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 노력’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 때론 긍정하지 않는 것이 윤리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나는 되도록 스크린에 가까운 앞자리에서 영화를 본다.
"직업계고 현장실습생의 성장을 담은 영화 '3학년 2학기'를 전국의 학생, 교원, 교육청 관계자와 함께 관람하고, 현장실습 제도 개선 방향을 함께 고민했습니다. 앞으로도 교육부는 현장실습이 배움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안전하고 내실 있는 운영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정부 고위 보직자가 이런 영화를 보고 개선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다.
내가 볼 때,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안전하고 내실 있는 운영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영화의 핵심이었다. 정부의 개선 노력 이상의 심각한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의 고교 시절에는 교외 클럽활동을 통해 실업계 친구나 선후배들과 어울릴 일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강북 청소년이던 내가 재개발 이전 서울 관악구 난곡을 경험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찬 바람이 세차게 불던 수십 년 전 난곡의 벌판은, 재개발이 오래전에 끝난 오늘날 난곡에는 흔적도 없다. 오늘날 인문계 고교생에게 상시적으로 실업계 고교생을 만날 기회가 있을까. 영화 ‘3학년 2학기’를 통해 미뤄 보면, 없을 것 같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나올지언정, 비실업계 고교생은 단 한 명도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가 암시하는 바에 따르면, 주인공 창우가 실업계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아버지가 세 자녀를 두고 일찍 죽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제 엄마는 세 자녀를 혼자 힘으로 길러야 한다. 여기에 가난의 뿌리가 있다. 혼자 남은 엄마는 고소득을 올릴 만한 기술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 그나마 공부를 잘하는 둘째를 대학에 보내기로, 가족은 전략을 세운다. 그러한 가족의 전략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약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 모든 결정을 묵묵히 수용하는 창우 같은 소년이 과연 흔할까.
교사의 조언대로, 창우는 인력난을 겪는 중소기업에 실습생으로 들어간다. 그 공장에서 실습을 잘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고, 정직원이 되면 연계된 대학에 진학할 수 있고, 대학 진학이 확정되면 병역 혜택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실습 현장에서는 유무형의 구박이 이어지고, 안전장비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작업 시 착용해야 할 팔토시나 가죽 앞치마조차 지급되지 않는다. 특히 2층 하역장에는 작업 속도를 올리느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할 추락방지 시설조차 없다.
창우는 일을 썩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애매한 실습생이다. 그것이 오히려 그를 현장에 남아 있게 한다. 창우보다 일을 못하는 친구는 초장에 때려치우고 ‘싸나이’가 되겠다며 해병대에 입대한다. 그는 제대 후 어떤 사람이 돼 있을까. 그 싸나이는 행복할 것인가. 다른 한편, 일을 잘하기로 유명한 친구는 너무 일에 매진한 나머지 과로사하고 만다. “사람이 일하다 죽을 수 있는 줄 몰랐어.”
결국 일을 적당히 해낼 수 있는 이들만 현장에 남았다. 그렇다고 경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 사이에도 경쟁이 있고, 창우가 아닌 다른 친구가 정직원-대학-병역 루트를 타게 된다. 이렇게 창우가 자신이 희망했던 루트에서 낙오할 무렵,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다. 창우 대신 루트를 타게 된 친구가 근로감독관에게 안전장비가 부족한 현실을 알리고 만 것이다. 이런 내부고발자(?)는 직장에서 버티기 어렵다. 그 친구는 결국 그 공장을 그만두고 배달라이더가 된다. 그 결과 창우가 대신 그 귀한 정직원-대학-병역 루트를 타게 된다. 이것이 해피엔딩일까. 창우가 원하던 루트를 타게 됐다는 점에서는 그 가족에게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감을 누를 수 없었던 다른 동료의 희생에 기초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일을 겪고도 2층 하역장에는 추락방지 시설이 설치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것이 해피엔딩일까.
‘3학년 2학기’는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함으로써 독립영화치고는 제법 알려졌다. 그래서일까, 교육부 장관도 이 영화를 보고 소감을 남겼다. “직업계고 현장실습생의 성장을 담은 영화 ‘3학년 2학기’를 전국의 학생, 교원, 교육청 관계자와 함께 관람하고, 현장실습 제도 개선 방향을 함께 고민했습니다. 앞으로도 교육부는 현장실습이 배움의 장이 될 수 있도록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안전하고 내실 있는 운영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정부 고위 보직자가 이런 영화를 보고 개선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김승원 가족근무 조합, 金지역구로 옮긴뒤 8.8억 정부 지원”
- 50% 관세 넘고 공급망 잡는다, 현대제철-포스코 美제철소 첫삽
- 파병 두고 美-이란 사이 낀 韓… 트럼프, 우크라 지원 우회압박까지
- 직원 복지예산 깎은 추미애, 전세 12억 관사 논란
- 국힘 “좌파 카르텔 빌드업”… 용혜인 ‘언더 조직’ 의혹 총공세
- 자폐 아들 홀로 키운 ‘피터팬 아빠’ 전경철 작가 별세
- 이효리 남편 이상순, 신경계 이상으로 활동 일시 중단
- [천광암 칼럼]용혜인, 장관-의원 둘 다 내려놓으라
- [횡설수설/신광영]세계지도 작성법
- [단독]전공과목 떠난 필수의료 전문의, 23%가 정형외과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