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여행자] 보지 않고 알 수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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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어느 뜨거운 여름날, 이태원 골목길에 터를 잡고 살던 후배를 만났다. 시원한 맥주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불쑥 베트남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이야 다낭이나 푸꾸옥처럼 누구나 찾는 익숙한 여행지가 되었지만, 내가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패키지여행을 통하거나 아주 용감한 배낭여행자들이나 도전하는 나라였다.

소문과 경험 사이
"베트남 어때요?" 그 아이의 순진한 눈망울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느꼈던 베트남의 첫인상이 떠올랐다. "응, 좋아. 사람들 되게 착해. 쌀국수도 엄청 맛있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면 죄다 '사기당했다, 택시 조심해라, 오토바이 소매치기 위험하다' 같은 글뿐이잖아? 근데 막상 가보니까 난 왜 그런 글만 올라오는지 전혀 모르겠더라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다 보니 다시금 베트남에서의 시간이 떠올랐다.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도 바로 옆인 베트남에는 이상하게 발길이 닿지 않았다. 높은 습도와 사기꾼에 얽힌 소문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편견과 핑계를 쌓아온 탓이었다. 그렇게 가보지 못한 채 몇 해가 흘렀다.
변화는 우연히 찾아왔다. 치앙마이에서 요가를 하며 지내던 중 한국행 귀국편을 알아보는데 호치민을 경유하는 항공권이 가장 저렴했다. 이참에 호치민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보기로 했다. 소문 속 그곳을 직접 마주할 기회였다.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가보지도 않은 베트남에 대한 두려움이 슬금슬금 피어올랐다. 인터넷에 '베트남 여행'을 검색하면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일화들 때문이었다. 그렇게 걱정 속에 며칠을 보내다 드디어 호치민 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방콕에서 약 1시간 반이면 닿는 가벼운 비행이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색색의 택시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는 파란색 택시를 골라 타고 숙소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택시 기사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미터기 요금에 맞춰 거스름돈을 정확하게 건넸다. 호텔 프런트 직원들 역시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방은 깔끔했다.
오랫동안 채식을 해온 탓에 베트남 음식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다. 한국의 베트남 식당들은 대개 고기 육수 베이스의 쌀국수나 반미를 팔 뿐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는 따로 없었기에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동남아 국가에서 맛본 채식 쌀국수는 '이게 무슨 맛이지? 아무 맛도 안 나잖아' 싶을 만큼 밍밍해서 손이 가지 않기도 했다. 날도 더운데 차라리 시원한 주스나 샐러드가 낫지, 굳이 찾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호치민에서 우연히 한 채식 식당을 발견했다. 가장 만만해 보이는 쌀국수를 주문했고, 곧 마주한 내 인생 첫 베트남 채식 쌀국수는 '뭐야,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거야?'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맛이었다. 그동안 무시했던 쌀국수의 세계로 퐁당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평소 음식을 한 번에 두 개나 시키지 않는 편인데 그날따라 메뉴판을 보며 꽤나 갈등했다. 평생의 난제인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심정이었다. 호치민에 도착한 전날 밤, 저녁을 맥주와 땅콩으로 대충 때운 탓에 오전부터 무척 배가 고팠다. 어쨌든 처음 맛보는 베트남 음식인데 가장 흔한 메뉴인 '쌀국수'와 '스프링롤(춘권)'을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 '가격도 저렴하잖아'라며 얼른 자기합리화를 마친 뒤, 괜히 부끄러운 얼굴을 메뉴판 뒤로 감추고 쌀국수와 스프링롤을 모두 시켜버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베트남도 다른 동남아 국가들처럼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 요리인 '짜이(Chay)' 문화가 깊게 발달해 있다고 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채소와 콩고기가 든 쌀국수에 얼굴을 파묻고 먹고 있으니 곧이어 투명하고 정갈한 스프링롤과 땅콩소스가 놓였다. 맛있는 채수 국물에 쌀국수 면을 푹 담가 한입 먹고, 스프링롤을 땅콩소스에 듬뿍 찍어 베어 물었는데…. 진짜 멈출 수 없는 맛이었다.
하지만 욕심내서 두 개나 시킨 탓에 결국 배가 너무 불러 쌀국수는 조금 남길 수밖에 없었다. 남은 스프링롤 두 개는 포장을 부탁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날이 아주 더웠다. 도로에는 오토바이들이 무섭게 뒤엉켜 다녔고, 신호등이 없는 길을 도저히 혼자서는 건널 수가 없었다. 다행히 길을 건너는 현지인들을 발견해 슬쩍 그들 옆에 바짝 붙어 함께 건널 수 있었다.
도로 맞은편에 있는 큰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에어컨은 생각보다 시원하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과 가게 한쪽에 진열된 원두를 보니 왠지 커피가 맛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맛있는 쌀국수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나는 직원에게 꼭 베트남 전통 커피를 마셔보고 싶다고 말했다. 내 기대 섞인 목소리에 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자리로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커피잔 위에는 '핀(Phin)'이라고 불리는 작은 알루미늄 드립기가 얹혀 있었다. 종이 필터 없이 금속 구멍 사이로 진한 커피 원액이 한 방울, 한 방울 느리게 떨어지는 모습이 무척 신기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커피가 아주 천천히 떨어지는 동안 서두르지 않고 대화를 나누며 그 기다림 자체를 커피 문화로 즐긴다고 한다.
드디어 추출이 끝나고 핀을 내려놓았다. 잔을 들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어보니 커피는 깜짝 놀랄 만큼 진하고 달콤했다. 베트남 커피의 매력을 제대로 알게 된 순간이었다.

호치민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던 일주일 남짓한 시간. 그렇게 크고 없는 게 없다던 유명한 재래시장은 내게 그저 관광객을 위한 적당한 크기의 시장일 뿐이었고, 그렇게 멋있다던 메콩강은 황색 물이 드넓게 흐르는 뜨거운 강줄기였다. 프랑스 식민 시대의 아름답다는 건물들도 별 감흥 없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기꾼과 오토바이 소매치기, 여행자를 귀찮게 한다는 베트남의 악명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오토바이 행렬에 겁먹어 길을 건너지 못하는 나를 위해 기꺼이 곁을 내어주며 함께 길을 건너주었다. 게스트하우스 방이 생각보다 작다며 울상을 짓는 내게 다음 날 아무 조건 없이 큰방으로 바꿔주겠다며 오히려 미안해했고, 식당에서는 실수로 잘못 주문한 음식을 군말 없이 다시 바꿔주기도 했다.
길거리의 작은 목욕탕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시원한 커피를 마시는 그들은 언제나 발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뜨거운 더위에도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쌀국수를 들이켜는 사람들, 맥주잔에 얼음을 넣어 달그락 소리가 나도록 흔드는 사람들은 늘 웃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당당하면서도 사려 깊고 자존심 있는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베트남에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후 몇 번이나 다시 찾았다. 그곳에 가면 갈수록 그들의 미소가 가슴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도 늘 얼굴에 미소를 지으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글쓴이 최윤성 '망고 요가 트래블'의 1인 여행 기획자. 국내외 요가 여행을 진행하고, 틈틈이 산티아고 순례길 인솔을 한다. 겨울에는 인도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만들며 생활하는 여행자로 살고 있다.
하은정 기자 hah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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