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취재] 서울에 모인 동시대 미술, 프리즈 서울 2026

강주희 기자 2026. 9. 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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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과 신진 작가, 새로운 섹션과 달라진 풍경까지. 올해 프리즈를 채운 주요 장면을 돌아봤다.

[우먼센스] 프리즈의 뜨거운 열기에 곧장 뛰어들기 전, 가볍게 예열부터 해보기로 했다. 프리즈 주간 동안 을지로, 한남, 청담, 삼청에서는 갤러리들이 늦은 밤까지 문을 열고 전시와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네이버후드 나잇'이 이어진다.

사진=강주희

그중 청담 나잇을 골라, 일 년에 단 하루 늦은 밤까지 문을 여는 갤러리를 찾아 아트 나잇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송은에서는 역대 송은미술대상전 참여 작가들의 그룹전을 위해 작품을 바닥에 펼쳐놓은 독특한 전시가 한창이었다. 이어 찾은 화이트 큐브는 마리나 라인간츠 개인전을 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작품 대다수가 이미 판매됐다는 소식에 한 번 더 놀랐다. 

사진= 강주희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청담동 거리를 바삐 오가는 사이, 가을밤에 찾아가는 심야 갤러리라는 풍경 자체가 제법 근사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그림 앞에서 술 한 잔까지 곁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Taro Nasu

사람들 사이에서는 종종 "동전 찾았어?"라는 질문이 오갔다. 영국 작가 라이언 갠더가 서울 곳곳에 숨겨둔 동전 1만 6천 개 때문이었다.〈The Find Seoul>라는 이름의 이 참여형 프로젝트를 위해 갠더는 을지로와 한남, 청담, 삼청, 코엑스 곳곳에 직접 디자인한 동전을 숨겨두었다.

발견한 사람이 가져가도 되고,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도 되는 작은 작품이다. 덕분에 갤러리를 나온 뒤에도 관람이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골목과 바닥을 한 번 더 살피며 다음 작품을 찾아다녔다.

Frieze Seoul 2026, Image by WeCap Studio, Courtesy of Frieze

그렇게 예열을 마친 뒤 이튿날 본무대인 코엑스로 향했다.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은 프리즈 서울에는 30개 국가 및 지역에서 130개 이상의 갤러리가 참여했다. 나흘 동안 행사장을 찾은 관람객만 7만 명 이상. 54개 국가 및 지역에서 관람객이 서울을 찾았고, 세계 각국의 컬렉터와 미술계 관계자들도 대거 모였다. 매년 9월이면 세계 미술계의 시선이 서울로 향한다는 말이 더 이상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규모다.

Frieze Seoul 2026. Image by WeCap Studio (1). Courtesy of Frieze

프리즈에서 가장 뜨거웠던 이름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갤러리가 참여한 만큼 무작정 돌아다니다가는 하루가 모자랄 것 같았다. 그래서 프리즈에 가기 전부터 꼭 봐야 할 작품과 부스 위치를 미리 점찍어뒀다. 입장하자마자 지도를 펼쳐 들고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글래드스톤'. 개막 첫날부터 유독 인파가 몰린 필립 파레노의 <Iceman in Reality Park>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진= 강주희

얼음으로 만든 사람 형상의 조각이 전시장 한가운데 서서 실제로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형태가 달라지는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연신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시장에 들어왔을 때와 나갈 때 작품의 모습이 이미 조금 달라져 있다는 점에서 사진 한 장으로는 좀처럼 붙잡히지 않는 작품이었다.

Lehmann Maupin

그런데 어디를 가도 유독 자주 들리고, 사람들이 몰리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집과 공간, 기억을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탐구해온 서도호다. 리만머핀과 STPI 두 곳이 나란히 서도호의 솔로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고, 부스 앞에는 인증사진을 찍고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사진= 강주희

같은 작가를 소개하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리만머핀에서는 천으로 만든 건축적 오브제와 문고리처럼 집을 이루는 일상적인 요소를 선보였다. 싱가포르 미술기관 STPI에서는 올해 레지던시에서 완성한 대형 신작 <Breathing Home>과 <Haunting Home>, 새로운 연작 <Spectators>를 이번 프리즈에서 처음 공개했다.

특히 대형 실 드로잉은 멀리서 보면 섬세한 선으로 그린 건축 드로잉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그 선 하나하나가 종이에 삽입된 실이라는 사실이 경탄이 절로 나온다. 천으로 집과 건축물을 재현한 리만머핀의 작품과 STPI의 실 드로잉은 재료와 형태는 다르지만 집과 기억, 이동과 정체성이라는 서도호의 오랜 화두를 공유한다. 때마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도 대규모 개인전이 열리고 있어, 프리즈 안팎에서 그의 이름은 단연 눈에 띄었다. 

Yagwang

한편 올해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는 김태리와 전인으로 구성된 시각예술 듀오 야광(Yagwang)한테 돌아갔다. 이들은 페어 부스의 가벽을 해체해 나무 골조로 다시 세우고, 한국 불화의 도상을 라텍스와 금속으로 풀어낸 장소 특정적 신작 <Facade Zone>에서 직접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얼마인가요?

프리즈를 걷다 보면 작품만큼이나 자주 귀에 걸리는 말이 있다. "그래서, 얼마래?" 몇만 달러라는 숫자가 들려오면 슬며시 귀가 열린다. 머릿속으로 환율을 헤아리는 몇 초 사이, 감상의 대상이던 작품에 어느새 구체적인 가격이 붙는다.

사진=강주희

실제로 올해 프리즈에서는 수십억 원대 거장의 작품부터 비교적 접근 가능한 가격대의 작품까지 폭넓게 거래됐다. 국제갤러리는 유영국의 1971년 회화를 22억~25억 원에 판매하며 프리즈 서울에서 거래된 한국 작가 작품 중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

사진=강주희

반대편에서는 단돈 70달러짜리 작품도 팔렸다. 젊은 갤러리를 소개하는 '포커스(Focus)'에서 휘슬이 선보인 dpgp78의 스펀지 블록 회화다. 70달러부터 25억 원까지. 그 거대한 진폭 사이에 미술 컬렉팅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언젠가 나만을 위한 그림 한 점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레이더를 세우고 작가와 작품, 가격까지 기민하게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열기 때문이었을까. 전시장에는 에어컨이 세차게 돌아가고 있었는데도 이상하게 덥게 느껴졌다.

Mennour

그중에서도 한국 거장들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갤러리현대는 김창열의 물방울 회화와 한국 실험미술을 이끌어온 이승택의 작품을 한 부스에 배치해 두 작가의 서로 다른 작업 세계를 함께 보여줬다. 실제로 김창열 작품이 최고 110만 달러에 판매됐고, 국제갤러리에서는 유영국을 비롯해 하종현, 박서보, 김윤신의 작품도 새 주인을 찾았다. 

Johyun Gallery

조현화랑에서는 온통 검은빛으로 채워진 이배의 솔로 프레젠테이션이 시선을 붙잡았다. 숯이라는 익숙한 재료를 회화와 조각으로 변주해 온 작가답게 서로 다른 작업을 한데 모아 그의 작품 세계를 압축해 보여줬다. 

몇 걸음만 옮겨도 미술책과 화면에서 익숙하게 보던 이름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가고시안은 데미안 허스트의 솔로 부스를 마련해 대표 연작을 한데 펼쳐놓았다. 화이트 큐브에서는 안토니 곰리의 드로잉 <STAND IV>와 박서보의 <Ecriture No.221121>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박서보의 작품은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전개한 'Newspaper Ecritures' 연작 중 하나다. 한 부스 안에서도 작가와 시대를 훌쩍 건너뛰며 작품을 볼 수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지도를 접고 눈에 들어오는 작품을 따라 걷게 됐다. 

Ota Fine Arts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쿠사마 야요이의 존재감도 이번 프리즈에서 유독 크게 다가왔다. 여러 갤러리가 그의 작품을 내걸면서 부스를 옮길 때마다 서로 다른 시기의 쿠사마를 만날 수 있었다. 오타 파인 아츠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그린 자화상 <Portrait Yayoi-Chan>이 눈에 들어왔고, 데이비드 즈워너에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David Zwirner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꽃 형상의 조각 <FLOWERS THAT SPEAK ALL ABOUT MY HEART GIVEN TO THE SKY>가 데이비드 즈위너 부스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그렇게 한국 거장과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오가다 보면 미술책과 화면에서 보던 작품을 실제 크기와 질감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프리즈에 온 보람은 충분했다.

낯선 재료의 새로운 발견

Arumjigi Foundation

작가의 이름 대신 작품을 이루는 재료에 시선을 두면 또 다른 재미가 보인다. 올해 처음 등장한 '머티리얼 프랙티스Material Practice)'는 순수 미술과 공예, 디자인 사이를 오가며 작품을 이루는 재료 자체에 주목한 섹션이다. 한국의 오랜 수작업 전통과 장인 정신, 재료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서 출발했다.

사진=강주희

특히 솔루나 파인 아트에서는 각각 2022년과 2026년 로에베 재단 공예 상을 받은 정다혜와 박종진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소개했다. 정다혜는 조선시대 말총 모자 제작에 쓰이던 전통 기법을 현대적으로 이어가는 작가다. 가느다란 말총을 한 올 한 올 엮어 형태를 만들며, 2022년 수상작 역시 이러한 전통 기법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빛이 그대로 통과할 만큼 섬세하지만 형태는 흐트러지지 않는 말총 작품을 눈앞에서 보면 '공예'라는 단어로만 묶기에는 아쉬울 정도다.

사진=강주희

바로 옆 박종진의 작품은 전혀 다른 물성으로 시선을 붙잡았다. 종이에 도자 슬립을 바르고 여러 겹 쌓은 뒤 고온에서 굽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소성 과정에서 종이는 타 없어지고 도자 물질만 남아, 얇은 종이를 여러 겹 포갠 듯한 형태가 완성된다.

올해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받은 <Strata of Illusion> 역시 이러한 제작 방식을 보여준다. 종잇장처럼 얇고 부드러워 보이는 표면이 실은 단단한 도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자연스레 한 번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된다.

사진=강주희

아울러 올해 처음 서울에 도입된 '스포트라이트(Spotlight)'는 20세기에 활동했지만 서구 중심의 미술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작가들을 다시 조명하는 섹션이다. 새로운 볼거리를 더하는 동시에, 그동안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미술사의 한 장면을 다시 들여다보게 했다.

그중 백아트는 1세대 사진가 한영수를 단독으로 소개했다. 한국전쟁 이후 1950~60년대 빠르게 변해가던 서울의 거리와 사람들을 기록한 사진가로, 거리의 순간을 포착한 작업 덕분에 '한국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라 불리기도 한다. 반세기도 더 지난 서울의 풍경이 세계 각국에서 모인 관람객 앞에 다시 펼쳐졌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장면이었다.

Pipe Gallery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작가들을 찾아보는 재미는 '포커스(Focus)'에서 이어졌다. 올해로 4년째인 포커스에는 2014년 이후 설립된 젊은 갤러리 16곳이 참여해 각기 한 명의 작가를 소개했다.

올해는 처음으로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주 갤러리까지 참여 범위를 넓히면서 회화와 조각은 물론 직조, 목판화, 디지털 작업과 참여형 설치까지 한층 다채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서울의 파이프갤러리는 디지털의 '0과 1'을 직조의 씨실과 날실에 빗댄 차승언의 <0101 Weaving>으로 올해 포커스 스탠드 프라이즈를 받았다.

Moon Kyungwon 038 Jeon Joon

누군가에게는 감상의 대상인 그림이 누군가에게는 사고파는 상품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 소장하는 작품이 된다. 마르셀 뒤샹은 "창조 행위는 예술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 관람자를 만나며 새로운 해석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전시장이자 거대한 '그림 상점'을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우리는 그림에서 무엇을 사고, 또 무엇을 보는 걸까.

전쟁과 기후 재난, 경기 침체처럼 불안한 현실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자신만의 사유와 고집, 질문을 작품으로 만들고, 또 누군가는 기꺼이 그 앞에 서서 바라보고 의미를 덧붙인다. 그렇게 예술은 만드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 사이에서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DDPⓒ2015.Panta Creation,Seoul Design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올해를 끝으로 프리즈 서울은 코엑스를 떠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자리를 옮긴다. 나흘 동안 수많은 작품이 서울에 도착했고, 그 작품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작품을 보고, 이야기하고, 때로는 선택했다. 내년 가을, 무대는 달라져도 서울은 다시 한번 미술로 들썩일 테다.

CREDIT INFO

사진= 프리즈 서울 제공

강주희 기자 juhee@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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