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원 공간서 ‘한 뼘으로 줄인 캔버스’… 와인병 레이블에 예술 세계 옮겨 담다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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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충동 호텔신라 로비 천장을 가득 채운 '집합체 130121'. 거대한 3차원 공간을 통째로 캔버스 삼아 작품으로 빚어내는 '설치미술 거장' 박선기(60) 작가의 작품이다. 평생 3차원 공간을 무대로 삼은 그가 왜 갑자기 한 뼘도 안 되는 캔버스에 눈을 돌렸을까.
한국인이 소유한 다나는 애초 조선 백자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아 와인 이름을 바소로 지었고, 초기 레이블에 사진작가 구본창의 달항아리 사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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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마을 소년서 ‘세계적 작가’로
고2 때 은사 조언에 그림서 ‘조각’으로
대학 졸업 뒤 伊 유학 중 화랑 전속계약
김종영조각상도 수상… 비서울대 최초
아트 레이블 프로젝트 ‘완판’ 새 기회로
美 와인 브랜드 다나 ‘바소’ 의뢰받아
‘화병’ 이름에 맞게 달 항아리 등 표현
시간이 빚은 와인에 침묵·울림 담아
점에서 선, 그리고 면으로
숯 다룬 작품 구현 고민 중 매달기 택해
대형 설치 작품 ‘집합체’ 3점 등 선보여
다음 작품으로 한지 활용 ‘모빌’ 구상도

작가의 개인전 ‘The Origin of Space’가 열리고 있는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 더 헤리티지 뮤지엄으로 들어서자 박 작가가 반가운 표정으로 맞는다. 그는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다나 에스테이트의 대표 와인 바소(VASO) 4개 빈티지(2020~2023)의 레이블 작업을 맡았으며, 달항아리 등 4개의 수묵화 작품으로 완성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바소는 이탈리아어로 ‘항아리’ ‘화병’을 뜻한다. 한국인이 소유한 다나는 애초 조선 백자 달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아 와인 이름을 바소로 지었고, 초기 레이블에 사진작가 구본창의 달항아리 사진을 사용했다. 다나 와인을 수입하는 에노테카코리아는 창립 15주년을 맞아 이 달항아리 스토리를 되살릴 작가를 수소문한 끝에 박 작가를 낙점했다. 그가 전에 와인 업계에서 드문 ‘완판 기록’을 세운 것이 결정적이다. 와인과 미술이 만나는 스페셜 레이블 프로젝트는 화려해 보여도 실제 완판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박 작가는 몇 해 전 이탈리아 피에몬테 와이너리 미켈레 키아를로와 협업하면서 기존에 만들어 놓았던 화분과 드로잉 작품을 사용했는데 출시되자마자 완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트 레이블 프로젝트에서 완판을 기록한 국내 작가는 박 작가와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 클라세 1등급 샤토 무통 로칠드 2013 빈티지에 작품을 담은 이우환 작가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다.

그렇게 프로젝트에 두세 달을 매달렸는데, 정작 그림 자체는 한 점을 그리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손을 계속 대면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어서 큰 붓질 몇 번으로 완성했답니다.” 그림에는 마치 우연히 튄 듯한 물방울 모양 파편들이 흩어져 있는데, 이 역시 영리하게 계산된 배치다. 작가는 이번 작업이 남달랐다고 돌아본다. “이렇게 와인에 그림을 매칭하는 일은 흔치 않잖아요.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었어요. 평소와는 좀 다른 생각을 해야 했으니까요. 와인은 자연이 시간과 함께 빚어낸 형태입니다. 저는 그 형태가 지닌 침묵과 울림을 그림으로 옮기고자 했답니다.”

1846년까지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나파밸리 심장부 러더포드에 자리한 다나는 한때 화재로 폐허가 됐었다. 숯이 돼버린 잔해에서 새 와이너리가 시작된 스토리가 묘하게도 박 작가의 작품세계와 닮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주로 숯을 주렁주렁 매달아 3차원 공간에서 고대 건축물의 기둥 및 아치, 한국 전통 건축과 문화재 탑 등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숯은 단순히 까만 덩어리가 아니라 ‘나무의 마지막 모습’이자 ‘새로운 시작’이라는 점에서 다나와 만남은 운명적이다.
그가 지금은 전 세계의 컬렉터들의 러브콜을 받는 세계적인 작가로 평가받지만 어린 시절은 아주 불우했다. “경북 구미 선산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마을 전체가 네 가구뿐이라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았어요. 열 살 터울인 형과 누나가 일찌감치 대구로 유학을 떠난 뒤로는 매일 혼자 들판을 뛰놀며 자랐죠.”

졸업 후엔 편도 비행기표 한 장만 끊어 무작정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을 떠났다. “스물여섯 살 때였죠. 1년 동안 죽어라 이탈리아어를 공부한 뒤 어렵게 브레라 국립미술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어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한국 식당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죠. 그러다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모두 그만두고, 굶어 죽을 때까지 해보자는 각오로 작품에만 매달렸답니다.”

더 헤리티지 뮤지엄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은 13일까지 진행된다. 1935년 조선저축은행으로 지어져 SC제일은행 본점으로 쓰이다 문화공간으로 거듭난 이 근대문화유산 건물의 4층 뮤지엄과 5층 중앙정원에서 박 작가는 대형 설치작품 ‘집합체’ 신작 3점과 조각, 드로잉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해 강원 양양 산불 당시 불에 탄 목재를 가져다 한옥 모양으로 짜맞춘 뒤 이를 천장에 매달았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양식 건물 안에 소실된 한옥을 세워 자연, 인간,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공간을 보여준다.
특히 이번 전시에선 그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점-선-면’ 3부작을 완성했다. 점의 시작은 숯이다. “처음부터 숯을 다룬 건 아니에요. 대학 시절 깨진 돌조각을 매달아본 게 시작인데, 너무 무거워서 설치비가 많이 들더군요. 그러다 자연을 대표할 소재로 나무에 주목했고 나무가 불을 견뎌 마지막에 다다르는 형태, 즉 숯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더군요.”
매다는 방식을 택한 이유는 다분히 전략적이었다. “숯을 어떻게 작품으로 구현할까 고민하다 세우다, 박다, 기대다 등 모든 동사를 숯에 대입해 봤어요. 그러다 ‘매달다’에 확 꽂혔어요. 대부분의 공간은 바닥 위 2m 지점부터는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경쟁자가 없는 빈 공간을 공략한 겁니다.”
그렇게 매단 숯 조각들은 보는 각도에 따라 완벽한 형상으로 뭉쳤다가 다시 무질서한 점들로 흩어지며 이런 비움이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한다. 작가는 숯(점)으로 한옥의 기둥과 보 등의 형태를 만들어 선으로 나아갔고 이번 전시회에선 숯을 조밀하게 배열해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나 캔버스 화면 같은 ‘면’을 만들어 냈다.
평생 매다는 일을 했으니 좀 지겹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다시 다른 매다는 작업을 구상 중이란다. 바로 모빌이다. “평생 이 작업을 해왔으니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지를 활용한 모빌을 구상 중이랍니다. 그룹전에서 조금씩 선보였는데 반응이 좋아요. 큰 작품보다 오히려 작은 작품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 작은 건 자칫하면 볼품이 없어지기 때문에 진짜 섬세하게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죠.”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는 짧게 답했다. “열심히, 끊임없이 도전하세요.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1966년 경북 구미 출생 ●중앙대학교 조소학과 졸업(1994) ●밀라노 브레라 국립미술원 졸업(2002) ●갤러리 서호 개인전으로 작가 데뷔(1994) ●밀라노 ‘갤러리 로렌스 루빈’ 전속 작가(1997) ●베를린 갤러리 아트인프로그레스 개인전(2002) ●마드리드 갤러리 에두르네 개인전(2004) ●김종영미술관 ‘오늘의 작가’ 선정(2005) ●제9회 김종영 조각상 수상(2006) ●호텔신라 로비 대형 조형물 ‘집합체(An Aggregation) 130121’ 설치(2006~) ●경주 우양미술관 개인전 ‘뷰티풀’(2015) ●김세중미술관 개인전(2018) ●대구 인당뮤지엄 개인전 ‘SPACE’(2020)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공간 조형물 ‘집합체 190707’설치(2020) ●신세계백화점 더 헤리티지 뮤지엄 개인전 ‘The Origin of Space’(2026) ●프랑스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 작품 소장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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