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아시아의 영성(Spiritual Asia)㉝ | 유대교 이야기 ②] 책을 품고 세계를 떠돈 사람들]
나라가 없어지면 민족은 어떻게 되는가. 땅을 빼앗기고 왕을 잃고 성전마저 무너진다면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가. 인류 역사에는 나라를 잃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수많은 민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상당수는 정복자의 언어와 문화 속으로 흡수됐다. 몇 세대가 지나면서 자신들의 언어와 신앙을 잃었고, 마침내 자신들이 누구였는지조차 잊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달랐다.
나라를 잃었다. 성전도 잃었다.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고 오랜 세월 박해와 추방을 반복해서 겪었다. 그럼에도 거의 2000년에 이르는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지나면서 자신의 종교와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살아남게 했을까.
그들의 손에는 칼보다 오래가는 것이 있었다. 책이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고, 묻고, 토론하고, 다시 자녀에게 가르치는 공부의 전통이 있었다.
유대교 이야기 1편에서 아브라함과 모세를 따라가 보았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났고 모세는 노예의 땅 이집트를 떠났다. 떠남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시작이었고 모세에게는 자유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긴 여정 끝에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일방적인 복종이 아니라 약속과 책임의 관계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 계약과 가르침의 중심에 토라(Torah)가 있다. 그리고 토라를 시대와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낼 것인가를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묻고 논쟁하고 해석하면서 축적한 거대한 지적 전통이 탈무드(Talmud)다.
유대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면 바로 여기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성전에서 책으로
서기 70년은 유대 역사에서 결정적인 해였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고, 티투스가 지휘한 군대는 유대인 신앙의 중심이던 제2성전을 파괴했다. 당시 성전은 단순한 종교 건축물이 아니었다. 제사장이 있었고 희생제사가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의 신앙과 공동체, 역사적 정체성을 떠받치는 중심이었다.
그 성전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은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유대교는 오랜 변화를 거치며 놀라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없다면 말씀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다면 기도와 공부와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며,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다면 가정과 회당을 신앙 공동체의 중심으로 삼았다.
돌로 세운 성전에서 말씀의 성전으로 중심축이 옮겨간 것이다.
건물은 파괴할 수 있다. 영토는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기억 속에 들어간 말씀과 머릿속에 축적된 지식은 쉽게 빼앗을 수 없다. 책 한 권만 있다면 어디서든 다시 읽을 수 있고, 책마저 없다면 기억하고 암송한 말씀을 자식에게 전할 수 있다. 그렇게 유대교는 더욱 강력한 공부와 기억의 종교로 발전해갔다.
◆토라,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토라는 흔히 ‘율법’으로 번역된다.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히브리어 토라에는 법뿐 아니라 가르침과 교훈,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안내한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좁은 의미에서는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의 모세오경을 가리킨다. 그러나 유대 전통에서 토라는 단순한 법전을 넘어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가르침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부모를 어떻게 공경하고 이웃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돈은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삼갈 것인가. 언제 일하고 언제 쉬어야 하는가. 인간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하는가.
삶 전체가 질문의 대상이었다.
종교와 생활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신앙은 특정한 날에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밥을 먹고, 장사하고, 아이를 키우고, 이웃과 계약하고, 노동하고 쉬는 일상의 구체적인 행동과 연결됐다. 그러므로 토라를 읽는다는 것은 종교 경전을 암송하는 데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를 배우는 일이었다.
◆탈무드, 질문을 멈추지 않은 문명
그러나 세상은 경전의 문장만으로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고 같은 말씀을 놓고도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유대인은 여기에서 독특한 길을 발전시켰다. 묻고, 토론하고, 반론하고, 다시 물었다. 그 오랜 해석과 논쟁의 거대한 축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탈무드다.
탈무드는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다. 여러 세대의 랍비와 학자들이 토라와 현실의 문제를 토론한 기록의 집대성이다. 기본적으로 미슈나(Mishnah)와 게마라(Gemara)를 중심으로 구성되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형성된 예루살렘 탈무드와 메소포타미아의 유대 공동체에서 발전한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전해진다. 특히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이후 랍비 유대교의 학문과 율법 전통에서 중심적 권위를 갖게 됐다.
탈무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결론만이 아니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다. 한 랍비가 주장하면 다른 랍비가 반박한다. 또 다른 사람은 성경 구절이나 전승을 근거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수백 년 전 사람의 주장과 후대 학자의 의견이 같은 지면에서 만난다. 한쪽이 이겼다고 다른 쪽의 생각을 모두 지우지도 않는다. 소수 의견과 반론도 기록으로 남긴다.
오늘의 소수 의견이 다른 시대와 다른 조건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탈무드적 사고의 중요한 특징이다. 정답을 외우는 데 그치지 않고 왜 그런가를 묻는다.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근거를 찾고, 스승에게 배우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유대교의 공부에는 함께 읽고 논쟁하며 배우는 전통이 발전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하브루타(ḥavruta)도 그러한 전통을 보여준다. 둘이 마주 앉아 경전을 읽으며 “왜 그런가”, “근거가 무엇인가”, “반대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다른 해석은 가능한가”를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질문은 불신이 아니다. 질문은 진리에 가까이 가는 방법이다.
◆안식일, 멈출 줄 아는 인간
유대교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가 안식일, 샤바트(Shabbat)다.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 이어지는 거룩한 휴식의 시간이다. 십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한다.
수천 년 전 만들어진 이 규범에는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인간학이 담겨 있다. 인간은 일해야 하지만 일만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아니다. 노동과 생산, 돈 버는 일을 멈추고 가족과 함께 식사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대화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돌아본다.
인간의 가치는 생산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노예는 마음대로 쉴 수 없다. 자유인은 멈출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이 공간적 해방이었다면 안식일은 시간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를 탈출했다고 노예성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다시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며 욕망과 노동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는 멈추면서 선언한다.
나는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다.
이 안식일의 철학은 AI 시대에 오히려 더 절실하다. 스마트폰은 잠들지 않고 SNS와 플랫폼은 24시간 인간의 관심을 요구한다. AI는 쉬지 않고 로봇도 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까지 24시간 일해야 하는가.
아니다.

◆가정이 최초의 학교였다
유대 교육의 출발점은 거대한 학교가 아니었다. 가정이었다. 부모는 자녀를 먹이고 입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말씀과 역사를 가르치는 첫 번째 교사가 됐다.
특히 유월절 식탁은 하나의 역사 교실이다. 아이는 묻는다. 왜 오늘 밤은 다른 밤과 다른가. 왜 누룩 없는 빵을 먹는가. 부모는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이집트에서 노예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를 단순한 과거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 조상이 노예였다’는 역사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그 기억을 현재의 삶으로 끌어온다.
우리가 노예였다.
그러므로 기억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신들도 이집트에서 나그네였으므로 나그네와 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당한 고통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같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 그것이 기억의 윤리다.
교육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역사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책임을 배우는 것이다.
◆책 한 권을 품고 국경을 넘다
유대인의 역사는 디아스포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바빌론 유수 이후 메소포타미아에 중요한 공동체가 형성됐고, 로마 시대와 그 이후에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 등 세계 여러 지역에 유대 공동체가 자리 잡았다.
사는 나라도 달랐다.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고 직업도 달랐다. 그러나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회당을 세우고 아이들에게 말씀과 글을 가르쳤다. 학자들은 토라를 연구하고 토론했으며 시대의 문제를 해석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는 오랜 학문적 축적을 통해 바빌로니아 탈무드라는 거대한 유산이 형성됐다.
나라가 없어도 공부할 수 있었다. 왕이 없어도 스승은 있을 수 있었다. 군대가 없어도 책은 읽을 수 있었다. 성전이 없어도 가정의 식탁에서 기도할 수 있었다.
이것이 유대 문명의 놀라운 생존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국가보다 오래가는 문화를 만든 것이다.
교육이 가장 오래가는 자본이었다.
여기서 유대인의 경제적·학문적 성취를 바라보는 시각도 신중해야 한다. 유대인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히 머리가 좋은 민족이라는 식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중요한 것은 오랜 세월 축적된 교육 문화와 제도, 그리고 디아스포라라는 역사적 환경이다.
경제사 연구에서는 제2성전 파괴 이후 랍비 유대교에서 토라 학습과 자녀 교육의 종교적 중요성이 커지고 문해력이 확산된 것이 장기적으로 도시의 상업과 전문 직종 진출 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주목한다. 물론 유대인의 경제사를 교육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박해와 직업 제한, 강제이주, 지역마다 다른 정치·경제 환경 역시 함께 보아야 한다.
그러나 유대 공동체가 오랫동안 교육과 문해력을 중시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집은 빼앗길 수 있다. 토지는 몰수될 수 있고 재산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머릿속에 들어간 지식과 사고하는 능력은 쉽게 빼앗기지 않는다.
그래서 교육은 출세의 수단이기 이전에 생존의 자산이 됐다.
◆랍비, 답보다 질문을 가르치는 스승
유대교에서 랍비(Rabbi)는 중요한 존재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제와 정확히 같은 개념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토라와 율법 전통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스승이다.
공동체의 중심에 권력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 해석자가 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훌륭한 학생 역시 스승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고, 듣고, 다시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랍비 전통의 지혜서인 『피르케이 아보트』에는 이런 유명한 물음이 나온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은 말할 수 있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들을 줄 안다. 그리고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묻는다.
지식에 대한 겸손이다.
◆정답보다 질문이 중요한 시대
한국 교육도 여기에서 돌아볼 것이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정답을 빨리 찾는 사람을 우등생이라고 불렀다. 시험에는 정답이 있었고 교사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며 학생은 배우고 외웠다. 이 교육 방식은 산업화 시대의 압축 성장 과정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생성형 AI 시대는 다르다. 정답을 찾는 속도에서 인간은 이미 기계를 이기기 어렵다. 검색과 요약, 번역과 계산은 AI가 빠르다. 앞으로 그 격차는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인간 교육의 중심도 달라져야 한다. 무엇을 아느냐 못지않게 무엇을 묻느냐가 중요하고, 답을 찾는 능력 못지않게 그 답을 의심하고 검증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정보의 양보다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는 힘이 중요하다.
유대인의 오랜 질문 문화가 21세기 AI 시대에 뜻밖의 현대성을 갖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AI에게 질문하기 전에 인간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왜인가. 무엇을 위해서인가. 누구를 위해서인가.
말씀은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유대교를 ‘공부를 잘하는 종교’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삶의 변화에 있기 때문이다.
토라를 백 번 읽어도 이웃에게 불의를 행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탈무드를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가난한 사람과 약자를 외면한다면 무엇을 위한 공부인가.
유대교의 미츠바(Mitzvah)는 하나님의 계명을 뜻하며 삶 속에서 행해야 할 의무와 실천으로 이어진다. 배움은 행동이 되어야 하고 신앙은 식탁과 시장, 가족과 이웃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유대교의 영성은 하늘만 바라보는 영성이 아니다. 밥과 일, 가족과 돈, 휴식과 교육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 속으로 들어온다.
종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도 어쩌면 여기에 있다. 말씀은 많은데 삶이 없는 것, 경전은 읽는데 정의가 없는 것, 기도는 하는데 이웃이 없는 것, 신을 말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종교마저 우상이 될 수 있다.
◆다석 유영모의 ‘하나’와 유대교의 말씀
여기에서 다시 다석 유영모를 생각한다. 다석은 성경을 읽었고 불경을 읽었으며 논어와 맹자, 노자와 장자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그의 공부는 지식을 많이 쌓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하나’를 찾아가는 공부였다.
다석이 말한 하나는 단순한 숫자 1이 아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인간이 돌아가야 할 궁극의 자리다. 사람은 하나에서 왔고 하나를 찾아 살아가며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참된 공부는 밖으로 많은 것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안으로 자신을 깨우는 일이어야 한다.
그가 말한 ‘얼나’도 그 길 위에 있다. 몸의 나, 욕망의 나, 소유의 나를 넘어 참된 나를 찾는 것이다.
유대교의 토라 공부와 다석의 사상은 역사적 배경도, 종교적 체계도 다르다. 이를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을 변화시키는 공부라는 점에서는 의미 있는 울림을 주고받는다.
공부는 인간을 바꾸어야 한다.
책을 읽었는데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공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식이 많아졌는데 더 교만해졌다면 잘못된 공부이고, 신을 더 많이 말하면서 다른 인간을 더 미워하게 됐다면 잘못된 신앙이다.
참된 앎은 사람을 낮추고 넓힌다. 그리고 자유롭게 한다.
◆AI 시대, 다시 인간을 묻다
이제 인류는 또 하나의 문명사적 문턱에 서 있다. 생성형 AI를 넘어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나아가 ASI(Artificial Superintelligence)의 가능성까지 논의하는 시대다. 인간보다 더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더 빠르게 계산하며 일부 영역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현실의 문제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계보다 더 많이 외우고 더 빨리 계산하는 것으로 경쟁할 수는 없다. 앞으로 중요한 인간은 기계와 경쟁하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게 제대로 질문하고 기계의 답을 다시 검증할 수 있는 인간일 것이다.
이 AI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실을 말하는가, 거짓을 증폭시키는가. 인간의 자유를 넓히는가, 인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가. 부를 널리 나누는가, 소수에게 집중시키는가. 전쟁을 막는가, 더 강력한 무기가 되는가.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돕는가, 아니면 지구를 더욱 소모하는가.
이 질문을 멈추는 순간 인간은 AI의 주인이 아니라 종속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영성(Spirituality)이다. 인간 중심의 AI, HAI(Human-centered AI)를 넘어 인간의 존엄과 생명, 문화와 자연, 나아가 인간을 넘어선 존재의 의미까지 생각하는 Spirituality-centered AI, SAI의 문제를 이제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기술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목적이며 지능보다 중요한 것은 지혜다.
◆책을 빼앗겨도 질문은 남는다
유대인의 수천 년 역사를 아름다운 성공담으로만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박해와 차별, 추방과 학살의 참혹한 시간이 있었고 유대 공동체 내부에도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유대인과 이스라엘 국가, 유대교와 현대 이스라엘의 정치적 선택을 구분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새로운 문제들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이 오랜 문명이 인류에게 남긴 메시지 하나는 분명하다.
배워라. 물어라. 기억하라. 쉬어라. 그리고 배운 것을 삶으로 살아라.
성전은 무너질 수 있다. 나라는 사라질 수 있고 재산은 빼앗길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하는 인간까지 빼앗기는 것은 아니다. 책을 빼앗겨도 기억 속의 말씀은 남고, 마지막 책마저 사라진다 해도 인간에게는 질문이 남는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자유인가.
아브라함은 떠났다. 모세는 노예들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책을 품고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다. 땅을 잃었을 때 말씀을 붙들었고, 성전을 잃었을 때 가정과 회당을 지켰으며, 제사의 중심이 사라진 뒤에도 기도하고 공부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쳤고 자식은 다시 그 자식에게 전했다.
그렇게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만들었다.
2000년 가까운 디아스포라를 견디게 한 힘은 거대한 군대나 막대한 재산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 질문하는 사람, 배우는 사람, 그리고 배운 것을 다음 세대에 다시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다.
유대교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두 번째 질문도 결국 여기에 닿는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돈인가. 집인가. 권력인가. 아니면 세상이 모두 바뀌어도 쉽게 빼앗기지 않는 것인가.
생각하는 힘과 질문하는 용기, 진리를 찾는 마음과 정의를 행하는 책임, 그리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오래가는 유산인지 모른다.
진리는 묻는 데서 시작한다. 정의는 배운 것을 삶으로 옮기는 데서 시작한다. 자유는 멈추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
그리고 영성은 그 모든 것을 하나로 잇는다.
하나에서 와서, 하나를 찾으며,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길.
유대인의 오래된 공부와 질문의 전통은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AI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그리고 배운 대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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