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거장은 ‘의심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독주 구간 연주 속도, 대화에 비유
춤곡은 ‘몸을 자유롭게’ 여유 강조
전조 부분, 사람의 옷에 빗대 설명
시선 맞추고 활 잡는 자세 고치며
익혀온 음악을 다르게 보는 수업
“콩쿠르 날보다 오늘 더 떨렸어요”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죠?”
그리스 출신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가 악보를 가리켰다. 예원학교 3학년 김민하양이 연주하고 있던 곡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끝난 뒤 독주 바이올린이 등장하고 첫 주제로 넘어가는 대목이었다. 김양은 독주가 처음 등장할 때는 다소 느리게 연주하다가 주제가 시작되자 속도를 조금 끌어올렸다. 카바코스는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악보에 적힌 것은 ‘Moderato assai’. 보통 빠르기를 강조한 지시어다. 카바코스는 김양에게 물었다. 왜 작곡가는 하필 이 지점에 이런 지시를 써놓았을까. 그 속도는 이 음악의 성격과 어떻게 이어질까. 그는 “이 부분을 연주할 때 서둘러선 안 된다”고 한 뒤 다시 물었다. “이 시작을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뭐라고 하겠어요? 우리가 말을 하는 건 생각을 전달하는 거잖아요. 연주도 마찬가지예요. 음악은 커뮤니케이션이거든요.” 김양은 수업을 마친 뒤 “그동안 익숙하게 받아들여온 ‘보통 빠르기’라는 말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면서 “나는 왜 이렇게 연주하는지, 내가 표현하려는 음악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리허설룸. 올해 이화경향음악콩쿠르 수상자들을 대상으로 한 마스터클래스(유명 연주자가 소수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공개 레슨) 현장이다. 이날은 바이올린 부문 입상자 4명이 카바코스 앞에 차례로 섰다. 공식적으로 예정된 수업 시간은 한 사람당 45분. 하지만 카바코스의 레슨은 한 학생당 거의 한 시간씩 이어졌다. 레슨을 기다리던 학생들은 “콩쿠르에 나갈 때보다 오늘이 훨씬 더 떨린다”고 했다.
베이지색 바지에 짙은 청색 티셔츠, 스니커스 차림으로 나타난 카바코스에게 리허설룸은 잠시 작은 무대가 됐다. 선율을 흥얼거리면서 두 팔을 지휘하듯 휘두르며 박자를 짚고, 리듬을 설명할 때는 춤을 추듯 온몸으로 표현했다. 학생들이 활을 잡은 손, 팔꿈치의 위치를 직접 고쳐주기도 했고 학생의 연주와 자신의 연주를 번갈아 들려주며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음악을 설명하는 내내 그의 몸은 끊임없이 음악을 따라 움직이며 학생들과 시선을 맞췄다. 처음에 굳어 있던 학생들도 그의 지시에 따라 연주하면서 차츰 표정이 풀렸다.
초등학교 6학년 목정우군이 사라사테의 ‘파우스트 환상곡’을 연주하고 나자 카바코스는 “이건 춤에 관한 음악이죠?” 하며 싱긋 웃었다.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다소 굳은 자세로 연주하던 목군에게는 활을 쥔 손목부터 부드럽게 돌리며 풀게 했다. “자, 작은 새를 잡고 있는 느낌으로 활을 쥐어볼까요” “연주하기 전에는 여유를 갖고 숨을 먼저 쉬어요”. 팔의 자연스러운 무게를 활에 실어보라는 주문도 이어졌다. 몸이 자유로워져야 소리 역시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레슨이 끝난 뒤 목군은 “음을 틀릴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힘이 들어가고 굳어 있는 게 고민이었는데 선생님이 바로 이 부분부터 지적하셨다”고 말했다.
비에니아프스키의 ‘오리지널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연주한 황아영양에게는 악보 속 여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음은 뭐라고 생각해요?” “어떤 목소리를 앞으로 가져오면 좋을까요?” 가장 높은 음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며, 화성과 여러 성부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음을 드러낼지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A단조에서 C장조로 넘어가는 부분에서는 조성을 사람에 빗댔다. “C장조가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났어요.” 같은 음이라도 어떤 화성과 조성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역할과 색깔이 달라진다는 뜻이었다.
이자이 소나타 6번을 연주한 서울예고 2학년 김동휘군에게는 ‘박자 안의 자유’를 주문했다. “박자에 끌려가서는 안 되지만 박자를 잃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자와 프레이즈(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문장)의 관계를 ‘시차’로 설명하기도 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 몸이 느끼는 시간이 다르듯, 박자는 일정하게 흐르더라도 프레이즈는 그 위에서 조금 앞서거나 뒤로 물러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네 학생에게 던진 질문과 지적한 포인트는 달랐지만 수업을 관통한 방향은 비슷했다. 왜 이 음을 강조하는지, 왜 이 속도로 가는지, 왜 이런 표현을 들려주고 싶은지를 물었다. 정답을 받는 시간이 아닌, 익혀온 음악을 의심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이날 수업을 지켜본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교수(한예종)는 “평소 레슨에서 학생들의 테크닉을 먼저 해결하다 보면 음악 자체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부족해지기 쉽다”면서 “카바코스는 학생마다 핵심을 정확히 짚으면서 음악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으로 연결할지를 계속 물었다”고 말했다. 이어 “평소 듣던 이야기라도 세계적인 아티스트에게 직접 들으면 학생들에게는 또 다른 자극이 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마스터클래스는 경향신문사와 롯데문화재단의 공동 주최로 이뤄졌다. 카바코스뿐 아니라 비올리스트 앙투안 타메스티, 첼리스트 문웅휘, 피아니스트 이진상이 이화경향음악콩쿠르 각 부문 수상자들을 일대일로 지도했다.
박경은 선임기자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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