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써오던 ‘자소서’의 종말... 기업들, 인성 대신 AI 역량 묻더라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라 성실함과 책임감을 배웠습니다.”
40년 넘게 대기업 지원자들의 자기소개서 첫 줄을 차지해 온 이런 유형의 문장이 올해 하반기 공채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성장 과정, 성격의 장단점, 지원 동기, 입사 후 포부를 차례로 묻던 자기소개서의 전형적인 틀이 불과 1년 새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신입사원 공채를 진행 중인 LG전자는 올해 자기소개서에 ‘데이터·AI 등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방법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든 경험을 기술하시오’라는 문항을 새로 넣었다. 지난해 제시됐던 ‘인생에서 직면한 어려운 과제와 이를 극복한 경험을 기술하시오’라는 문항은 사라졌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까지 팀워크 발휘, 도전 경험, 해시태그(#)를 활용한 자기소개 등 지원자의 인성과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600자(字) 문항을 지원 서류에 여럿 배치했다. 올해는 이를 모두 없애고 ‘AI를 활용한 프로젝트·공모전·논문·연구·문제 해결 경험 등을 작성하라’는 2000자짜리 실무형 문항으로 갈음했다. 총 5개였던 문항도 2개로 줄었다.
국내에 기업 공채 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1980년대 이후 40년 넘게 유지돼 온 전통적인 자기소개서의 문항들이 올해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다. 지원자의 성장 환경과 성품, 태도를 살피던 서사형 자기소개서가 자취를 감추고 ‘실제 무엇을 해냈는지 데이터와 성과로 증명하라’는 실증형 자기소개서가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증빙 가능한 경험’이 대세
업종을 불문하고 올해 하반기 주요 대기업 자소서의 공통분모는 인공지능(AI) 실무 역량과 검증 가능성이다. AI 혁명이 대기업 인사의 첫 출발인 자기소개서 문항부터 근본적으로 뒤바꿔 놓고 있는 것이다.
HD현대는 ‘학업 또는 일상에서 AI를 활용한 구체적 경험과 이를 지원 직무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묻는 문항을 신설했다. 오랫동안 지원자들의 가치관을 측정해온 ‘언제 가장 큰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은 사라졌다. ‘나에게 깊은 영감을 준 콘텐츠’ ‘호기심으로 몰입했던 경험’ 등 감성적인 문항으로 독창적 인재를 찾던 현대카드 역시 방향을 틀었다. ‘신기술과 새로운 프로세스로 문제를 해결해 기존 대비 어떤 차이를 만들었는가’를 묻는 성과 중심 문항을 제시하며 디지털·AI 문제 해결 능력을 요구했다.
보수적인 철강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포스코는 올해 공채에서 기본 자기소개서 항목을 아예 폐지하는 파격을 택했다. 대신 학내외 활동을 포트폴리오처럼 요약해 기술하도록 하면서 ‘증빙 가능한 활동만 작성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수료증, 연구 보고서, 데이터 결과물 등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글 자체를 쓸 수 없도록 시스템을 바꾼 것이다.
대기업들의 극적인 변화에 취업 준비생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에선 ‘새 자소서 문항에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는 질문과 한숨이 이어지고 있다. 역경의 서사를 다듬던 취준생들은 이제 AI로 무엇을 만들어 봤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AI가 촉발한 자소서의 종말
기업들이 수십 년간 고수해 온 자기소개서의 틀을 불과 1년 만에 갈아치운 배경은 ‘생성형 AI의 확산’이다. AI를 활용한 자기소개서 대필이 만연하면서, 그럴듯한 역경과 보람의 서사가 단 몇 초면 만들어지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형 문항들이 일제히 퇴출되고, 결과물이 확실한 프로젝트·공모전 수상 경력이나 AI를 실제로 어떻게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를 포함한 검증 가능한 질문이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동시에 평가의 중심 축을 서류 단계에서, 심층 면접이나 과제형 평가로 옮기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일례로 SK하이닉스는 자기소개서 문항 수를 축소하는 대신, 기존 20~30분이던 면접을 반나절 과제 수행형으로 대폭 확대했다.
AI 도구 활용 능력이 기업 구성원들의 핵심 역량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대기업 채용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 중요한 배경이다. 주요 대기업들은 사장단부터 말단 직원까지 전사적인 AI 교육을 통해 경쟁력 높이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입사 전에 이미 생성형 AI를 다양하게 다뤄본 인재를 직무 불문하고 우선 채용하겠다는 기업이 늘고 있는 것이다.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실제 업무 환경과 유사한 과제에서 AI를 활용해 본인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느냐가 취업의 핵심 키(key)”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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