 있다. 아크테릭스 최초의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이다. 소재 구성, 제조 공장, 개별 일련번호가 담겨 자동차 차대번호처럼 한 벌의 이력을 추적한다. 라벨로 달면 잘라버릴 수 있기에 원단 자체에 각인했다. 이 재킷은 스위스 시험기관 테스텍스(TESTEX®)의 순환성 인증을 받은 아크테릭스 첫 제품이기도 한데, 이 인증 기준 자체를 아크테릭스가 공동 개발했다.
◇“수리 데이터가 설계를 바꾼다”… 도미니스 샤워스 리버드 부사장
시스템 0을 이해하는 다른 반쪽은 리버드(ReBIRD™)다. 스페로 SV의 봉제선이 네 귀퉁이에서 만나지 않도록 피해 간 것, 자주 마모되는 부위가 보강된 것, 지퍼 슬라이더를 분리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이 반품 더미와 리버드 센터, 그리고 구조대의 피드백이 설계로 되돌아온 결과다. 리버드는 2021년 출범한 아크테릭스의 세탁·수선·보상판매·리세일 프로그램으로, 매장 안에 수선 장인이 상주하는 ‘리버드 서비스 센터’는 예약이 밀려 방문객을 제한할 정도로 인기다. 이 조직을 이끄는 도미니크 샤워스 부사장은 서면 인터뷰에서 순환 프로그램에 대한 투자를 “선택(if)이 아니라 필수(imperative)”라고 단언했다.

“수익성보다는 고객이 아크테릭스와 맺는 경험을 지탱하는 일에 가깝지만, 교체 대신 수리를 택하고 구매 후에도 계속 돌아오는 고객이 늘고 있습니다.”
리버드의 존재는 데이터를 통한 디자인 혁신으로 이어졌다. 수천 벌의 제품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망가지는지 센터가 안다. 샤워스는 “수리 데이터를 상류의 설계 과정으로 되돌려, 고장 나는 부품을 ‘설계에서 빼고(design out)’ 쉽게 고치는 방법을 ‘설계에 넣는다(design in)’”고 했다.
데이터는 혁신의 출발점이다. 전 세계 수리 요청 1위는 ‘찢어짐과 마모’라고 했다. “우리 제품은 겉감과 트림, 라미네이션이 첫 찢어짐 이후에도 오래 버티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마모는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래서 SV 인서트 패치 같은 새 패치 수리 솔루션에 투자했습니다.” 스페로 SV는 한 벌 안에 80가지가 넘는 수리 루틴이 설계돼 있고, 구매 후 3년간 보증 여부와 무관하게 무제한 수리를 제공한다.
“이 정도 성능에서 순환성을 구현하려면 소재, 제조, 인증, 폐기 솔루션, 수리 모두에 투자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오래 쓰도록 설계된 제품으로 가치가 옮겨가기 때문에 경제성은 성립합니다. 거래(transaction) 하나가 아니라 제품의 전체 수명을 놓고 보면 완전히 다른 방정식이 됩니다.” 보통 브랜드가 ‘지속가능성’을 내세우고 환경 문제를 부속 장식처럼 강조할때, 아크테릭스는 한발 더 앞섰다. 스페로 SV의 개발은 2022년 시작돼 출시까지 꼭 4년이 걸렸다.
미국 패스트컴퍼니는 이번 발표를 “지속가능성을 앞세웠던 스타트업들이 잇따라 무너진 시대에, 헤리티지 브랜드가 여전히 자본을 쏟아붓고 있다는 증거”로 읽었다. 리버드 보상판매를 통해 고객이 헌 옷을 반납하면 새 옷 구매 시 20~30% 크레딧을 받고, 회수된 제품은 수선돼 리세일되거나 곧바로 화학 재활용 흐름으로 들어간다. 기술적 탁월함으로 입증한 프리미엄 디자인의 가치와 환경적 책임은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었다. 아크테릭스가 현재와 미래를 위한 동반자로 우리에게 내 놓은 해법이자, 순환 생태계를 새롭게 정립할 출발점이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마통 금리 1년 반 만에 5%대…인터넷은행은 7% 육박
- 위험한 지시 100번 중 97번 시도…AI에 로봇을 맡겨도 될까
- [단독] 검찰, ‘라임 사태’ 김봉현 도피 도운 친누나 1심 무죄에 항소
- AI 열풍 되살아났다…나스닥 2.3% 뛰며 사상 최고
- 이복현 전 금감원장 “대출 풀면 부동산 폭발, 대출 고삐 자체는 타당해”
- 美언론, 출입금지에 취재 거부... 트럼프 연설 목소리 안 나왔다
- 챗GPT보다 75배 빠른데 비용은 170분의 1… ‘판단 전용’ AI 돌풍
- [단독] 韓 방산·건설사, 이라크에 5650억원 못 받았다
- 아는 사람만 안다는 ‘백악관 롤렉스’… “트럼프 시대 부와 권력의 상징”
- [함영준의 마음PT] 혼탁한 현실, 왜 26년 전 마하티르 총리가 떠올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