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난 모세 [최주훈 목사의 명화 이야기]

최주훈 2026. 9. 5.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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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에서 언덕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면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San Pietro in Vincoli) 성당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묶었던 쇠사슬을 보관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지만, 오늘날 이 성당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 한가운데 앉아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입니다.

그의 번역인 불가타가 서방 교회의 표준 성경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실수가 1000년 동안 이어졌고, 그 때문에 유럽에서 모세는 오랫동안 머리에 뿔을 달고 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모세의 얼굴이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었지만, 히에로니무스보다 약 200년 앞선 유대인 번역자 아퀼라는 이 구절을 '뿔'의 이미지를 살려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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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모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모세(Mosè), 1513–1515년, 대리석(marble), 높이 235cm, 이탈리아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San Pietro in Vincoli).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공용

콜로세움에서 언덕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면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San Pietro in Vincoli) 성당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묶었던 쇠사슬을 보관하고 있어 붙은 이름이지만, 오늘날 이 성당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 한가운데 앉아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입니다. 분명 대리석인데 근육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고, 길게 늘어진 수염은 인물에게 엄숙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머리 위, 관자놀이 조금 위쪽에 작은 뿔 두 개가 돋아 있습니다.

여행 가이드를 따라갔다면, 대개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영어식 이름으로 '제롬'이라 불리는 4세기의 성서학자 히에로니무스가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다가 단어 하나를 잘못 읽었다는 겁니다. 그의 번역인 불가타가 서방 교회의 표준 성경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실수가 1000년 동안 이어졌고, 그 때문에 유럽에서 모세는 오랫동안 머리에 뿔을 달고 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딱 절반만 사실입니다.

빛인가 뿔인가

문제의 구절은 출애굽기 34장 29절입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을 두고 히브리어 성경은 '카란 오르 파나브'(קָרַן עוֹר פָּנָיוֹ·qāran ʿôr pānāyw)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말로는 보통 "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옮깁니다. 그런데 '빛나다'로 번역한 '카란'(קָרַן·qāran)은 '뿔'을 뜻하는 '케렌'(קֶרֶן·qeren)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빛과 뿔은 전혀 다른 것이지만 고대인의 언어 감각에는 둘을 이어 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뿔도 머리에서 밖으로 뻗고, 빛도 광원에서 밖으로 뻗어 나갑니다. 하박국 3장 4절이 좋은 예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님의 손에서 "광선"이 나온다고 번역하는데, 그 '광선'에 쓰인 히브리어가 바로 '케렌'(קֶרֶן·qeren), 곧 '뿔'입니다. 한마디로 '뿔처럼 뻗어 나오는 것'과 '빛처럼 뻗어 나오는 것'이라는 두 이미지가 한 단어 안에서 겹칩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면 히에로니무스가 히브리어를 몰라 엉뚱하게 번역했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어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모세의 얼굴이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었지만, 히에로니무스보다 약 200년 앞선 유대인 번역자 아퀼라는 이 구절을 '뿔'의 이미지를 살려 번역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 자신도 두 가지 해석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뿔이었을까요? 고대 근동에서 뿔은 힘과 권세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성경도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뿔"이라고 부릅니다(시 18:2).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중세 사람들이 모세의 뿔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우스꽝스러운 동물의 뿔만 생각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뿔은 하나님의 영광과 힘이 밖으로 솟아나는 모습을 표현하는 상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시대가 흐르면서 이 뿔이 유대인을 기괴하게 묘사하고 낙인찍는 데 이용되기도 했는데, 중요한 건, 상징은 언제나 한 가지 의미로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중세의 지식인들이 이런 언어의 사정을 전혀 몰랐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어떤 말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순간 원래의 뜻을 완벽하게 담아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켈란젤로가 모세의 머리에 새긴 뿔은 단순한 무지의 흔적이라기보다 하나의 해석에 가깝습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말과 형상으로 옮기려 했던 흔적 말입니다.

대리석을 천천히 봅시다

이제 조각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봅시다. 2미터 훌쩍 넘는 거대한 모세가 옥좌처럼 보이는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왼쪽에는 레아가, 오른쪽에는 라헬이 작은 감실 안에 서 있습니다. 두 여인은 조용합니다. 가운데 앉아 있는 모세는 온통 긴장으로 가득합니다. 오른쪽 다리는 뒤로 당겨져 있고 발뒤꿈치는 들려 있습니다. 왼쪽 다리는 앞으로 나와 있습니다. 편안하게 앉아 있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금방이라도 일어나려다 순간적으로 멈춘 사람처럼 보입니다. 옷자락은 무릎 위로 무겁게 흘러내리지만 그 아래 종아리 근육은 팽팽합니다. 차가운 대리석인데도 몸의 열기가 느껴질 정도입니다.

상체는 오른쪽으로 비틀려 있고, 오른팔 아래에는 두 돌판으로 된 십계명이 끼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돌판이 반듯하게 놓여 있지 않습니다. 아래로 미끄러져 거의 뒤집힐 듯 겨드랑이와 옆구리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습니다. 조금만 힘이 빠져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습니다.

수염을 봅시다. 굵은 밧줄 같기도 하고 피어오르는 연기 같기도 한 수염이 가슴까지 흘러내립니다. 그 사이로 오른손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수염을 손 전체로 움켜쥔 게 아닙니다. 검지 하나만 수염 속 깊이 들어가 있고 나머지 손가락은 겉에 얹혀 있습니다. 한가롭게 수염을 만지는 손이 아니라 무언가 급하게 움켜잡았다가 그대로 멈춘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비해, 왼손은 조용합니다. 무릎 위에 놓인 채 수염 끝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제 얼굴로 올라가 봅시다. 시선은 정면을 향하지 않습니다. 몸 바깥쪽 먼 곳을 향하면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 있는데, 우리를 보는 눈이 아닙니다. 우리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제 눈에는 무언가를 보고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벌떡 일어나 그 화를 쏟아 낼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자리에 남을 것인지 아직 결정 못 한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머리 위에 뿔이 있습니다. 아주 작아서 처음엔 이게 혹인지 아니면 뿔인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잘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거대한 몸과 긴장된 자세, 폭포처럼 쏟아지는 수염이 먼저 눈을 끌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보고 나서야 머리 위의 작은 뿔이 눈에 들어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 둘 것이 있습니다. 이 조각은 처음부터 지금처럼 가까이에서 보도록 만든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1505년 처음 계획된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은 40개가 넘는 조각이 들어가는 약 10미터 높이의 거대한 구조물이었고, 모세상은 그중 하나로 높은 곳에 놓일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아래에서 올려다보도록 만들어진 모세를 거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있는 셈입니다.

프로이트의 해석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 모세를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의 모세'라고 여겼습니다.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는 백성을 발견했고, 이제 곧 벌떡 일어나 십계명 돌판을 내던질 찰나라는 겁니다. 성경의 이야기와도 잘 맞습니다. 그런데 의사였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르게 보았습니다. 그는 1901년 처음 이 작품을 본 뒤 여러 해 동안 모세의 자세를 유심히 살폈는데, 특히 두 가지가 그의 눈에 걸렸습니다. 오른손의 검지가 수염 속에 어색하게 남아 있고, 십계명 돌판은 반듯하게 들려 있지 않은 채 아래로 미끄러져 있다는 점입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모세가 '막 화를 내려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치솟은 화를 가까스로 억누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백성의 배신을 보고는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가까스로 참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몸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팽팽하지만 여전히 앉아 있고, 분노가 얼굴에 남아 있지만 행동으로 터져 나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프로이트의 해석이지 미켈란젤로가 남긴 정답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뜨립니다(출 32:19). 하지만 프로이트의 해석이 흥미로운 이유는 같은 조각을 전혀 다르게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모세에게서 '폭발 직전의 분노'를 보았지만, 프로이트는 '분노를 붙잡는 힘'을 봅니다. 분노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분노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 그렇게 보고 나면 팽팽하게 긴장된 다리와 수염에 걸린 손가락, 굳게 다문 입도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질문

우리는 실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누군가 단어 하나를 잘못 번역했고, 그 실수 때문에 사람들이 1000년 동안 모세의 머리에 뿔을 달았다는 줄거리는 이야깃거리로 흥미롭고 드라마틱합니다. 잘못한 사람 하나를 찾아내는 게 통쾌하고, 그거 알아낸 게 뭔가 새로운 걸 알아낸 듯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의 뿔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공부하고, 제대로 알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우리는 어긋날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인간의 언어로 옮길 때마다 그 말로는 미처 담아내지 못한 무엇인가가 남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떤 사람은 '빛'으로, 어떤 사람은 '뿔처럼 뻗어 나오는 힘'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인간의 언어는 하나가 아닙니다.

예술 작품 하나를 두고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같은 모세를 보고 어떤 이는 곧 폭발할 분노의 인물로 보았고, 프로이트는 분노를 가까스로 붙잡는 사람으로 봅니다. 조각상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보는 눈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바울도 모세의 얼굴 이야기를 다시 꺼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그는 모세의 얼굴과 그 얼굴을 가린 수건에 대해 말합니다(고후 3:7-18). 빛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그 빛을 어떻게 보았느냐입니다. 어쩌면 모세의 뿔은 우리가 빛 위에 씌워 놓은 또 하나의 수건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비추신 빛과 내가 알아본 빛이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옳다고 확신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선의라고 믿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내가 이상하다고 여겼던 사람의 얼굴에, 내가 미처 알아보지 못한 하나님의 빛이 비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말할 용기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본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겸손도 필요합니다.

오늘 당신의 얼굴에도 무언가가 비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을 빛이 아니라 뿔로 보았다면, 그 어긋남은 과연 누구의 몫일까요?

최주훈 / 중앙루터교회, <뉴스앤조이> 이사장

최주훈 newsnjoy@newsnjoy.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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