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 걱정하던 두 청년의 우정 ‘한국환상곡’의 첫 선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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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16일 '신한민보'의 '비부학생 동정'에 한세광(흑구)과 안익태가 나란히 등장한다.
주말에는 한세광이 윌리 부부 집으로 놀러가 안익태의 방에서 하룻밤씩 묵곤 했다. 그렇게 봄날이 가는 5월의 토요일, 오늘 낮에는 꼭 와야 한다는 안익태의 전화를 한세광은 몇 번이나 받았다.
1930년 9월 도쿄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첫발을 디딘 안익태가 한인교회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때 동포들이 "대한국의 애국가를 작곡해 달라"며 선물한 만년필이었으니···. 그 만년필로 안익태는 1935년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가사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국민이 부르는 '애국가' 곡조를 오선지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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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하우스 목사의 음악예배 제안…윌리 부부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이어져
스토코브스키의 ‘러시아 환상곡’ 지휘 매료…‘한국환상곡’의 씨앗으로 움터

1933년 3월 16일 ‘신한민보’의 ‘비부학생 동정’에 한세광(흑구)과 안익태가 나란히 등장한다. ‘비부’는 필라델피아의 한자어다. ‘한세광 씨를 지방회의 회장으로 추천’하였고 ‘씬씨내티 음악학교에서 공부하던 안익태 씨가 템플대학 음악학과에 전학하고 커티스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짐바리스트의 지도를 받는 그는 친구에게 몇 번이나 고마워했다. “연주할 때 숨을 쉬는 방법과 음색 표현 방법에서도 곡을 따라서 무겁게 혹은 가볍게 또는 고상하게,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연주가의 생명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제 안익태에게 남은 문제는 ‘돈’이었다. 한세광의 백화점 점원 노릇만으로는 두 젊은이의 생계비 감당에도 빡빡했다. 하지만 안익태는 오직 첼로, 자나 깨나 음악이었다. 다림질도 요리도 한세광의 서비스였다. 도대체 음악밖에 모르는 예술가에게는 돈벌이 방법이 딱 하나였다. 음악 연주에 덤으로 돈이 붙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을 강구하러 한세광이 나섰다. 어느 저녁이었다. 그는 혼자서 미국 3대 교회당에 꼽히는 제10장로교회당 소속 교회의 반하우스(Barnhouse) 목사를 찾아갔다. 우리나라 경북 안동에 선교사를 보내 교회를 운영하는, 한승곤과 절친하여 한세광을 아들처럼 대해주는 목사였다. 그날 저녁에 받은 제안을 한흑구는 이렇게 옮겨놓는다.
“수요일 우리 교회 주일학교 애들이 예배 볼 때 음악 예배를 보기로 했으면 좋겠네. 학생들에게 한국 청년도 이렇게 음악을 잘한다는 것을 자랑해보세나. 미국에서 무보수라는 것은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얼마씩 생활비를 보태어 나가면 좋은 아이디어가 또 생기지 않겠나.”
이렇게 말하는 목사의 얼굴은 무척 명랑해 보였다. 나는 머리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한 군도 한국 애들에 대한 이야기, 한국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안 군은 삼십 분, 나는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할 터이니까 십 분쯤 될 거야.”
이러한 결과를 갖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안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안도 기뻐하며 기꺼이 찬성하였다.
안익태의 음악 예배는 첫 시간부터 대성공이었다. 반하우스 목사도 대만족이었다. 그의 30분과 한세광의 10분, 도합 40분 수고에 대한 보수도 좋았다. 두 사람의 한 주일 치 생계비였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목사가 예언한 ‘좋은 아이디어’가 출현했다. 어쩌면 하느님의 뜻이었을까.
“목사님께서 윌리(Willey)라는 늙은 부부에게 안 군을 소개했다. 윌리 부부는 어떤 회사에서 삼십 년이나 중역으로 일을 하다가 은퇴하고 넉넉한 재산과 보너스로 한가하게 지내는 부부였다. 슬하의 자식들도 다 분가해 살고 있었고, 두 늙은이만이 한적한 곳에 좋은 집을 가지고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윌리 부인은 스미스대학 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그래서 이 늙은 부부가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 대가가 되기를 꿈꾸는 안 군을 도와주기로 한 것이었다.”
‘어떤 회사’란 증권회사이고, 윌리의 본명은 해리 페블스(Harry. O. Peebles)였다. 안익태는 한흑구와 떨어져 윌리 부부의 집으로 옮겨간다.
<“목사님 덕분으로 넌 이제부턴 걱정없게 되었어. 자, 빨리 가게!”
이렇게 전송하는 나에게 그는 쓸쓸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없는 곳에 시집가는 처녀의 심정과 같네.”
안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 사람아, 내일이라도 만날 게 아닌가? 이젠 마음 놓고 공부나 열심히 하게. 나도 이젠 기쁘게 공부를 하겠네.”
이렇게 나는 안을 위로해 주었다. 사실 나도 그와 헤어지는 것이 한없이 쓸쓸하였으나 우리 형편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때부터 윌리 부부는 안익태의 유럽 진출을 포함한 성공 가도에서 부모와 같은 후원 역할을 맡아주게 된다. 주말에는 한세광이 윌리 부부 집으로 놀러가 안익태의 방에서 하룻밤씩 묵곤 했다. 두 노인은 그를 볼 때마다 자주 오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봄날이 가는 5월의 토요일, 오늘 낮에는 꼭 와야 한다는 안익태의 전화를 한세광은 몇 번이나 받았다. 그는 버스를 타고 점심시간이 지나서 도착했다. 세 사람이 잔뜩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먹었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케이크, 과일, 커피를 푸짐하게 내놓았다.

안익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엊저녁에 스토코브스키의 심포니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의 지휘자였다. 조선의 청년 음악인에게 충격적 자극과 감동을 선사한 연주는 러시아의 스물다섯 살 작곡가가 작곡했다는 ‘러시아 환상곡(Russia Fantasy)’이었다.(한흑구는 ‘예술가 안익태’에서 ‘광상곡’이라 했다.)
<“처음엔 러시아 제정시대의 한가로운 시대를 그렸는데, 느릿한 템포로 시작하고,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노래 같은 것도 나오고, 구루마 바퀴가 딸그닥거리는 소리도 나오고, 이러다가 제정이 부패하는 음탕한 음조로 차차 변해 가. 그러고는 러시아의 혁명인 듯 트럼펫 소리, 슬라이 트럼퍼가 마치 만세라도 외치는 듯이 굉장히 우렁찬 소리로 변해가네. 이때 지휘자 스토코브스키의 팔이 얼마나 빨리 휘도는지 열두어 개나 되는 것같이 쉴 새 없이 막 돌아가는 거야. 나도 지휘자가 되어볼 결심이야. 또한 ‘한국 광상곡’도 하나 작곡하고.”
안은 쉴 새 없이 이렇게 열심히 이야기를 해갔다. 상대자인 내가 어떻게 생각하거나 알 바 없다는 듯이 마치 중학생처럼 감상적이고 열정적인 이야기를 그냥 계속하였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나를 끌고 피아노 앞으로 갔다.
“자, 이 바통도 어제 저녁에 사왔어.”
그는 때 하나 묻지 않은 바통(지휘봉)을 피아노 위에서 들어서 내게 보이고는 다시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피아노를 꽝꽝 치기 시작하였다. 한참 치다가 피아노에서 두 손을 떼어 올리면서, “이것이 ‘코리아 판타지(Korea Fantasy)’의 프롤로그야.”
그는 이렇게 말하고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참 좋네! 훌륭하이. 꼭 하나 작곡해 보게.”
음악을 모르는 나이지만 어쨌든 그의 앰비션과 재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춘향전’에 나오는 것 같은 노래와 ‘도라지타령’, ‘천안 삼거리’, ‘노들강변’, ‘아리랑’ 또는 ‘수심가’ 같은 멜로디가 섞인 곡을 피아노가 깨지라 치고 있었다.
“대체로 아웃라인이 잡히기도 했는데, 한국 민요를 몰라서 큰 야단이야. 이건 모두 내가 들은 한국 민요를 내 멋대로 편곡한 것인데 꼭 그대로 할 필요는 없어도 줄거리는 잘 알아야 해. 한 군! 아무 곡이나 하나 해봐. 응? ‘도라지타령’을 한번 불러봐.”
그는 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청을 한다기보다는 강요하는 표정을 했다.>

윌리 부부의 전원주택에서 안익태는 최초로 한세광에게 ‘코리아 판타지’ 프롤로그를 피아노로 연주했다. 기필코 작곡을 완성할 의지와 영감도 강력히 피력했다. 그는 ‘한국 환상곡’ 탄생에 깃털 같은 도움이 될세라 친구의 청을 피하지 않았다. ‘회피할 자유는 없다’, 유대인의 그 말이 때마침 사과처럼 떨어진 장면 같았다.
<“어서! 아무 곡이나 좋아!”
“그럼 ‘양산도’를 한번 해보지.”
잘할 줄 모르는 노래지만 그의 작곡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양산도’를 숨이 차게 불렀다. 그는 머리를 끄덕끄덕하면서 한 손으로는 피아노의 키를 짚어가면서 멜로디의 피치를 암송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약 한 시간 동안 술 한 잔도 없는 피아노 앞에서 잘 부르거나 말거나 아는 노래는 모두 핏대를 올려서 불렀다.>



한흑구가 안익태를 회억하는 글에 언급하진 않았으나 ‘코리아 판타지’ 작곡에 사용한 그의 만년필은 애틋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1930년 9월 도쿄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 첫발을 디딘 안익태가 한인교회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때 동포들이 “대한국의 애국가를 작곡해 달라”며 선물한 만년필이었으니···. 그 만년필로 안익태는 1935년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가사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국민이 부르는 ‘애국가’ 곡조를 오선지에 올려놓는다.
어쩌면 친구의 ‘코리아 판타지’에서 ‘광상곡’을 얻었을까. 한흑구는 1933년 5월 25일 신한민보에 ‘1933년 광상곡’을 발표했다. 2연이다. ‘1933년!/그대는 굶주림을 가져왔고/강포한 힘을 가져왔나니/꽃 없는 만주 벌판에/봄이 왔는들 무엇하랴.’ 봄이 왔으나 꽃이 없는 만주 벌판···.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역을 지배하는 일본은 1933년 2월 국제연맹(UN)의 철병 요구를 거절한 데 이어 아예 성가신 잔소리에 귀를 닫듯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해 버렸던 것이다. /이대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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