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멋집’ 지도
[박준의 마음쓰기] (49)

가히 알고리즘의 시대다. 어느새 거대한 구덩이에 갇힌 듯하다. 스마트폰을 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뉴스와 당장 구매해야 할 것만 같은 상품이 쏟아진다. ‘반려견 마른기침 그냥 두지 마세요’ ‘밤잠 자주 깨던 습관이 사라졌어요’ ‘왜 우리 집에서는 식물이 잘 안 자랄까’ 등등의 요즘 내 머릿속에 가득한 고민까지. 이 중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게 바로 여행이나 미식(美食) 관련 게시물이다. 분명 시각과 미각이 내 삶, 감각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다.
피천득 작가는 맛은 감각적이지만 멋은 정서적이며, 맛은 현실적인 탓에 얕고 멋은 이상적이므로 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맛있는 것의 반대는 맛없는 것이고 멋있는 것의 반대는 멋없는 것이지 멋과 맛이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 나는 맛과 동시에 멋을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름 붙이면 나만의 ‘전국 멋집 지도’라고나 할까.
먼저 서울. 도봉산은 가을에 취하기 좋다. 환한 석산(石山)과 어우러지는 단풍에 한 번, 막걸리와 어우러지는 산 아래 식당에 또 한 번. 물론 폭포처럼 곧고 맑은 시 정신에 한껏 취할 수도 있다. 북한산 인근에는 ‘풀’의 시인 김수영을 기리는 문학관이 있다. 시인 김수영과 가장 첨예한 사이였던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 시인은 강원도 인제에서 만날 수 있다. 용대리의 황태와 향내 진한 산나물도 함께. 무엇보다 인제는 가장 이르게 가을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경북 안동을 품고 있는 ‘청포도’의 시인 이육사문학관과 충남 부여에서 금강과 함께 흐르는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문학관도 멋집 지도에서 빼놓을 수 없다. 늦가을이 되면 전남광주 벌교로 가야 한다. 꼬막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참꼬막과 새꼬막과 피꼬막의 차이를 나는 벌교에서 알았다. 꼬막 식당이 늘어진 거리 인근에는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기념하는 문학관이 있다. 나는 ‘태백산맥’을 통해 우리 현대사를 다시 알았다. 많은 이들이 그러했으리라.
얼마 전에는 전북 남원에 다녀왔다. 먼저 광한루에 들렀다. 워크숍이나 단체 여행으로 여러 번 가봤던 곳이라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지 않고 바라본 광한루의 모습은 새로웠다. 황희 정승과 송강 정철이 이곳을 사랑한 까닭도 어쩌면 조금 이해하게 됐다. 시내에 있는 시립미술관에도 들렀고 이튿날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혼불문학관에도 다녀왔다. 소설가 최명희의 ‘혼불’은 현실 사회의 억압이 공동체와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이런 변화에도 인간이 잃지 않아야 하는 게 무엇인지 일러주는 대작이다.
벌교에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이 우뚝 서 있고, 경남 하동에 박경리 작가의 ‘토지’가 살아 숨 쉬고 있다면, 남원 땅에는 여전히 ‘혼불’이 빛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내가 200자 원고지 약 1만 6000장 분량의 ‘태백산맥’과 약 4 만장 분량의 ‘토지’와 1만 2000장 분량의 ‘혼불’을 읽었던 것은 20대 초반 젊은 나이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중간중간 건너뛰며 읽은 부분도 많다.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소유하던 시절이었다.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아 두려운 미래 앞에서 가만가만 나를 살피던 때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도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요즘의 나는 자꾸만 남의 눈을 살피기에 급급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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