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효 여행작가의 남도투어 Happy-Bus-Day]<14> 장성 직행 시외버스 ‘광주→ 장성호 수변길행’ 마음 따뜻한 황룡이 숨어살던 전설에 현대 기술 덧입힌 두개 금빛 출렁다리 상쾌한 녹음 서늘한 물바람 동행하는 대한민국의 대표 ‘걷고 싶은길’ 인정
장성호 수변길에 자리한 총 길이 154m의‘황금빛 출렁다리’
광주종합버스터미널 승차장은 늘 각자의 목적지를 품은 사람들의 동선으로 빽빽하다. 오늘은 목적지가 명확한 시내버스 대신, 광주를 완전히 벗어나는 직행 시외버스에 몸을 싣는다. 운암동 정류소에서 마지막 승객을 태운 버스가 고속도로로 진입하면, 창밖으로 펼쳐지는 세계의 속도감이 완전히 달라진다. 정차와 출발을 반복하며 도시의 골목을 누비는 노선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곧고 빠르게 미끄러지는 시외버스의 궤적은 여행자에게 온전한 단절과 몰입의 시간을 허락한다. 좌석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스마트폰의 전원을 끄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복잡한 생각들은 버스의 후미를 따라 빠르게 휘발된다.
버스가 광주를 벗어나 장성 땅에 진입하고, 마침내 ‘장성댐’ 정류장에 도착해 문이 열린다. 하지만 차에서 내렸다고 해서 곧바로 찰랑이는 호수가 여행자를 반겨주지는 않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것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장성호는 약간의 끈기를 요구한다. 정류장에서 장성호 수변길 입구까지는 댐의 하단부를 지나 제법 다리품을 팔며 걸어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나 이 숨 가쁜 오르막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다. 이마에 땀이 살짝 맺히고 호흡이 턱끝까지 차오를 무렵, 제방의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압도적인 반전이 펼쳐진다. 눈앞으로 산자락에 고이 안긴 광활하고 푸른 수면이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장성호 관광지
본격적인 수변길은 숲의 가장자리와 호수의 수면 사이, 그 매혹적인 경계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누구나 편안하게 걸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조성된 나무 데크길 덕분에, 발끝에 전해지는 감각은 시종일관 부드럽다. 이 길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걷고 싶은 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다. 한쪽으로는 짙은 녹음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다른 한쪽으로는 수면을 스치고 불어오는 서늘한 물바람이 동행한다.
데크길
걷는다는 것은 가장 단순한 육체노동이자, 가장 깊은 정신적 사유의 과정이다. 호수를 오른쪽에 두고 데크길을 걷기 시작하면,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기분 좋은 마찰음이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낸다. 빽빽한 나무들이 터널을 이룬 숲속길은 따가운 초가을의 햇살을 적당히 걸러주고 시야가 트이는 곳마다 반짝이는 윤슬이 눈을 씻어준다. 높은 빌딩도, 경적 소리도 없는 완벽한 수평의 세계는 타 지역에서 찾아온 여행자들이나 디지털 환경에 지친 젊은 세대에게 더없이 훌륭한 시청각적 해방구다.
옐로우 출렁다리
고요한 걷기의 묘미에 정점을 찍어주는 것은 수변길이 품고 있는 두 개의 출렁다리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선명한 노란색의 ‘옐로우 출렁다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21m 높이의 웅장한 주탑 사이로 154m 길게 뻗은 이 다리 위를 걷는 일은 평탄했던 산책에 기분 좋은 스릴을 부여한다. 물 위 1.5m 높이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은 우리가 단단한 땅을 떠나 거대한 물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한다.
옐로우 출렁다리의 여운을 안고 데크길을 더 걷다 보면, 두 번째 명소인 ‘황금빛 출렁다리’가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중앙에 기둥이 없는 무주탑 방식으로 설계된 154m 길이의 이 다리는 수면과 불과 2~3미터 높이로 바짝 붙어 있어, 출렁거림의 폭이 훨씬 크고 수면 위를 직접 걷는 듯한 아찔함이 배가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다리와 장성을 상징하는 노란색 속에 오랜 지역의 서사가 숨 쉬고 있다는 점이다.
장성호가 자리한 곳은 과거 황룡강의 상류였다. 옛날 이 강물 아래에는 ‘가온’이라는 이름의 황룡이 숨어 살았는데, 낮에는 강물 속에 머물다 밤마다 사람으로 둔갑하여 남몰래 마을 사람들을 도왔다는 따뜻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출렁다리 양쪽을 지탱하는 주탑은 바로 이 황룡이 호수를 박차고 하늘로 승천하는 웅장한 형상을 띠고 있다. 현대의 토목 기술로 지어진 거대한 관광 구조물에, 지역 고유의 오랜 스토리텔링을 덧입혀 현재의 여행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옛이야기를 딛고 물 위를 건너는 걷기의 매력은 장성호가 아니면 맛보기 힘든 특별한 경험이다.
정지효 작가
계절이 바뀌는 길목, 뺨을 스치는 공기의 질감이 한결 산뜻해졌다면, 그것은 움직이라는 분명한 신호다. 가을은 참 걷기에 다정하고 관대한 계절이다. 우리의 두 발은 생각보다 걷는 것을 참 좋아하고, 장성의 푸른 물결은 언제나 기대한 것 이상의 다정한 위로를 건넨다. 시외버스에 올라 장성호에 닿는 순간, 눈부신 윤슬과 출렁이는 다리 위의 짜릿함이 우리의 새로운 계절을 가장 경쾌하게 열어줄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지금, 출발하기 가장 좋은 시간인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려고 물을 틀었는데, 손끝에 닿는 물의 온도가 어제와 확연히 달라졌다. 매미들이 맹렬하게 목청을 높이던 그 나뭇가지 위에, 어느새 투명하고 서늘한 가을 햇살이 슬며시 자리잡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달력 한 장 넘겼을 뿐인데, 세상의 온도가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어쩌면 계절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부는 바람의 방향으로 변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맘때면 늘 타던 노선, 늘 걷던 아스팔트 말고 조금 낯선 궤적을 그려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