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저항, 음사 철폐와 유교식 제사의 시작
국어사와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배영환, 강문종, 김동건, 고승관이 '제주문화의 기원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철저하게 기록문헌과 구비문헌을 바탕으로 제주 문화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과 질정을 부탁합니다. [편집자주]
바람과 파도가 사방을 가로막은 섬, 제주는 육지와 다른 생존 방식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척박한 땅과 거친 바다에 목숨을 저당 잡힌 백성들에게 평안을 약속하는 존재는 한양의 임금이 아니었다. 한라산의 호국신을 모신 광양당(廣壤堂), 뱀의 신을 모신 차귀당(遮歸堂)을 비롯해 섬 전역에 깃든 1만 8천 신(神)들이 곧 그들의 피난처였다.
관과 무당이 손을 잡다
그러나 신앙의 뒤편에는 기형적 조세 구조가 도사리고 있었다. 무당들은 백성들에게, "액막이를 하지 않으면 귀신이 큰 재앙을 내릴 것이다."라고 겁박하며 면포나 비단, 소와 말, 심지어 밭까지 거두어들였다. 무당의 무리를 당한(堂漢)이라 불렀는데, 『탐라장계초』에는 그 수가 1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제주는 논농사가 어려워, 공적으로 사용할 각종 재원이 부족했다. 이에 관청에서는 재정의 파탄을 막기 위해, 무당들에게 관용 면포의 납부를 전적으로 떠넘겨버렸다. 당시 면포는 육지에서 전량 수입해야 하는 매우 귀한 물산이었다. 그러자 무당들은 이를 수탈의 명분으로 삼아 백성의 고혈을 더욱 쥐어짰고, 가혹한 부역에 짓눌린 백성들이 다투어 무당 일에 뛰어드는 악순환이 이루어졌다.
말에서 내리지 않은 제주목사 이형상
1702년(숙종 28) 가을, 제주목사로 부임한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은 순력 길에 대정현 산방산 서북쪽의 광정당(廣靜堂)을 지났다. 이곳은 지나는 사람이 말에서 내려 예의를 표하지 않으면 말이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한다. 아전은 그에게 말에서 내리기를 청했으나 듣지 않았고, 말은 과연 다리를 절었다. 이형상은 물러서지 않고 신당으로 찾아가 말을 잡아 제사를 지내게 한 뒤, 당의 신을 보이라 요구했다. 그러자 요사스러운 이무기가 나타나 깃대를 물어뜯으니, 그것을 베어 죽이고 신당을 불태워버렸다.
미신을 믿지 않은 목사의 당당한 태도를 기록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의미는 다른 데 있었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던 금기를 깨뜨리고도, 목사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섬사람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는 병에 걸리지도, 갑자기 피를 토하지도, 물에 빠져 죽지도 않았다. 백성들의 공포는 분노로 바뀌었다.
음사 철폐와 유교식 제사의 도입
이형상의 개혁은 미신을 타파하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국가 전례(典禮)의 기준에 입각해 없앨 것과 공인할 것을 나누는 의례의 치환(置換) 전략을 구사했다.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은 본래 군왕만이 지낼 수 있는 천자의 제례임에도 제주에서 사직단과 함께 참람되게 거행되었기에 과감히 철폐했다. 반면 한라산과 바다를 향한 산천제(山川祭)는 국가 공식 사전(祀典)에 등록되지 않은 채 무속과 뒤섞여 있었기에, 예조에 장계를 올려 정식으로 향축을 내려받는 국가 공인 제사로 격상시켰다.
또한 탐라 시조의 발상지인 삼성혈(三姓穴; 당시 모흥혈毛興穴)과 무속 사당인 광양당(廣壤堂)의 제의가 뒤엉켜 있던 것을 분리하였다. 광양당은 헐어버리고 제주성 안에 삼성묘(三姓廟)를 세워, 삼을나의 위패를 모셔 봄가을에 유교식 제사를 올리게 했다. 사당에 모신 조상신에게 유교식 제사를 올리는 문화적 전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숙종과 이형상의 백성을 위한 마음, 절해고도를 울리다
또한 이형상은 제주민을 삶의 질곡에서 해방시키고자, 『제주민막장(濟州民瘼狀)』을 올려 조정의 결단을 촉구했다. 숙종은 여섯 가지 항목에 대해 파격적인 감면의 결단을 내려주었다.

「건포배은」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들
『탐라순력도』의 서른아홉 번째 그림 「건포배은(巾浦拜恩)」은 이 거대한 격변의 스토리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아낸 것이다. 건입포 바닷가에는 백성들이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엎드려 절하고 있고, 중단 관아에서는 지역 유생들이 목사를 찾아 감격을 표하고 있으며, 상단 성 밖 산자락 곳곳에서는 신당들이 시뻘건 불길을 내뿜으며 불타고 있다.
가혹한 세금을 그나마 덜게 되자, 제주의 관리와 유생들이 건입포로 나가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들은 목사를 찾아와 나라의 은혜가 뼈에 사무치니 부정한 음사를 철폐하겠다고 했다. 이튿날, 129곳의 신당과 사찰이 잿더미로 변했다. 무당 명부에서 이름을 지운 285명은 농토로 돌아갔다. 그들 역시 자발적으로 무업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몸통은 무속 신앙이 아니라, 썩어 문드러진 조세 제도였던 셈이다. 신당이 불타고 여러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탈이 없자, 백성들은 일찍이 이전에 속은 것이 지극히 분한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연구원이다. 한국한문학을 전공하고, 제주대학교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조선시대 연행록에 담긴 이야기에서부터 인간이 무엇에 감동하는가라는 질문까지 폭넓은 주제를 탐구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 "음주 문화를 통한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일고찰", "한(恨)의 정서에 내재된 이중 구속의 구조", "문예미학에서의 윤리적 경계와 감동(感動)의 관계 연구"가 있고, 저서로는 "조선잡사(공저)", "독경(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