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진 뒤 피운 모닥불, ‘인간의 언어’ 발전시켰을까

곽노필 기자 2026. 9. 10.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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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장 고유한 특성 가운데 하나인 언어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해묵은 숙제다.

연구를 주도한 세인트앤드루스대 캐서린 호바이터 교수(심리학 및 신경과학)는 "수십년간 다른 종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고, 언제 어디서 먹이를 구할지 계획하고, 도구 사용법을 익히고, 사냥을 조율하는 데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인간의 언어는 어떤 실용적 목적을 위해 진화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시기는 언어 생성과 발음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브로카 영역 등 언어와 관련한 뇌 영역이 진화한 시기(200만~150만년 전)와도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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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필의 미래창
희미한 불빛 아래서 ‘음성’이 소통 수단으로
스토리텔링식 정담이 복잡한 언어 발전시켜
해가 진 뒤 피운 모닥불이 인간의 언어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사진은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주호안시-산족 주민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왕립학회보B

인간의 가장 고유한 특성 가운데 하나인 언어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해묵은 숙제다. 그동안 도구 사용법을 가르치거나, 일상적인 협업, 외부 침입에 대한 경고 등 여러 실용적인 필요성이 언어를 발달시켰을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나왔다. 하지만 침팬지와 고릴라 등 다른 영장류는 말 없이 몸짓만으로도 생존에 필요한 다양한 과제를 너끈히 해낸다.

미국 세인트앤드루스대와 다트머스대 공동연구진이 인간이 정교한 언어를 개발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모닥불이었을 수 있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국제학술지 왕립학회보B에 발표했다. 해가 진 뒤 피운 모닥불이 사람을 끌어모으고 말문을 틔우게 했다는 것이다.

일찍이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1871)에서 불을 “언어를 제외하고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새 가설은 이전의 연구들과 모닥불 빛에 대한 측정 결과 등을 근거로 인류 진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불과 언어,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고 말한다.

연구진에 따르면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동부침팬지는 140가지, 산악고릴라는 120가지가 넘는 방대한 몸짓 체계를 가지고 있다. 또 하나의 동작은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도구 제작, 사냥 협동, 사회적 관계 유지 등 언어가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웬만한 기능들을 언어 없이 몸짓만으로 수행한다.

그런 소통 체계는 아직 인간에게도 남아 있다. 인간 유아들도 말을 배우기 전에는 영장류처럼 몸짓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성인들도 다른 사람의 몸짓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연구를 주도한 세인트앤드루스대 캐서린 호바이터 교수(심리학 및 신경과학)는 “수십년간 다른 종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배우고, 언제 어디서 먹이를 구할지 계획하고, 도구 사용법을 익히고, 사냥을 조율하는 데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인간의 언어는 어떤 실용적 목적을 위해 진화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인원들은 100가지가 넘는 몸짓 언어 체계로 일상에 필요한 소통 문제를 너끈히 해결한다. chimpsnw.org/

모닥불 깜빡임과 뇌의 델타파, 입술 리듬이 일치

그렇다면 인간이 언어를 발달시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연구진은 190만~180만년 전 인류가 불을 다루기 시작한 시점에 일어난 인간 생활의 변화상에 주목했다.

우선 불을 피우기 시작하면서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해가 진 뒤에도 서로 마주보면서 소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렵채집사회 연구의 권위자인 폴리 위스너 유타대 교수(인류학)의 2014년 연구에 따르면 불은 하루 활동 시간을 평균 4시간이나 늘렸다. 연구진은 “모닥불은 청색광을 거의 방출하지 않아 수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하루를 연장할 수 있게 해준다”고 밝혔다.

둘째로,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게 되면서 시각적 소통 환경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모닥불에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불빛에 가려진 사람은 몸짓을 세밀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목소리는 이런 장애물을 넘어 모두에게 닿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시각적인 몸짓 대신 청각적인 음성이 소통을 위한 대체수단으로 부상하게 됐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점은 모닥불 불꽃의 물리적 특성이다. 모닥불의 불빛은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연구진이 고속 카메라로 측정한 캠프파이어의 가장 강력한 불꽃 깜빡임은 1.4∼2.7Hz(초당 3회 미만)였다. 연구진은 “불꽃이 깜빡이는 속도는 주의와 기억을 관장하는 뇌파인 델타파(0.5~4Hz) 영역이자, 사람이 말을 할 때 입술과 입이 열리고 닫히는 리듬(2~7Hz)과 정확히 겹친다”고 밝혔다. 이는 불빛의 깜빡임이 서로간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연구진은 불빛 자체가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면, 불빛의 깜빡임은 말의 속도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모닥불 앞에선 딱딱한 일과 관련된 것보다는 자신의 무용담 같은 개인적 이야기를 주로 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것이 복잡한 언어 체계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인트앤드루스대 제공

불 사용 시점과 뇌 언어영역 발달 시기 일치

마지막으로 모닥불 앞에서 의사 소통하는 내용이 달라졌다. 수렵채집 사회를 연구해온 인류학자들은 일찍이 낮과 밤의 대화 내용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낮에는 땅이나 식량 문제 등 일과 관련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모닥불 앞에선 대화의 상당수가 신화나 무용담 같은 이야기하기(스토리텔링)로 바뀐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바로 이 모닥불 정담의 시간이 복잡한 언어 체계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봤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는 시기는 언어 생성과 발음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브로카 영역 등 언어와 관련한 뇌 영역이 진화한 시기(200만~150만년 전)와도 일치한다. 이는 불을 다루는 것과 인간의 언어 능력 발달이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진행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번 연구는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실험이 아닌 이론 논문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따라서 증명된 것은 없다. 연구진은 그러나 구체적인 측정을 통해 모닥불 이론을 검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구진은 앞으로 이야기를 할 때의 말하기 속도나 패턴이 일상 대화와 어떻게 다른지, 불빛 아래에서 몸짓을 읽는 능력은 얼마나 떨어지는지, 그리고 이야기꾼과 청중의 뇌파나 리듬이 어떻게 동기화되는지 등을 입증해 나갈 계획이다.

이번 연구는 모닥불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미화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 연구진은 하지만 “검증 가능한 예측을 신중하게 구성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면, 인간 언어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논문 정보

Firelight and the origins of spoken language Open Access.

https://doi.org/10.1098/rspb.2026.0602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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