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먹겠다고 달려들더니... 데이터센터도 ‘허수’ 있더라

이영빈 기자 2026. 9. 5. 08: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산업X파일] 각국 전력당국, 가짜 수요 걸러내기 고심
미국 버지니아주 라우던카운티에 있는 컴패스 데이터센터 캠퍼스. 캠퍼스 앞쪽으로 변전소와 송전선로가 보인다. 대형 데이터센터에는 대규모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송·변전 설비가 필요하다. /컴패스 데이터센터 홈페이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세계 주요국 전력 당국에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데이터센터 업체가 제출한 전력 공급 신청 가운데 ‘진짜’를 가려내는 일이다.

대형 데이터센터는 천문학적인 전력을 필요로 한다. 몇 곳만 들어서도 웬만한 도시 하나가 쓸 만큼의 전력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업체들이 내놓는 계획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는 점이다. AI 열풍으로 전력망에 여유가 사라지자, 업체들이 실제 투자를 확정하기도 전에 ‘자리 선점’부터 하고보기 때문이다. 한 사업자가 여러 후보지에 동시에 신청하거나, 한 부지를 놓고 여러 사업자가 각각 신청서를 내면서 가(假)수요가 부풀려지는 것이다. 센터가 완공된 뒤에 신청한 전력을 다 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세계 전력 당국의 고민이 시작된다. 데이터센터 업체들의 요청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수조원짜리 전력 인프라를 지었다가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면, 설비가 고스란히 남아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청을 깐깐하게 걸러내자니, AI 시대의 핵심인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

한국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는 지난달 20일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요 재전망에서 AI 데이터센터 투자 계획 20.8GW(기가와트) 가운데 1단계 10.8GW만 우선 반영하고, 나머지(10GW)는 다음 전기본으로 미뤘다. 이에 따라 2040년 데이터센터의 순증 최대전력 수요는 기존 4GW에서 11.9GW로 늘었다. 문제는 이 수요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다. 업계에서는 “허수가 많을 수 있는만큼, 더 꼼꼼하게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있는 에퀴닉스 데이터센터. 대형 데이터센터는 서버 운영과 냉각 등에 막대한 전력을 사용한다. /에퀴닉스·위키미디어 커먼스

◇영국은 보증금, 텍사스는 증명서, 캐나다는 등급제

세계 각국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허수 전력’을 솎아내고 있다. 영국의 에너지 규제기관 오프젬(Ofgem)은 데이터센터가 전력망 접속권을 얻을 때 일종의 ‘보증금’을 내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센터가 완공돼 전기를 쓰기 시작하면 돌려주지만, 중간에 사업을 접고 대기 줄에서 빠지면 돌려받지 못한다. 영국의 전력망 접속 신청이 2024년 11월 41GW에서 지난해 6월 125GW로, 7개월 만에 세 배 이상으로 불어난 데 따른 조치다.

미국 텍사스는 사업자가 스스로 증명하게 한다. 지난해 제정된 법에 따라 대형 전력 사용시설은 접속을 신청할 때, 같은 사업으로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전력 신청을 했는지 여부를 밝혀야 한다. 사업 부지를 실제로 소유하거나 임차하는 등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입증해야 한다. 전력망에 미칠 영향을 처음 검토받을 때는 최소 10만달러의 비용도 내야한다. 여러 곳에 일단 신청해 ‘자리’를 잡아두는 관행을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전력망 영향 심사’를 통해 신청서를 꼼꼼히 검증한다. 사업 계획이 확정된 경우 미래 수요에 100% 반영하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사업은 50%, 낮은 사업은 0%를 매긴다.

호주는 접속 신청이 44GW까지 불어나자 각 사업의 전력망 접속 여력, 부지 인허가 상황 등을 조사해 7.9GW만 남겼다. 예컨대 200MW(메가와트) 규모 데이터센터를 놓고 세 개발사가 각각 200MW를 신청한 경우, 600MW를 모두 수요로 잡는 대신 실제 사업으로 이어질 물량만 계산하는 식이다.

◇한국도 1차 선별했지만… “사업별 검증 더 필요”

한국도 데이터센터의 ‘허수’를 걸러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앞서 정부는 반도체 투자 계획은 ‘정책 의지’가 높다고 보고 전력 수요를 대부분 반영했지만, 데이터센터는 투자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해 수요를 1, 2단계로 나눴다. 12차 전기본 수요예측위원인 최용옥 중앙대 교수는 단계 구분에 대해 “지역 선정이 확정된 부분은 1단계로 반영했고, 지역 정보가 없는 곳은 2단계로 미뤘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지난 7월 충청권 2GW, 서남권 1GW, 강원권 2.4GW, 영남권 2GW 등 총 7.4GW가량의 데이터센터 신설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다만 권역이 정해졌더라도 실제 건설까지는 많은 절차가 남아 있어, 이를 확실한 전력 수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조상민 한국공학대 교수는 “1단계도 실제 투자로 이어질지는 검증이 필요하다”며 “해외처럼 부지 확보, 전력망 접속 절차 진행 정도 등 사업별 진척 상황을 기준으로 실현 가능성을 다시 평가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