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재 『문학이 음악이 되는 순간』…고전문학에서 얻은 영감과 상상력으로 풀어낸 음악의 미스터리

2026. 9. 7. 16:58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저자는 진정한 다독가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지만, 특히 소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열독가이기도 해서 좋은 문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마음에 와닿는 구절은 빼놓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가 적재적소에 인용하곤 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 쌓인 독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안목과 통찰이 되었다. 그 결과 음악도 문학을 렌즈 삼아 듣고 해석한다. 물론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특히 기악)은 그 본질이 무척 추상적이어서 특정 문학과 연결하는 일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독특한 감상법을 꾸준히 갈고 닦아 온 저자는 그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즐긴다. 이 책은 그 감상의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려는 뜻깊은 시도이기도 하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 고전음악의 미스터리들이 특히 그렇다.

말러와 바그너 등은 베토벤의 음악을 무한히 넓히고 상상할 수 없는 깊이까지 밀어붙였다.

이론과 학문으로 고전음악에 다가가기 어려운 평범한 감상자들이 지루함을 견디며 음악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이야기이자, 그럴듯한 상상력이다.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인재 작가

‘저자는 진정한 다독가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지만, 특히 소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열독가이기도 해서 좋은 문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마음에 와닿는 구절은 빼놓지 않고 기록해 두었다가 적재적소에 인용하곤 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 쌓인 독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안목과 통찰이 되었다. 그 결과 음악도 문학을 렌즈 삼아 듣고 해석한다. 물론 대부분의 클래식 음악(특히 기악)은 그 본질이 무척 추상적이어서 특정 문학과 연결하는 일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독특한 감상법을 꾸준히 갈고 닦아 온 저자는 그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즐긴다. 이 책은 그 감상의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려는 뜻깊은 시도이기도 하다.’

『문학이 음악이 되는 순간』(arte)과 저자인 유인재 작가에 대한 추천사이다. 유형종 무지크바움 대표가 썼다.

유 대표의 말처럼 저자는 음악을 문학이라는 렌즈로 해석한다. 그래서 책의 부제가 ‘고전문학으로 풀어낸 클래식의 비밀’이다.

두 분야의 접합을 시도할 만큼 공력이 깊지만, 기실 그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고 그 분야에서 일하지도 않았다. 낡은 세상을 바꾸고 멋진 세계를 만들겠다는 꿈으로 공직에 오래 재직했다. 기술고시 제29회(현 행정고시 제37회)로 공직에 입문하여 감사원 국방감사단장, 지방행정감사국장, 국토해양감사국장을 지냈다. 서울시, 국민안전처, 국가철도공단에서도 근무했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고전음악이 규칙과 질서, 사실과 증거만을 다루던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고 되돌아봤다. 그 후 20여 년, 그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고,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들었다. 영국 런던대에서 국비 유학하며 유럽 고전음악의 본고장을 직접 경험했다. 공직을 떠난 뒤 ‘미래도시성장연구소’를 설립해 예술과 문화가 도시의 성장과 재생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음악 감상 동호회 ‘클래식 바움(Classic Baum)’ 회장을 맡았으며, 전문 저널과 일간지에 음악 칼럼을 기고하고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고전음악을 강의하는 음악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음악 평문을 애호하는 저널리스트 강성웅은 “풍성하면서도 적확한 글에 매료됐다”라고 말했다. 방송국 앵커, 특파원, 논설실장을 지낸 언론인이 그런 평가를 할 정도로 유 작가의 글은 마니아가 많다.

그의 책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스스로 쓴 서문이 가장 좋을 것이다. 또한 지난 4일에 있었던 북콘서트 후기도 울림을 줄듯 싶어 아래에 옮겼다. 김지은 기자

<자자의 서문>

인생은 반복되는 ‘평범한 순간’의 연속이다. 하지만 매 순간들은 판단이 필요한 ‘결정의 순간’이기도 하다. 사소해 보였던 그 결정이 우리를 전혀 다른 길로 이끌기도 한다. 그 순간 중에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역사의 물줄기를 비틀고, 예술의 경지를 개척하는 위대한 순간이 있다. 오스트리아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는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그런 순간을 ‘별의 순간’이라 불렀다. ‘별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온다.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무심코 흘러나온 음악 한 곡이 예상치 못한 곳을 건드렸던 순간. 이유도 모른 채 심장이 잠시 멈춰버리고, 갑자기 영혼이 반응해 버리는 그 당혹스러운 경험. 평범하였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리는 순간.

나에게도 ‘별의 순간’이 있었다. 20여 년 전,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고전음악(Classical Music)을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그 순간 흘러나왔던 음악이 무엇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츠바이크의 표현처럼 전 대기권의 전기가 피뢰침 꼭대기로 빨려 들어가듯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정수리로 들어와 심장이 박동하고, 영혼이 진동했던 느낌만은 생생하다. 돌이켜 보면, 그 순간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순간이었다. 장소는 음악과 가장 거리가 먼 곳이었다. 마음도 음악이 터잡기 어려운 메마른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지식 역시, 복잡하고 세련된 고전음악에 대한 아무런 기초도 없는 황무지 같았다. 고전음악은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내가 상상하던 세계와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음악이 찾아온 것은, 내 속에 빈 곳과 아픔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오랜 방황과 고된 노력 끝에 선택한 ’공직(감사원)‘이 주는 보람은 특별했지만, 부담도 남달랐다. 낡은 세상을 바꾸고 멋진 세계를 만들겠다는 꿈은 사치스러운 낭만처럼 느껴졌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나의 힘은 미약했다. 세상은 전쟁터였고, 세계는 야수와 같았다. 자비의 향기나 자유의 공기도 희박했다. 고난의 세상이자, 고통의 세계였다.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듯하였다. 떠날 세상도 없었고, 벗어날 세계도 없었다. 버티고 싸워야 했다. 싸우다 보니 다른 두려움이 생겼다. 니체의 말이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감사(監査)’라는 평범하지 않은 업무를 하면서 괴물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괴물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사실과 현실에 집중하면서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교훈대로 “형용사가 빠진 사실만 남게 되는” 무미건조한 부사적인 삶을 살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숨이 막혀 왔다. 피투성이가 된 몸이 쉴 곳이 필요했다. 상처 가득한 영혼이 위로받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음악은 그 빈 곳을 감기처럼 헤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열병처럼 앓게 하고 있다. 순수한 음악적 열락이 아니다. 허세나 허영과도 거리가 멀다. 고상해지거나 특별해지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고전음악은 뜻밖의 구원이자, 또 다른 메시아였다.

음악이 찾아온 ‘별의 순간’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음악이 흐르는 순간은 외형적으로 ‘성공(成功)’하기 보다는 내면적으로 ‘성장(成長)’하고, 목표를 ‘성취(成就)’해야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목적에 ‘도취(陶醉)’하며, 아름다움에 ‘만취(滿醉)’하여 응어리진 ‘숙취(宿醉)’를 해소하는 영원의 순간이었다. 음악을 듣는 장소는 누구도 쓰러뜨릴 수 없는 위안과 위로를 얻는, ’퀘렌시아(Querencia)’ 같은 불멸의 공간이었다. 음악을 통해 ‘별의 순간’ 이전, 나를 힘들게 하였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다. 잃어버렸던 이상과 포기하였던 낭만도 되찾을 수 있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을 극복했다기보다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 것이다.

패자의 허무나 약자의 체념이 아니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의 가사를 쓴 프리드리히 실러의 말대로였다. “사람들은 오직 아름다움을 통해 자유에 이를 수 있다.” 음악 안에서 세상은 아름다웠고, 세계는 자유로웠다. 아름다움을 알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존귀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존엄해지는 것이다. 오만하지 않고 겸손해지는 것이다. 무도한 권력과 무뢰한 자본 앞에서 비겁하지 않은 것이고, 거치른 운명과 누추한 환경에서 비참해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능력과 미천한 재능을 비하하지 않는 것이고, 사회적 약자와 경제적 빈자가 비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음악을 잘 알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게 20여 년 전 우연히 만난 ‘별의 순간’이 가져다준 자각이자 각성이다. 이 책은 그 ‘별의 순간’ 이후에 경험했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의 기록이다.

‘별의 순간’이 찾아온 이후 20여 년이 넘는 시간을, 음악을 호흡하고 탐구하였다. 음악과 함께 여행하고 사색하며 행복했다. 하지만 고전음악을 좋아하게 되면 반드시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소리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순간. 이 음악이 왜 이토록 나를 흔드는지, 작곡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것을 썼는지, 이 선율 안에 무슨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알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고전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하게 되는 그 갈망이다. 갈망이 깊어질수록 절망도 함께 커졌다.

언어가 없이 한 시간을 넘나드는 절대음악(絶對音樂). 그것을 항해할 나침반이나 내비게이션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론으로 접근하기에는 물려받은 유산도, 소리로 구별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도 부족했다. 음악이라는 문명 세계의 문 앞에서 서성이는 야만인과 같았다. 지금도 음악 이론은 난수표이고, 음악 구조는 미로다. 특히 교향곡이 그랬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은 왜 ‘운명’이라 불리고 있는가. 슈베르트는 왜 교향곡 제8번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브람스는 왜 교향곡 제1번을 쓰는 데 20년이 넘게 걸렸는가. 차이콥스키는 왜 마지막 교향곡에 ‘비창’이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수많은 음악 서적을 읽고 인터넷을 뒤졌지만,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이유가 있었다. 작곡가들은 자신의 음악이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제목을 붙이지 않거나 충분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후대의 음악학자들 역시 근거 없는 상상력으로 빈 곳을 채우기보다 학문적 분석과 이론적 해석에 머물렀다. 그 질문들은 오랫동안 감상자들의 상상력에 맡겨져 왔다.

고전음악은 독립된 섬이 아니다. 진공 속에 고립된 공기도 아니다. 역사의 후손이자 시대의 산물이다. 삶의 은유이자 영혼의 고백이다. 감정의 발현이자 감성의 재현이다. 이상의 구현이고 이념의 실현이다. 문학의 숲이고 철학의 나무다. 이 모든 것을 품은 하나의 이야기다. 피카소는 말했다. “단지 예술가의 작품만을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언제, 왜, 어떤 이유로 그 작품을 남겼는지 이해해야 한다.” 고전음악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작품을 낳은 개인의 환경은 물론, 그것을 둘러싼 사회·문화·역사적 맥락을 총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충분하지 않다. 수백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는 고전음악의 미스터리들이 특히 그렇다. 음악 이론도 학문적 분석도 끝내 그 빈 곳을 채우지 못했다.

이 책은 그 빈 곳을 채우려는 시도다. 고전문학에서 얻은 영감과 상상력으로 음악의 미스터리를 풀어낸 이야기다. 가공된 픽션이 아니다. 남겨진 역사와 분석된 자료에 근거한 팩션(Faction)이다. 감사관이 사건을 추리하듯, 시인이 언어를 은유하듯, 음악 안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소설 같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용기는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의 “한 편의 ‘소설 속에는 ‘작가(作家)의 몫’과 ‘독자(讀者)의 몫’, 그리고 ‘신(神)의 몫’이 있다.”라는 말에서 얻었다. 음악에도 ‘청자(聽者)의 몫’이 있다는 것이었다. 소위, 수용미학(受容美學)이다. 토마스 만은 “소설은 나에게 언제나 하나의 교향곡”이라 했고, 카뮈는 “좋은 음악에는 철학이 송두리째 이미지로 변해 있다”고 했다. 소설이 음악이고 음악이 철학이라면, 문학과 음악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언어의 끝에서 음악이 시작되고, 음악의 끝에서 언어가 다시 시작된다. 그 끝없는 순환 속에 이 책이 있다.

이 방식은 특히 지금, 이 시대에 중요하다. 가사도 설명도 없는 음악 앞에 홀로 앉아 “이것은 무엇인가, 작곡가는 무슨 말을 하려 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는가?”를 스스로 묻는 행위. 그것은 단순히 감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답을 내놓는 시대, 인간에게 남은 가장 고유한 능력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힘이다. 가사가 없는 고전음악은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는 것이다.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생각하는 힘을 되살리는 훈련이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우는 연습이다. 읽으니 들리고, 들으니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책이 제시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완성된 해석이 아니라 열린 가능성이다. 음악이라는 풍경을 향해 난 수많은 창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책은 고전음악 전문지 ‘음악저널’에 4년간 (2020년 4월∼2024년 2월) 연재한 글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전음악 동호회 중 하나인 ‘클래식 바움(Classic-Baum)’에서 강의한 자료를 함께 엮은 것이다. 다룬 음악은 24곡이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1741년)에서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7번(1924년)까지, 수백 년 고전음악의 역사 속에서 작곡 배경이나 작품의 의미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는 작품들을 골랐다. 그리고 각각의 음악과 배경과 정서가 닿아 있는 고전문학 24편을 짝으로 엮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부터 보흐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까지, 음악과 문학이 서로를 비추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본문은 베토벤을 중심으로 네 개의 장으로 나뉜다. 서양음악의 역사는 베토벤에 의해 완성되었고, 이후의 역사는 베토벤을 계승하거나 극복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1장 〈베토벤의 강〉은 베토벤 이전이다.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에게 흘러들어온 강줄기들을 따라간다. 제2장 〈베토벤의 광장〉은 베토벤 그 자신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조망하며 서양음악의 거의 모든 분야를 완성해 버린 베토벤의 핵심 작품들을 다룬다. 제3장 〈베토벤의 밀실〉은 베토벤 이후의 고통이다. 모든 것을 완성해 버린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선 슈만과 브람스 같은 작곡가들이 출구 없는 밀실 속에서 몸부림치며 써낸 작품들이다. 제4장 〈베토벤의 바다〉는 고전음악의 찬란한 확장이자, 쓸쓸한 마지막이다. 말러와 바그너 등은 베토벤의 음악을 무한히 넓히고 상상할 수 없는 깊이까지 밀어붙였다. 넓힐 수 있는 끝까지 넓히고, 파고들 수 있는 바닥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끝이 보이는 순간, 전혀 다른 문법을 가진 현대음악이 등장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아름다움의 언어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세계였다. 고전음악의 역사는 그렇게, 절정의 자리에서 막을 내렸다.

꼭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먼저 끌리는 작품부터 펼쳐도 좋다. 각 장에는 QR코드를 실었다. 해당 작품의 대표 음반 두 장을 추천했는데, 하나는 음악과 문학의 특징을 균형 있게 담아낸 정석의 연주이고, 다른 하나는 반드시 한 번은 들어봐야 할 개성 강한 연주다. 읽으면서 듣고, 들으면서 읽는 것이 이 책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고마운 분들이 많다. 부모님의 조건 없는 헌신, 장인·장모님의 아낌없는 지원, 아내와 아이들의 끊임없는 응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모든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음악적 동지이자 기꺼이 마루타를 자처해 준 고전음악 동호회 ‘클래식 바움’ 회원분들, 그리고 동호회 공간을 내어주시며 사실상 음악적 스승이 되어주신 유형종 ‘무지크바움(Musik-Baum)’ 대표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오랜 기간 부족한 글을 연재할 수 있도록 지면을 내어주신 《음악저널》 이홍경 발행인과 김희선 편집인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음악감상에도 특별한 비결은 없다. 반복해서 듣고, 다양하게 읽고, 깊이 사색하는 것뿐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지루함을 견디는 것이 음악의 여신을 영접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 책은 전문 서적이 아니다. 음악학이나 음향학으로 음악을 설명하는 책도 아니다. 넘쳐나는 참고서나 입문서도 아니다. 이론과 학문으로 고전음악에 다가가기 어려운 평범한 감상자들이 지루함을 견디며 음악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이야기이자, 그럴듯한 상상력이다. 어쩌면 음악이 없는 음악 이야기다.

가끔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소소한 감성과 별들이 만드는 별자리를 떠올리는 소박한 상상력이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술술 읽히지 않을 수 있다. 능력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사실 의도하지도 않았다. 덮고 나면 기억에 남지 않거나, 읽고 나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책이기를 원치 않았다. 문장에 걸려 고민하고, 문체에 찔려 아파하고, 문맥에 막혀 잠시 머무르는 책이기를 바란다.

이 책은 음악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한 평범한 애호가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또 다른 나를 위해 쓴 익숙한 듯 낯선 음악 이야기다. 방황하는 자녀를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에게,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그리고 특히 후배 공무원들에게 드리는 소박한 헌정이기도 하다. 책장을 넘기다 음악이 들리고, 음악을 듣다 문장이 보이는 순간이 오기를 바란다. 그 순간이 이 책을 읽는 이유이자, 이 책을 쓴 이유다.

<저자의 북 콘서트 후기>

북콘서트(9.4)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상상하고 준비했지만, 권투선수 마이크 타이슨의 말대로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한 방 맞기 전까지만 유효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가까운 지인들만 모시고, 지인들이 출연하고, 지인들끼리 즐기는 자리로 준비했지만, 너무 많은 분이 찾아주신 탓에 도리어 민폐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리도, 음식도, 책도 모자랐던, 모든 것이 부족한 행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명료하고 유머러스한 진행으로 분위기를 이끌어 주신 드림빌엔터테인먼트 한혜정 대표님(처형이시기도 합니다),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와 슈만의 헌정으로 거친 영혼을 울려 주신 피아니스트 이소은 선생님,

음악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슈베르트의 「음악에」로 들려주신 메조소프라노 전혜영 선생님, 여전히 뜨거운 9월에 슈만의 「아름다운 5월에」를 ‘불안한 갈망’에 담아 쏟아낸 아마추어 성악가이자 오랜 친구 바리톤 정종선 덕분에 책의 내용을 미흡하나마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저를 지켜보며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시고, 두려울 만큼 정직하고 정확한 추천사를 해 주신 무지크바움 유형종 대표님, 부족한 글을 오랫동안 실어주신 음악저널 이홍경 대표님의 애정 어린 추천사는 미흡한 책을 비로소 완성해 주었습니다.

또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대담에서 전문가란 무엇인가를 더없이 ‘클래식’하게 보여주신 송주호 음악칼럼니스트님은 책에 미처 담지 못한 것까지 남김없이 길어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두 시간이 넘는 북콘서트 내내 쉽지 않은 고전음악과 문학의 만남을, 돛대에 몸을 결박한 채 세이렌의 노래를 견딘 오디세우스처럼 참아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마지막 순서로 다 함께 부른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핀란드의 해방 찬가가 아니라 고단한 북콘서트에서 마침내 풀려난 ‘자유의 찬가’처럼 우렁차고 벅찼던 것 같습니다.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