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츠에 뺏긴 영혼, 산행기 쓰기로 되찾다 [등산일기 쓰기 클래스 수료 작품 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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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다망하고 다사다난한 일상 속에서도 기꺼이 지면을 펼쳐 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15초 만에 도파민이 쏟아져 나오는 바야흐로 초고속 디지털 시대입니다.
특히 현장에서 보고 느낀 감각을 메모로 포착하고, 같은 풍경 속에서도 나만의 주제와 시선을 잡아내는 법을 배운 게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여긴 물속일까? 숲속일까? 나무들이 실루엣만 남긴 채 뿌연 그림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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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다망하고 다사다난한 일상 속에서도 기꺼이 지면을 펼쳐 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15초 만에 도파민이 쏟아져 나오는 바야흐로 초고속 디지털 시대입니다. 너도나도 짧고 자극적인 영상에 시선을 빼앗기며 즉각적인 쾌락을 좇느라 바쁜 세상이지만, 여기 세상 물정 모르는(?) 우직한 이들이 모였습니다. 바로 온몸의 근육을 써서 땀 흘려 산을 오르고, 그 묵직한 여운을 활자로 꾹꾹 눌러 담은 '등산일기 쓰기 클래스(등일쓰)'의 수료생들입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오르막을 두 발로 견뎌내는 일, 그리고 하산 후 먼지를 털어내며 굳이 펜을 들어 그날의 바람과 발걸음을 복기하는 일. 이토록 비효율적이고 지독하게 아날로그적인 행위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인스턴트 감각이 범람할수록, 내 호흡으로 오른 산의 기억을 내 문장으로 벼려내는 '산행기 쓰기'의 가치는 더욱 웅숭깊어집니다. 땀방울이 마른 자리에 피어난 글이야말로 쉽게 휘발되지 않는 영혼의 진짜 보약이기 때문입니다.

'제1회 자꾸 읽고 싶은 등산 일기 쓰기 클래스'를 무사히 마치고,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산 이야기를 선보이는 손차민, 이가연 두 젊은이의 수료작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두 악인岳人은 4주간 토요일마다 시에라 아웃도어 북한산성점 2층에서 열린 클래스에 성실히 참여해, 산행기 쓰기 실력이 일취월장했습니다.
본보기로 삼고자, 1주차 때 쓴 산행기 일부와, 마지막 4주차에 쓴 수료 산행기를 소개합니다. 느리지만 단단하고, 투박하지만 진솔한 두 사람의 발자국과 문장을 독자 여러분께서도 여유로운 걸음으로 함께 거닐어 주시길 청합니다.
손차민 1주차 산행기
설악산을 겨울에 가본 적이 있는가.
추석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여름이 돼야 녹는다는 설악산의 진정한 즐거움은 겨울에 있다. 대청봉에 오르고자 호기롭게 소공원에서 출발했다. 목표는 대청봉 일출. 희운각대피소에서 비몽사몽 눈은 떴지만, 도저히 등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긴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일출은 물론, 해가 중천이다. 온 세상이 눈으로 폭 덮여 있었다. 공원공단 직원 분한테 물어보니 2m는 덮여 있다고 한다. 코끝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상쾌하다.
손차민 수료 산행기
왜 굳이 산에서 고생을 살까?
초년고생은 사서라도 한다니까, 그래서 샀다. 빗물 젖은 밥을. 장마철에 등산, 그것도 백패킹이다. 빗물 젖은 밥을 먹으러 가겠단 건 기세가 아닌 계획이다. 괴테는 말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자신이 가진 천상의 힘을 모른다'고. 산속에서 비 섞인 밥 정도는 먹어봐야 누리고 있던 안락함이 새삼 와닿는 법이다. 천상의 힘을 확인하러 산으로 간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안락하게 살아왔을까. 1박2일, 어떻게든 되겠지.
고생길도 기왕이면 긴 걸로 택했다. 영남알프스 환종주. 울산, 경주, 청도, 밀양, 양산까지 다섯 개 지역에 걸친 장거리 코스다. 마음이야 유럽 알프스지만, 연차 하루 쓰는데도 눈치가 필요한 K-직장인에겐 너무 멀다.

남들 가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배내고개에서 시작해 능동산~천황산~재약산~죽전마을~영축산~신불산~간월산에서 다시 배내고개로 원점회귀하기로. 허나 이 계획이 지켜질 리 없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다. 어차피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갈 테니까. 나는 삐딱한 청개구리라서 어제 스스로 세웠던 계획조차 따르기 싫어한다.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겁이 없다. 여자 혼자, 자차 없이, 백패킹도 두 번밖에 해보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걱정할 이유야 차고 넘친다. 근데 계획된 것들이다. 난이도가 쉬운 영남 알프스가 심심할까 봐. 재미를 직접 채워 넣었다. 아! 믿는 구석 없다더니 하나 있다.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짓을 해보겠나 하는 배짱.
이 좋은 산을 왜 굳이 빨리 내려간담. 대개는 하루 만에 환종주를 돈다지만, 알프스에 파묻히고 싶어 하루를 묵기로 했다. 빨리 완주하는 것이 훈장인 시대에 일부러 훈장을 마다한다. 어차피 일상이란 놈은 훈장 하나 안 주면서 등 떠미는 재주만 있으니까. 산속 깊숙이 달아나야 간신히 여유란 녀석이 찾아올 수 있다. 죽전마을에서 영축산을 오르기 전 신불산자연휴양림 야영장이 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여유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레고리 빨간 배낭. 보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쿵쾅, 부정맥이 유발된다. 파블로프의 개가 따로 없다. 8년째 산전수전 공중전을 함께해 온 사이다. 같이 비행기 탄 거리만 따져도 지구 한 바퀴는 훌쩍 넘겼을 오랜 전우. 백패킹을 염두에 두고 짐을 꾸리니, 든든한 전우도 배가 터진다고 아우성이다.
들머리인 배내고개 정상까지는 시내버스편이 있어 다행이다. 편한 세상이라 고생하기도 쉽지 않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동네 할머니가 말을 건넨다.
"오늘 비가 많이 온다는데…"
측은한 눈으로 한참 내 얼굴을 보던 할머니는, 다시금 생각이 스친 얼굴로 "젊을 땐 비도 맞아보는 게 좋다"고 읊조리셨다. "네! 그 고생 하려고 울주까지 왔습니다"라고 일부러 답하진 않았다. 할머니는 이미 알고 계신 눈치였으니.
산행 시작인데 배내고개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솥뚜껑이 얹혀 있다. 시꺼먼 구름 한 덩이가 산 전체를 꾹 눌러 덮고 있었다. 어쩐지 습하고 덥더라니, 삶아지는 중이었나보다. 밤새 뭘 그리 푹푹 고았는지, 솥뚜껑 바닥엔 김이 잔뜩 맺혀 있었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기세다. 출발 직전 두 손 모아 기도해 본다.
"굳이 고생하러 여기까지 왔지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생만 주셔야 합니다."
인생은 기세라지만 어찌 하늘을 이길 수 있을까.
아가미가 절실하다. 폐호흡밖에 못 하는 인간은, 이 습도를 헤쳐 나갈 재간이 없다. 땀구멍이란 땀구멍은 죄다 열렸다. 틀어막을 수도 없고. 달팽이처럼 지나온 길에 땀으로 발자국을 남긴다. 끈적한 것들이 송골송골 온몸을 덮는다. 헤드밴드 덕에 간신히 눈만 뜨고 걷는다. 이미 간밤에 한바탕 했는지 바닥이며 나무며 물이 흥건하다. "쉭." 바람이 지나가면, 하늘에서 내리는지 나무에서 내리는지 물이 떨어진다. 아닌가. 내 몸에서 내리는 건가. 그래도 습식 사우나라고 생각하니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하산 후 온천이 예정돼 있었는데 벌써 사우나를 즐기게 될 줄이야.
고생길에도 쉼은 있다. 땅도 하늘도 갑자기 넓어진다. 천황재다. 얼마나 높고 넓은지 천황天皇이란다. 천황의 곁에서 배낭 속 곳간을 풀어본다. 맛밤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는데 뒤이어 도착한 산객이 옆에 앉는다.
"영남알프스 환종주 중입니다. 얼마 전엔 지리산 종주에 설악산 종주까지 했네요."
즉 전국팔도 산을 섭렵 중이란 얘기다. 나 역시 지난달, 지지난달 연달아 지리산과 설악산을 다녀온 참이다. 이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분도 고생을 즐기는 고행자구나.
손가락 하나 딸깍하면 도파민이 흘러넘치는 시대인데. 이 편한 세상에 굳이 산에 올라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 등산으로 몸을 혹사해 본 사람은 안다. 고생 끝에 하산해 안락함이 밀려오는 순간, 온몸을 휘감는 낙樂. 옛말로 고진감래, 요즘 말로 도파민이다. 몸이 이미 그 낙에 절어버려서 간편한 쇼츠로는 해갈되지 않는다. 약도 없다. 겉보기엔 스스로 고행하는 수도자와 다를 바 없지만, 실상은 도파민 중독자다.

예상 적중. 발길 닿는 대로 갈 줄 알았다. 사자평, 이름이 좋잖아. 원래라면 재약산 수미봉에서 주암삼거리~향로산 갈림길을 거쳐 죽전마을로 가야 한다. 하지만 사자평이 자꾸 손짓한다. 못 이기는 척, 그늘 하나 없이 펼쳐진 사자평으로 향한다. 같이 온 사람도, 마주 오는 사람도 없다. 텅 비어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항상 무리보다는 혼자를 택한다. 굳이 따지자면 표범이다. 표범이 겁도 없이 사자의 땅에 발을 들인다. 다행히 7월이라 사자의 전성기는 아직이다. 여물지 못해 온통 초록 일색. 사자들이 자리를 비운 땅을 표범이 접수한다. 쓸쓸하기보단 자유롭다. 머릿속으로 슬쩍 가을을 당겨온다. 노랗게 넘실댈 억새 평원을 한 계절 먼저 걸어본다. 콧노래가 따라오길래 말동무 삼는다.
문제는 하산길. 몸이 편해지자마자 탈이 난다. 고생 중독자에게 금단 증세가 밀려온다. 걸음을 멈추고 '재약산 하산길 지루'를 검색해 본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지루하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고생 중독자에겐 평탄한 길도 시련이다. 시련 끝에 반가운 죽전마을에 당도했다.
산채비빔밥 한술 한술에 행복을 담아 삼킨다. 행복도 잠시. 밥그릇 비우자마자 다시 고생길 시작이다. 신불산자연휴양림 상단 야영장까진 좀 더 올라가야 한다. 어차피 휴양림 안인데 그쯤이야. 그런데 이게 웬걸. 점심에 삼겹살을 먹었어야 했다. 산채비빔밥의 열량으로는 파래소폭포까지 까마득하다. 거기에 하늘까지 순식간에 시꺼멓게 물든다. 텐트 칠 때 비바람이 불면 오늘 밤은 젖은 채로 지새워야 한다. 백패킹 초보에겐 변수 하나하나가 그대로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가 된다. 걸음을 재촉해도 발은 평소보다 더디다.
드디어 도착했다. 샤워장, 화장실, 식수대, 취사장, 분리수거장까지 풀옵션이다. 산에서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다. 문제는 아직 집을 안 지었다는 점. 서둘러 깨끗한 데크 위에 텐트를 친다. 근데 손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까만 하늘이 초보 백패커를 자꾸만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탓이다. 마침내 내 집 마련을 실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진다.
텐트 하나 쳤을 뿐인데 마음도 터를 잡았다. 바글바글 물을 끓여 따뜻한 차를 내린다. 후텁지근한 날씨에도 뜨거운 차는 마음을 녹인다. 차 한 모금에 하루 종일 조마조마했던 긴장이 탁 풀린다. 시끄럽던 마음이 잔잔해진다. 텐트 지퍼를 열어 컵을 전실에 내려놓자, 빗물이 컵에 들이친다. 차가 뜨거운 걸 어떻게 알고 물 온도를 맞춰 주나보다. 빗물 섞인 차에도 짜증이 나질 않는다. 행복회로가 다시 풀가동된다. 마음이 넉넉해진다.
비는 금세 멎었다. 좀이 쑤셔 야영장을 어슬렁거리는데 지름길을 찾아버렸다. 간월재로 가는 길. 본래 내일 일정은 '영축산~신불산~간월산'이다. 근데 여기서 곧장 '간월재'로 직행할 수 있다니. 산을 세 개나 타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하나로 줄어든다. 일부러 고생하러 왔건만, 고생길이 자꾸만 줄어든다.
"콰르릉 쾅쾅" 천둥인가 했더니, 내 배에서 나는 소리다. 저녁밥은 오트밀 토마토수프. 요리라 부르긴 부족하다. 소꿉장난엔 영 소질이 없어서 물만 부으면 완성인 걸 준비했다. 그래도 따스한 한 그릇에 빈약한 소꿉놀이도 제법 그럴싸해진다. 휴양림 상단엔 야영 사이트가 다섯. 이 중 넷이 찼는데도 놀랍도록 고요하다. 이유는 하나, 다들 혼자라서. 여기가 표범 서식지였나보다. 있는 듯 없는 듯,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표범들 사이의 불문율이다. 연결되기 싫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콰르릉 쾅쾅" 진짜가 시작됐다. 마른하늘에 천둥이 친다. 보금자리로 후다닥 피신하자마자 비가 텐트를 냅다 때린다. 우박인가. 텐트가 쾅쾅 울리는 게 돌덩이가 내리는 것 같다.
걱정이 무색하다.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으니. 민망하다, 살짝. 한평생 층간소음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산속이라고 다를까. 둔한 나를 깨우는 건 결국 아침 해의 몫이다. 흐린 날이라도 해가 뜨면 눈꺼풀도 떠진다. 데크가 축축해 레인스커트를 깔고 앉아 라면을 끓인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산에서 지켜야 할 도리다. 진땀 빼며 지었던 집인데, 접는 건 순식간이다. 텐트와 함께 미련까지 가방 속에 꾹꾹 눌러 담는다. 휴양림 상단에서 간월재까지는 3.3km. 마지막 관문이다. 비는 없는데 안개가 산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시야는 딱 한 치만큼만 허락된다. 눈이 못 미더우니, 대신 콧노래가 앞장선다.
벌써 간월재라니. 아쉬운 마음이 들 새도 없이, 해발 900m 고지의 참새 방앗간에 들른다. 간월재 휴게소엔 없는 게 없다. 시원한 물부터 컵라면, 아이스크림까지. 고진감래 아닌가. 고생했으니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려 했건만,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바람이 너무 거세 몸까지 휘청인다. '아이스크림은 무슨' 아직 단맛을 볼 때는 아닌가보다. 쓰디쓴 고생을 어서 끝내려 서둘러 하산길로 향한다. 날머리는 등억온천단지. 산 밑에는 달디단 낙이 있다. 낙이 온다는 표현은 너무 수동적이다. 내가 낙에게로 간다.
천국인가? 극락인가? 무릉도원?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온천의 모습으로 내 앞에 와 계신다. 의사선생님이 보면 뒷목을 잡겠지. 등산 후 사우나라니. 무릎엔 안 좋다고 들었지만, 알 게 뭐람.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뜨거운 온천수가 무릎 연골은 물론 뇌까지 흐물거리게 만든다. 습식 사우나 속을 1박 2일 걸었으니 노폐물은 진작에 다 빠졌다. 더는 몸에서 나올 땀도 없다. 이 정도면 새로 환생한 셈이다. 새 몸에 새 옷까지 걸치니, 배낭을 메도 몸이 날아갈 듯하다.
세상에 공짜 낙은 없다. 고생 값을 치러야 달디단 안락함을 맛볼 수 있다. 손가락 하나로 도파민을 얻는 시대에 굳이 비를 맞으며 산을 오른 이유. 이 맛 때문이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싶을 틈도 안 준다. 몸을 혹사하면 비워진다. 하루 종일 팽팽 돌아가던 머리에 일부러 브레이크를 건다. 근데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대신 푸른 능선, 높은 하늘, 상쾌한 바람이 들어찬다. 그쯤 되면 끈적한 땀도, 천근같은 다리도 그저 달콤하다.
고생 값어치만큼, 채워진다. 산이 가르쳐준 셈법이다. 젊을 땐 비도 맞아보라던 할머니에게 이 정도면 충분한지 묻고 싶다. 장마철에 영남알프스 종주, 모자랄까 봐 백패킹까지 더했다. 힘들었나. 나에게 묻는다. 글쎄, 오히려 즐거웠다. 이게 바로 등산 도파민. 한번 맛보면 끊어낼 도리가 없다. 누구든 중독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어떻게 끊어낸단 말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또 산으로, 고생을 사러 가는 수밖에.
등일쓰 클래스 소감
평소 직업상(인터넷 미디어 기자) 정형화된 글만 쓰다 보니, 제가 온전히 드러나는 글은 쓸 일이 없었어요. 블로그에 쓰는 산행 일기도 남에게 보여 주긴 민망한 메모 수준이었고요. 그런데 4주 동안 클래스를 들으며 처음으로 '내가 드러나는 글'을 썼어요.
그 과정에서 등산하는 제 자신을 새롭게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마지막엔 무려 4,000자나 되는 긴 글을 썼는데, 숙제라는 생각도 안 들 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말 재미있게 썼어요. 특히 현장에서 보고 느낀 감각을 메모로 포착하고, 같은 풍경 속에서도 나만의 주제와 시선을 잡아내는 법을 배운 게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10년, 20년 뒤에 다시 꺼내 봐도 그때의 산행과 제가 생생하게 떠오를 만한 멋진 기록이 생긴 것 같아 뿌듯합니다.

이가연 1주차 산행기
내가 좋아하는 산이라면 단연 서울의 인왕산이다.
산에 오르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던 내가 인왕산 등산을 시작으로 조금씩 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 작년 12월 서촌으로 데이트를 갔다. 새로 산 트레일 러닝화를 개시한 날이었다. 동행인이 "트레일러닝화도 신었는데 인왕산 한 번 올라가보는 건 어때?"라고 물었다. 여러 곳에서 인왕산이라는 이름을 많이 접했기에 한 번쯤 올라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코코넛 매트가 깔린 길을 따라 올라간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아스팔트길이 나온다. 인왕산 안내 표지판도 있다. 애써 올라왔는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것 같아 분한 마음이 든다. 표지판 왼쪽으로 난 계단으로 올라가면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이제야 자연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 든다.
이가연 수료 산행기
뱀의 머리로 시작한 18K 레이스
몽롱하다. 당장 누워서 다시 눈을 붙이자고 몸이 조른다. 밤새 쏟아지던 비는 그쳤다. 하늘은 울먹이는 아이 같다. 당장이라도 "펑"하고 눈물을 쏟아 부을 것만 같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 1분. "둠칫, 둠칫" 2000년대에나 유행했을 것 같은 전자음악이 귀를 때린다. MC들은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밝고 힘찬 목소리다. 주변 참가자들은 웃으며 사진 찍고 춤춘다. 나만 빼고 신났다. 모든 게 고깝다. 몸이 지쳐 있는 탓이다. 남은 시간 23초. 이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쿵쾅, 쿵쾅" 기대가 아닌 두려움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탕!" 출발! 결국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주 토요일 아침, 나는 전북의 장수 종합경기장에 서 있었다. 남자친구와 함께 신청한 장수 쿨밸리 레이스 18K의 시작이다. A조인 남자친구는 20분 전에 출발했고, C조인 나는 아직 출발을 기다린다. 한때는 오붓하고 다정한 동반 러닝을 기대했었다. 지금은 그런 기대를 버린 지 오래다.
일주일 넘게 나를 괴롭힌 감기몸살, 전날 21km 한양도성 순성으로 인한 몸의 피로, 3시간이라는 짧은 수면 시간. 몸이 정상이 아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하는 자조에 가까운 후회가 투명하게 내 몸을 감싼다. 집에 누워서 넷플릭스나 볼 걸… 그런데 한편으로는 '지금 몸 상태가 정말 안 좋은 건가? 아니면 뛰기 싫어서 핑계를 대고 있는 건가?' 알쏭달쏭하다.
후회하는 사이 시간이 됐다. 모든 사람이 "와아아"하는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간다. 침묵한 사람은 나뿐이다. "파파파팟!" 신발 밑창이 힘차게 아스팔트를 치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뒤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나를 추월한다. 마음이 급해진다. "휩쓸리지 말고 페이스 낮춰!" 누군가 일행에게 소리친다. 아랑곳하지 않고 무리해서 속도를 올렸다. 꿈속에서 달리듯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경치를 볼 여유는 없다. 쓰나미에 휩쓸리듯 인파에 엉켜 달렸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아스팔트길이 끝나고 좁은 산길 입구다. 산의 허락을 기다리듯 정체로 긴 줄이 생겼다. 좁은 산길에 들어서면 추월은 불가능에 가깝다. 긴 줄에서 조금이라도 앞자리를 잡으려고 아스팔트 위에서 악착같이 심장을 쥐어짰다. 몸은 멈췄지만 "쿵, 쿵, 쿵" 요란하게 울려대는 심장 소리는 멈출 줄 모른다.
산을 넘자 다시 나타난 임도. 누군가 진행요원에게 "몸이 안 좋다"며 포기 의사를 전한다. 관성적으로 다리를 움직여 숲으로 들어섰으나, 고민이 들었다. '나도 포기해야 하나? 다음 체크포인트까지만 가고 멈출까? 오늘 못 뛸 것 같은데…' 뛸 상태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생각의 물길이 확 틀어졌다. '어차피 못 뛸 거면 걸으면 되지. 걷더라도 컷오프 안엔 들어갈 것 같은데? 그래,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끝까지 가보자!'
"후드득" 순간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린다. 초록 숲이 검푸르게 변한다. 잠깐 멈췄다. 트레일러닝용 조끼 배낭 깊이 넣어 둔 레인 재킷을 꺼내 입고, 에너지 젤도 먹었다. 챙겨 간 수첩을 꺼내 지금의 느낌을 메모했다. 습한 공기 사이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얼굴을 스쳤다. 흐렸던 시야가 조금 또렷해졌다.
어두운 숲을 벗어나자 시야가 터지는 능선이다. 동촌리 고분군이 초록빛 잔디밭으로 빛난다. 산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 비가 그쳤다. 무덤 잔디가 형광빛 초록이다. 묵직하고 습한 공기를 가르며 거대한 고대 무덤 사이를 달렸다. 꽉 막혀 있던 숨통이 비로소 시원하게 트인다. '아! 살 것 같다.'
습하고 덥다. 재킷 안의 옷이 축축하다. 땀샘이 터졌다. 재킷을 벗어 배낭에 대충 넣었다. 소매 한쪽이 흘러나와 덜렁거렸다.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달리면서 옷을 집어넣으려 몇 번이나 낑낑거렸다. 그러다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뒤에서 달리던 아저씨가 다가와 "쑥"하고 옷을 넣어준다. "감사합니다!" 한마디로 소통은 끝났지만, 비슷한 페이스로 함께 달렸다. 아저씨는 은근히 힘이 되어 주었다. 첫 번째 체크포인트CP에 함께 도착했다.

시야를 가리던 참나무들이 순식간에 물러선다. 넓은 논개 활공장 능선이 펼쳐진다.
뒤를 돌아보니 능선 아래로 장수읍의 모습이 은은하게 아지랑이쳤다. 먹빛 구름과 산자락이 거칠게 얽혀 하늘과 땅의 경계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맑은 날의 상쾌함과는 또 다른 웅장한 풍경이었다. 이런 보상조차 없이 묵묵히 산을 오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 나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한 남자가 친구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린다. 나도 힘들다. 출발할 땐 피로와 수면 부족 때문이었다면 지금은 그냥 힘들다. 컨디션이 좋았어도, 잠을 푹 잤어도 힘들었을 거다.
CP에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CP를 떠나자 선수들 간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앞을 달리던 사람의 뒷모습도, 뒤에서 따라오던 거친 숨소리도 멀어져간다. 여긴 물속일까? 숲속일까? 나무들이 실루엣만 남긴 채 뿌연 그림자로 보인다. 몇 미터 앞의 산길 궤적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발 디딜 몇 걸음 앞만 보인다. 나만 보인다. 선명해지는 고독. 나에게 완벽히 몰입하는, 완벽한 고독이 시작된다. 즐거운 고독의 전제 조건은 수백 명의 사람이 함께 산길을 달린다는 은근한 안도감이다.
완만하고 부드러운 흙길을 달리다가, 밧줄을 잡고 축축한 바위를 오르기도 하고, 양옆으로 길게 자란 억센 풀을 헤치고 지나기도 했다.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는 동안 다시 가까워진 사람들과 함께 사두봉에 도착했다. 뱀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얼추 헤아려 보니 아주 후미는 아닐 듯싶었다. 마침 뱀 머리에 서 있으니, 여기서부터 온전한 뱀 한 마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정상석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지잉- 지잉-" 휴대폰이 울린다.
"자기야. 헉헉헉! 나 끝났어!"
나는 아직 10km도 못 갔는데, 그는 벌써 완주했단다. 지친 목소리에 많이 힘드냐 물으니 "아~ 힘들어 죽을 것 같아!"라는 답이 돌아온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 이번 대회 9등. 그런 그도 힘들어 죽겠단다. 아, 고통은 모두에게 평등하구나. 나 혼자만 유독 고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가지고 있던 짐 하나를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이 레이스를 단순한 고통으로 남길 것인가, 즐거운 추억으로 만들 것인가. 나의 선택이다.
왼쪽 손가락 끝이 살짝 저리고 떨린다. 에너지 젤 먹는 것을 잊고 있었다. 빠르게 하나 뜯어 삼켰다. 간식이 기다리고 있을 다음 CP를 간절히 기다리고 기다렸다. 드디어 나타난 두 번째 체크포인트.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수박과 시원한 오이가 놓여 있다.
"와~ 여기 수박 맛있어요!"
사람들은 물 만난 게처럼, 게걸스럽게 수박과 오이를 먹어 치운다. 그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구겨진 표정으로 건너편 바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오이와 수박은 냄새도 맡기 싫은 '오이 헤이터hater'다. 갈증과 허기가 극에 달했지만 저것만큼은 먹을 수 없다. 조끼 배낭 깊은 곳에서 꺼낸 '건망고'를 먹고 출발했다.
두 번째 CP를 떠나 휴양림으로 들어선다. 바닥에 빼곡하게 깔린 자갈이 발바닥에 그대로 느껴진다.
"화이팅! 조금만 더 가면 돼요!"
먼저 반환점을 돌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올라가는 사람들을 큰 소리로 응원한다. 응원에 힘입어 내 주변 사람들도 속도를 높였다. '산에선 힘도 못 쓰던 사람들이 여기선 날아다니는구먼…' 심술이 났다. 나는 산에서도 평지에서도 힘을 못 썼기 때문이다.
계곡 옆 데크길과 숲속 너덜길을 빠르게 달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계속 멈춰 섰다.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멋진 장면들을 마음에 담고, 사진에 담고, 메모장에 담았다. 계곡 한가운데 세워진 돌탑, 옛 사람이 경치 좋은 곳에 새긴 자기 이름, 여의주를 움켜쥔 용의 발처럼 바위를 감싸 안고 자란 나무뿌리, 바위에 부딪치는 구름 같은 흰 포말… 그 순간 나는 구름 위를 내달리는 신선이었다. 그러나 어정쩡한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는 지친 신선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반환점이 나올 것만 같은데 거리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반환점까지 가는 동안 징검다리를 3번 건넜다. 징검다리 옆에서는 스태프들이 바가지를 들고 지나가는 참가자들에게 시원한 계곡물을 퍼부어 줬다. 찬 계곡물을 맞으면 겨우 좋아진 몸 상태가 다시 악화될까 걱정됐다. 돌다리를 건널 때마다 가슴 앞에 크게 엑스자를 그리고 "감기! 감기! 감기!"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무자비한 스태프들 때문에 결국은 홀딱 젖고 말았다.
드디어 반환점. 반환점을 돌자 힘이 솟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날 너무 힘들게 만들었던 미묘한 오르막이 돌아갈 땐 달리기 편한 완만한 내리막이 됐다. "조금만 더 가면 반환점 나와요! 화이팅!"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주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까 올라올 때 만났던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너덜길의 바위도, 빼곡하게 깔려 있던 자갈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참지 않고, 호흡을 높게 틔워 올렸다.
피니시 라인까지 400m를 남겨두고 다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완주를 축하한다며 축포를 터트리듯 거센 빗줄기가 머리 위로 떨어진다. 땀과 빗물이 뒤섞여 얼굴과 몸을 타고 흘러내린다. 젖은 옷에 쓸려 겨드랑이가 따가워도 머릿속엔 즐겁다는 생각뿐이다.
완주까지 이제 100m.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른다. 지난 6월, 처음 참가한 트레일러닝 대회에서는 옆 주자 때문에 완주 사진을 제대로 찍히지 못했다. 그때의 아쉬움이 마음 한켠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꼭 제대로 된 피니시 사진을 남기겠어.' 빗줄기가 깨워준 마지막 에너지로 경쾌하게 달려간다. 피니시 라인을 지난다. 저기 나를 기다리는 남자친구와 그의 손에 들린 맥주가 보인다.
용두사미는 아니었다. 그건 확실하다. 시작은 너무 힘들고 초라했다. 하지만 마지막이 제법 근사했다. 그렇다고 사두용미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1,000명 중 400등. 어딜 봐도 용은 아니다. 그냥 뱀의 꼬리다. 하지만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세상엔 용이 아니어도 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그냥 나답게 끝까지 온전한 뱀 한 마리로 완주한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 차가운 맥주 한 캔도.
등일쓰 클래스 소감
등일쓰 첫 시간의 핵심은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써라'였어요. 그건 어떤 글인가? 입체적인 글, 묘사하는 글, 비유하는 글, 집중하는 글, 즉 생생한 글이었습니다. 등일쓰 수업 시간에는 그런 산행기를 읽어 보고, 학습하고, 적용해서 써 보는 연습을 했어요.
등일쓰 두 번째 시간, 원효봉을 오르는 동안 퉁퉁 기자님이 이끌어 주신 덕분에 오감을 모두 이용해서 산을 느낄 수 있었어요. 덕분에 눈으로 보는 멋진 풍경이나 살갗에 스치는 시원한 바람 외에도 그 날 맡았던 비누 향기, 그날 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그날 마셨던 식혜의 맛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산에서 메모도 많이 했어요. 내려와서는 수집한 글감을 주제에 맞게 골라 쓰는 연습을 했어요. 어릴 때 한 번쯤 배웠던 내용들인데, 이렇게 적용시키는 경험이 생경하면서도 즐거웠습니다. 특히 첫 시간에 쓴 글보다 훨씬 나아져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고 재밌는 글을 쓰려고 노력 중입니다. 산행에서도 단순히 정상에 올라서 느끼는 뿌듯함 외에도 많은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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