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개량된 헝가리 고춧가루… 순한맛 홍보, 세계 식탁에 오르는 고추장·김치… 매운맛 승부[정주영이 만난 ‘세상의 식탁’]

2026. 9. 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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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칼로처(Kalocsa)는 집집마다 처마가 붉어진다.

매운 고추 집단에서 우연히 매운맛이 없는 개체를 찾아냈고, 이를 선발해 맵지 않은 고추 품종을 육성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고추는 기존 음식 문화와 만나 고춧가루와 고추장, 김치의 맛으로 자리 잡았다.

한때 외국인 관광객에게 불고기와 비빔밥 같은 순한 음식을 먼저 권하던 한국에서, 이제 고추장과 떡볶이, 불닭볶음면의 매운맛이 K푸드의 강력한 언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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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주영이 만난 ‘세상의 식탁’ - 매운맛
9월이면 붉어지는 헝가리 칼로처의 처마. 실에 꿴 고추를 매달아 말리는 전통 방식을 여전히 볼 수 있다. 게티이미지 뱅크

9월의 칼로처(Kalocsa)는 집집마다 처마가 붉어진다. 실에 꿴 고추가 길게 늘어지고, 마당 한편에는 말린 고추가 걸려 있다. 낯선 헝가리의 풍경인데 이상하게 한국의 어느 시골 마당에 온 것 같았다.

닮은 것은 풍경만이 아니었다. 헝가리 사람들도 고추를 말리고 빻아 가루로 쓴다. 부다페스트에 있는 전통시장에서 발견한 붉은 가루는 우리나라 고춧가루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뿐인가. 그 고춧가루로 만든 헝가리 전통 요리인 구야시(영어명 굴라시)나 할라슬레(영어명 할라즐)는 우리의 육개장이나 매운탕을 떠올릴 만큼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막상 맛을 보니 예상과 달랐다. 맵지 않다. 그렇게 시뻘건 고추로 한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더니, 이 순한 맛이 어쩐지 배신처럼 느껴졌다. 분명 고추였는데, 왜 이곳의 고추는 맵지 않을까. 전혀 다른 종자인가?

우리가 ‘매운맛’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미각이라기보다 통증에 가깝다. 고추의 캡사이신이 우리 몸의 열과 통증을 감지하는 수용체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물에 잘 녹지 않아 물만으로 씻어내기도 어렵다. 파키스탄 여행 때 고추를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요리에 넣을 요량으로 몇 개를 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가락이 얼얼해지고 감각이 이상해졌다. 화끈거리는 통증은 며칠간 이어졌다. 매운맛은 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고추의 매운맛만큼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헝가리 고추가 처음부터 순했던 건 아니다. 100년 전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매웠다. 다만 헝가리 사람들은 이런 자극적인 맛을 선호하지 않았다. 대표적 생산지인 세게드와 칼로처에는 고추를 하나씩 갈라 매운 성분이 몰린 하얀 심줄을 도려내는 공정이 따로 있었을 정도다. 종일 이 일을 하던 사람들은 저녁이면 손이 퉁퉁 부어오르고 쓰라린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이 고통에서의 해방은 1928년, 칼로처의 한 실험실에서 이루어졌다. 매운 고추 집단에서 우연히 매운맛이 없는 개체를 찾아냈고, 이를 선발해 맵지 않은 고추 품종을 육성했다. 이 덕분에 고추를 가르던 손은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헝가리의 고추는 외국인에게도 다가가기 쉬운 향신료가 됐다. 실제로 1920∼40년대 헝가리의 관광 홍보에서는 외국인, 특히 영국인이 매운 음식으로 불편해할 것을 우려해 ‘우리 음식은 생각만큼 맵지 않다’고 안심시키기도 했다.

반면 한국에 뿌리내린 고추는 매운맛 그 자체로 음식에 활용됐다. 한반도에 들어온 고추는 기존 음식 문화와 만나 고춧가루와 고추장, 김치의 맛으로 자리 잡았다. 맛과 더불어 캡사이신의 항균 작용이 부패균의 번식을 억제하고 유산균 발효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캡사이신의 통증에 반응해 몸이 내보내는 엔도르핀 덕분에 매운 것을 먹고 나면 어쩐지 후련해진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매운맛 역시 처음부터 존재했던 맛이 아니라 새로운 식재료가 들어와 한국의 음식 문화 속에 녹아든 결과다.

맵다는 표현은 영어에서는 뜨거움의 이미지를, 헝가리어에서는 꼬집는 고통을, 한국어에서는 사납고 모질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일본어에서는 괴롭다는 말과 같은 글자를 사용한다. 여러 언어에서 매운맛은 이처럼 고통이나 자극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그렇지만 같은 고추를 두고도 누구에게는 줄여야 할 통증으로, 누구에게는 꼭 있어야 할 맛으로 진화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100년 전 헝가리는 외국인에게 “우리 음식은 맵지 않다”고 알렸다.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세계를 향해 “한국 음식은 맵다”고 말한다. 한때 외국인 관광객에게 불고기와 비빔밥 같은 순한 음식을 먼저 권하던 한국에서, 이제 고추장과 떡볶이, 불닭볶음면의 매운맛이 K푸드의 강력한 언어가 됐다. ‘spicy sauce’가 아니라 ‘gochujang’이라는 이름 그대로 세계의 식탁에 오르고 있다.

가을 햇살 아래 널린 태양초를 보며, 칼로처의 고추가 겹쳐 보였다.

한국의 매운맛을 본 외국인들이 매운맛을 기대하며 헝가리 음식을 먹었다가 실망하지는 않을지.

한양대 관광학과 겸임교수

■ 한 스푼 더 - 고추와 노벨상

헝가리 고추는 노벨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세게드대의 얼베르트 센트죄르지는 고추에서 비타민C를 대량 분리하는 데 성공했고, 이 연구로 1937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대항해시대 선원들에게 이 성분의 부재는 곧 죽음이었다. 신선한 채소 없이 바다를 건너다 괴혈병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매일 음식에 뿌리는 붉은 가루는 맛이기 이전에 생존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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