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다정하던 그 시인, 무서워졌다… 또는 무서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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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이라니 너무 SF적이잖아!" 2020년 1월 1일, 김행숙(56) 시인이 외친 첫 문장이다. 그래서 2020년대가 "불길하게 느껴졌다"고 시인은 말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무력감에서 어떻게 시로 돌아왔을까.
사랑에는 용기가 내포돼 있다는 걸 시인은 그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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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후… 기저의 감정은 공포”
한때 ‘써서 뭐 하나’ 무력감 시달렸지만
“좋은 꿈 꾸려면 필요한 건 사랑” 깨달아

“2020년이라니 너무 SF적이잖아!” 2020년 1월 1일, 김행숙(56) 시인이 외친 첫 문장이다. 20대에 본 SF 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연대가 2020년이었다. 그래서 해가 바뀌었을 때 새삼 놀랐다.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SF 영화는 곧 디스토피아 영화였다. 인간이 종말을 맞고, 기계와 대립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2020년대가 “불길하게 느껴졌다”고 시인은 말했다.
현실이 예감보다 더했다. 그해 코로나19 팬데믹이 세계를 뒤덮었다. 시인은 “지금 저의 기저에 깔려 있는 감정은 공포인데, 출처를 거슬러 가면 2020년”이라고 말했다. 근원적인 감정이 변화하면서 그의 시도 달라졌다. 김행숙 고유의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는 그대로지만, 그 속의 정서는 공포가 됐다. ‘무서운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은 시집은 ‘무서워하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6년 만에 신간을 낸 시인을 4일 서울 마포구 문학과지성사 사옥 북카페 문지살롱에서 만났다.

“과거에서 온 사람들은/ 온종일 과거를 생각했다/ 왔던 길로 돌아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2020년’ 부분)
“노인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리워할 것을 가졌다고 우쭐대는 것 같다. (…)// 그때는 늙은이가 젊은이를 부러워했단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겼단다. 불쌍한 아이야, 미안해……” (‘서울, 2049년 겨울’ 부분)
젊은이가 늙은이를 부러워하고, 죽은 것보다 살아있는 게 불쌍한 날들. 2049년의 서울은 얼마나 망해 있을까. 2020년대는 팬데믹을 필두로 기후위기의 심화, 국내외 질서의 혼란 같은 것들을 줄줄이 달고 왔다. 시인은 세계의 멸망을 상상했다. 그리고 2021년까지 시를 거의 쓰지 못했다. 그는 “제가 지구 멸망을 앞두고 사과나무 한 그루 심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고 웃었다.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앞서 6권의 시집을 낸, 27년 차 시인은 시를 쓰는 게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종말을 생각하게 되면 굉장히 다양한 반응들이 있는 것 같아요. 건강한 방식은 그런 미래가 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냥 너무 무서웠어요. ‘써서 뭐 하나’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오늘 밤부터 12월 32일이라고 했습니다. (…) 12월 32일이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맞혀봐! 맞혀봐! 스무고개를 넘으면, 거긴 허허벌판, 누구라도 눈이 밝아지는 실외 사격장. 자칫하면 처형장으로 돌변할 수 있는” (‘12월 3일’ 부분)
“삐죽삐죽한 초록, 초록, 초록의 잎들도 38도쯤./ (…) 붉은 신호등처럼 피에 젖은 눈동자도 39.5도쯤./ 축 늘어진 아이를 업고 세상은 응급실에서…… 응급실로 뺑뺑이를 돌고 있어./ (…)// 그러나 긴 다리를 녹슨 가위처럼 벌리며/ 그는 계속 달리고 있다.” (‘응급실 가는 길’ 부분)
핏발 선 눈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업고, 녹스는 가윗날처럼 땀을 뚝뚝 흘리면서, 부모는 응급실로 달린다. 폭염이 덮친 여름은 날카롭고 위태로운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지구가 두 번째 지구라는 것을 기억도 못 한다면// 슬픔도 걱정도/ 죽음도 모두 잊고/ 새 생명은 똑같은 실수를 정확히 반복하겠지”(‘만약 두 번째 지구라 해도’) 같은 비관에는 절망과 원망이 모두 들었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무력감에서 어떻게 시로 돌아왔을까.

“노을은 영혼을 후벼 파는 노래처럼 나를 홀리고 있구요. 나는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인처럼 미칠 듯한 향수를 느껴요. (…)// (…)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면 뜻밖에 샘솟은 내 사랑이 죽을 때까지 날 괴롭히겠죠? 아아아, 뭔가가 확실해지고 있어요.” (‘8월의 세이렌’ 부분)
그는 어느 여름 부산에 갔다가 장엄한 노을을 봤다. 너무 화려해서 지구의 풍경 같지가 않은 노을이었다. “그러니까 그립더라고요. 서울이, 내가 살았던 지구가. 내가 외계 행성에서 혼자 살아가야 한다면 얼마나 그리워할까, 마음속에서 울컥하면서 그리운 마음이 밀려들었거든요. 그런 사랑이 저에게는 시를 쓰는 힘이 아닐까 해요.”
사랑에는 용기가 내포돼 있다는 걸 시인은 그때 깨달았다. “공포심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런 말들은 사람들을 어떤 의미에서 각성시키지만, 실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죠. 공포만 갖고 좋은 꿈을 꾸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필요한 게 사랑인 것 같고요.”
오랜 공포와 작은 희망의 단초를 갈무리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맨 마지막에 쓴 건 뒤표지 글이다. 그는 “공포, 연민, 카타르시스”(아리스토텔레스 ‘시학’)라는 어구를 변주해 이렇게 적었다. 공포의 시들을 닫는 한편, 다음 시의 예고편처럼 읽히는 말이다. “공포, 사랑, 용기. 이 세 개의 단어가 물리고 엉켜서 여름 담장의 초록빛 넝쿨이 되는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갖고 싶었다.”
김나연 기자 is2n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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