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지 못한 신화를 다시 그려낸 ‘도날드닭’, ‘노빈손’ 시리즈의 만화가 이우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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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청소년 유해매체 신세였던 만화는 이제 K콘텐츠의 주역이 됐다.
그런 이우일이 최근 '이우일의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를 펴냈다.
지난달 18일 서울 대학로에서 세계일보와 만난 이우일은 "만화가라고 불리긴 하는데 제대로 된 만화를 그려본 지도 너무 오래됐고 맨날 일러스트레이션만 작업하고, 그러니까 자기 정체성이 흐려지는 느낌이었다"며 이번 작업을 시작한 배경을 설명했다.
이우일에게 그리스로마 신화는 처음 손댄 소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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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 하루 한두 쪽씩 4000여 컷… “이 정도면 나도 어디 가서 만화가”
“선을 거의 다 뺐어요” 이우일이 바꾼 것
한때 청소년 유해매체 신세였던 만화는 이제 K콘텐츠의 주역이 됐다. 그 도약에는 1990년대 등장한 신진 작가들의 공이 크다. 번뜩이는 상상력과 도발적인 펜으로 한국 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이들이다. 이우일은 그 변화를 이끈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출신으로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낸 만화동아리 ‘네모라미’에서 활동한 이우일은 1990년대 후반 온·오프라인 매체에 연재한 ‘도날드닭’과 ‘존나깨군’으로 발칙한 상상력을 펼쳤다. 정교한 데생보다 낙서처럼 자유로운 선과 우스꽝스러운 인체·표정이 눈길을 끌었다. ‘낙서체와 명랑체’를 오가면서도 한 컷 안에 이야기를 담았다. 개성적인 그림체와 세상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화제를 모았다.

그런 이우일이 최근 ‘이우일의 만화 그리스로마 신화’를 펴냈다. 3년 남짓 그린 4000여 컷을 모은 결과물이다. ‘신들의 우화’와 ‘헤라클레스’ ‘오뒷세우스’로 이어지는 세 권에 신과 인간의 얽힌 운명부터 영웅의 모험과 귀향까지 담았다.
지난달 18일 서울 대학로에서 세계일보와 만난 이우일은 “만화가라고 불리긴 하는데 제대로 된 만화를 그려본 지도 너무 오래됐고 맨날 일러스트레이션만 작업하고, 그러니까 자기 정체성이 흐려지는 느낌이었다”며 이번 작업을 시작한 배경을 설명했다.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세상 빛을 받는데 기여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선 “제가 한국 만화를 위해서 뭘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며 “출판만화는 끝까지 힘들었고 지금도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에게 신화는 매력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끝내지 못한 일이 됐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가, 작업하다가 실패한 적은 없거든요. 근데 이게 지금 거의 젊어서 30대에 잡았다가 실패해 가지고 40대에도 실패하고, 계속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서 다시 붙잡았다. 이우일은 “내가 엎지른 물이니까 내가 어느 정도는 결과물을 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래된 계약이 남아 있던 출판사에도 알리지 않고 먼저 그리기 시작했다. 하루 한두 페이지씩 주말도 없이 원고를 쌓았다. 파도를 타러 가는 날만 뺐다. 아내인 그림책 작가 선현경은 진행 과정을 출판사에 보여주며 상의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어느 정도 분량을 갖춘 뒤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쌓인 세 권 분량의 원고를 올해초 내밀자 편집자는 당황했다고 한다. 이번 작업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에 대해 그는 “많이 팔리고 많이 봐주고 그런 것보다도 ‘이 정도면 나도 어디 가서 만화가’라고 할 수 있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화는 원래 라인이 강하잖아요, 선이. 근데 선을 거의 다 뺐어요.”
그는 선을 덜어낸 것이 이전 그림과 다르게 느껴지는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자기 스타일을 바꾸는 일이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한 가지 스타일에만 머물러 있기에는 자신도 나이가 들었다면서도 “그게 뭐 대단한 스타일도 아니고요”라고 했다.
변화에는 도구의 영향도 컸다. 종이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선을 입힌 뒤 스캔해 포토샵으로 채색하던 작업은 이제 처음부터 태블릿 안에서 이뤄진다. 틀린 부분을 몇 번이고 고칠 수 있어 처음부터 선 하나를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도 줄었다. 도구가 달라지면서 생각하고 그리는 방식도 바뀐 것이다.
이번 책 앞에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문구도 넣었다. 그러나 AI에 반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AI를 싫어하고 반대하는 건 아닙니다.” 시리즈를 계속 그려 6권이나 7권, 10권에 이른다면 그 문구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때는 ‘AI의 도움을 받았습니다’라고 바뀌었을 수도 있죠.”

“정말 그때 너무 충격이 컸죠. 특히 포토샵 보면서 ‘와. 이제 우리가 손으로 노동하면서 그리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무조건 컴퓨터를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했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그쪽도 계속 발전했지만 손으로 그리고 하는 작업도 아직 많아요.”
이우일은 그림을 늦게 배워 처음에는 서툴렀던 동료들이 사고력과 노력으로 자기에게 맞는 분야를 찾고 컴퓨터를 활용하면서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생성형 AI 역시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 창작의 문을 열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하지 않은 일러스트레이터가 더 많아질 수 있습니다. 창조적인 다른 분야 사람들 힘으로 신세계가 열릴 것 같아요.”
AI 시대에 더욱 중요한 것은 결국 전달하려는 이야기와 생각이다. 도구와 작업 과정이 달라져도 작가의 개성과 정체성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삶에서도 그는 화려한 여행 경력과 수집벽 등 남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다. 특히 아내와의 긴 신혼여행부터 포틀랜드와 하와이 장기 체류까지 여행은 삶이자 책의 소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비행기 타는 것부터 싫어졌다고 했다. 지금은 연희동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좋다.

그런 그를 멀리 데려가는 것은 오로지 파도다. 하와이에서 빠져든 보디보드를 타러 양양과 제주도로 간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파도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온다고 저절로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파도는 계속 치는데 가만히 있으면 파도는 계속 넘어가요. 파도를 잡아야 하는 거죠.”
파도를 잡으려면 알맞은 지점에서 속도를 맞춰야 한다. 지금 자리에서 탈 수 있는 파도인지 알아보는 눈썰미와 파도가 오는 곳까지 움직일 체력도 필요하다. 운동신경만으로 해결되지 않고 시간을 들여 익혀야 하는 일이다.
파도를 타러 가는 날을 빼면 신화를 그린 3년은 규칙적인 생활의 반복이었다. 오전에 작업을 하고 점심 무렵 마치면 집안일이 기다렸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쯤 사흘씩 바다에 다녀왔다. 오래된 미완을 다시 붙잡은 시간이지만 그는 그 시간을 고행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근데 한 3년 동안 사실 너무 즐거웠어요. 스스로 이렇게 할 일을 정해서 갈 수 있는 것 자체가 되게 저한테 그게 행복한 것 같아요.”
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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