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던진다, 고로 존재한다

정상혁 기자 2026. 9. 5. 00: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정상혁 기자의 행각]
마침내 프로 선수의 꿈 이뤄낸
한국 여자 야구 에이스 김라경
미국 여자 프로 야구 리그 무대에서 역투하고 있는 투수 김라경. “이곳 선수들은 하나같이 힘이 장사”라고 말했다. “리그 흥행을 위해 홈런을 많이 유도하려고 담장도 앞으로 당겨놨어요. 투수는 힘들지만 보는 재미는 더 커졌을 거예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역사가 시작되려면 누군가 첫 공을 던져야 한다.

김라경(26)이 마운드에 올랐다. 지난달 1일(현지 시각)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로빈 로버츠 스타디움의 모든 시선이 한국에서 온 선발 투수의 손끝에 모였다. 72년 만에 부활한 세계 유일의 여자 프로 야구 리그(WPBL) 개막전.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은 채 김라경이 신중히 다리를 들어 올렸다. 어깨를 돌려 힘껏 공을 뿌렸다. 헛스윙, 스트라이크. 정적이 깨졌다. 감격에 젖은 관중들은 기립해 환호했다. 그 순간, 심판이 두 손을 흔들며 경기를 중단시키고는 김라경에게 뛰어왔다.

–무슨 상황이었나요?

“저도 어리둥절했어요. 공을 달라고 하더니 어디론가 가져가더라고요.”

김라경의 손을 떠난 그 공은 즉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세계 야구사(史)의 결정적 한 장면으로 남게 된 것이다. 공은 불과 18m 남짓 날아갔을 뿐이지만, 그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평생이 필요했다. 김라경은 “꿈을 위해 정말 죽어라 뛰었다”면서도 “그 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꿈이었다”고 말했다.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돈 받고 뛰는 진짜 프로요. 실체 없는 꿈을 좇는 제 모습이 한심할 때도 많았어요. 오기로 버텼던 것 같아요. 길이 없어? 그럼 뚫어줄게.”

◇이뤄질 수 없는 꿈을 꿨다

못 말리는 야구 사랑. 초등학교 입학 무렵, 유아용으로 주문 제작한 친오빠의 휘문중 유니폼을 입고 있다. /김라경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 프로 야구 1000만 관중 시대가 이미 무르익었으나, 여자에게는 딴 세상 얘기다. 국내 여자 야구의 경우 독립된 리그 자체가 없다. 엘리트 육성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다 보니, 동호회 형태의 사회인 야구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게 현실. 고교 야구부조차 없어 여중생 꿈나무들은 진로 앞에서 무참히 꿈을 꺾는다. “축구·배구·농구·골프 다 있는데 왜 야구만 없을까….” 김라경이 걸어온 길이 곧 한국 여자 야구의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고난의 역사였다. WPBL ‘뉴욕 하이츠’에 지명돼 올해 비로소 프로의 세계에 진입하기까지 15년 가까이 걸렸다. 재능은 재앙과 같았다. 포기할 수도 없었다. “너무 좋았으니까요.”

–어쩌다 야구를 하게 됐나요?

“친오빠(김병근)가 야구 선수예요. 부모님 따라서 오빠 시합을 보러 자주 갔어요. 운동장에서 캐치볼도 하고, 자연스레 야구랑 친해졌죠. 다섯 살 때부터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로 야구 유니폼 달라고 빌었을 정도로요. 오빠가 한화 이글스에 투수로 입단하면서 서울에서 충남 계룡으로 이사했는데요, 날짜도 안 까먹어요, 이사 온 바로 다음 날 계룡시 리틀 야구단에 등록하러 갔어요.”

흔히 ‘최초의 소녀’로 불려왔다. 2012년 초등학교 6학년 때 본격적으로 야구에 입문한 이래 모든 기록의 맨 앞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왔기 때문이다. 언제나 홍일점이었고 언제나 에이스였다. 중학교 재학 당시 이미 구속이 시속 110㎞를 넘겼고, 2015년에는 한국 리틀 야구 사상 처음 홈런(비거리 85m)을 기록한 여자 선수로 기록됐다. 투타에 모두 능한 이도류(二刀流), ‘여자 오타니’의 탄생에 야구계는 들썩였다.

–홈런 칠 때 느낌이 어땠어요?

“방망이에 아무 느낌이 없었어요. 잘 맞으면 오히려 ‘맞았나?’ 싶을 정도로 손에 울림이 없어요.”

그해 여자 야구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1선발로 출전해 국제 경기 준우승도 수확했다. 그러나 더 뻗어나갈 데가 없었다. 여자 선수의 리틀 야구 경기 출전 나이 제한을 중1에서 중3으로 연장하는 ‘김라경 특별법’이 통과돼 어찌어찌 중학교까지는 야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고등학교였다. “여자가 뛸 수 있는 야구부가 없거든요.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했나요?

“방황했죠. 일단 사회인 여자 야구팀에 입단했어요. 제가 뛸 수 있는 곳은 거기뿐이었어요. 조금이라도 전문적인 팀을 찾아보다가 ‘서울 후라(HURRAH)’ 팀으로 들어갔죠. 왕복 6시간 거리였는데, 주말에 엄마랑 차 타고 가서 1박 2일 훈련하고 잠은 모텔에서 자고…. 국가대표 훈련장에 선동열 감독님이 재능 기부로 오신 적이 있는데 ‘너는 일본으로 가야 된다’면서 팀을 알아봐 주시기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저는 한국에서 승부를 보고 싶었어요.”

◇야구 하려고 서울대에 갔다

2016년 부산에서 열린 여자 야구 월드컵 당시 국가대표로 출전한 김라경. /조선일보DB

승부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면서 개인 훈련 스케줄을 소화했다. 몸보다 마음이 고됐다. 부모님의 반대가 거셌다. 어느 부모도 막연한 미래에 전력투구하는 자녀를 마냥 응원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 야구랑 여자 야구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환경이랄 게 정말 아무것도 없고, 잘될 거라는 보장도 당연히 없고…. 반대하시는 게 이해는 됐어요. 그러다 우연히 방법을 찾았죠.”

–무슨 방법이요?

“서울대에 가는 거요.”

2016년 여자 야구 월드컵 출전 당시, 대표팀을 맡고 있던 고(故) 이광환 감독이 서울대 야구부 감독을 겸하고 있었다. 대표팀과 서울대 야구부의 연습 게임을 주선한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이었다. 김라경은 “서울대 야구부의 존재를 그때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체육 특기자 전형이 없다 보니 공부로 입학한 학생들이 대학 리그에서 뛰더라고요. 심장이 막 뛰었어요. 서울대에 가면 여자인 나도 출전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학업 성적이 좋았나요?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죠. 중학교 때까지는 중하위권이었어요. 목표가 생겼으니 열심히 했어요. 처음 반에서 1등을 했죠. 근데 고2 때 경기도 남양주로 이사 가면서 성적이 좀 떨어졌어요. 잠을 줄였어요. 하루에 3~4시간만 잔 것 같아요. 훈련하러 다니는 차 안에서 영어 단어 외우고….” 그렇게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며 2018년 출전한 여자 야구 월드컵에서는 탈삼진 19개를 잡아내 삼진왕에 올랐다.

–선수 경력은 입시에 도움이 안 되나요?

“여자 야구는 해당 사항이 없어요. 전국 체전 종목도 아니고, 제아무리 국가대표여도 대학 가려면 공부만이 살길이었죠.”

착실히 내신을 관리해 수시 일반 전형으로 서울대에 지원했다. 1차에는 합격했으나 2차 면접 날, 황당한 실수를 했다. “시험 보는 건물을 착각해서 5분 지각을 했어요. 입장 불가. 부모님은 주저앉아 대성통곡하셨죠.” 후순위로 지망했던 경희대에 입학했다. “경희대에도 캠퍼스 안에 야구장이 있거든요. 야구부 감독님께 부탁을 드렸어요. 같이 연습만 하게 해달라고.” 훈련은 가능해도 선수가 될 수는 없었다. 여자였기 때문이다. 재수를 택했고, 결국 서울대 체육교육과 20학번이 됐다. 한국 대학 야구 리그에 최초의 여자 선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남자들과 겨뤄보니 어땠나요?

“걱정을 정말 많이 했어요. 이 많은 프로 지망생을 상대로 내가 1이닝이라도 버틸 수 있을까? 1구 1구가 너무 무서웠어요. 홈런도 많이 맞았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자신감이 붙었어요. 가끔 욕하는 선수도 있었어요. 삼진당하면 방망이를 땅에 찧으면서 씨×! 너무 기분 좋았어요. 최고의 찬사잖아요. 분하다는 건 저를 진심으로 상대했다는 거잖아요. 그게 너무 감사했어요.”

◇‘접골원’으로 출근한 천재 투수

일본 여자 실업 야구팀 세이부 라이온즈 레이디스에서 투수로 뛰던 당시의 김라경. /세이부 라이온즈 레이디스

말하자면 김라경은 쉼 없이 비포장도로를 포장하며 달려왔다. 그러나 또다시 막다른 골목이 그를 기다렸다. “대학 졸업하면 뭐 하지?”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늘 ‘다음’이 없었어요. 세계 대회도 나가고, 서울대도 가고,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쓴 것 같은데 길은 계속 안 보이고….”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택했다. 본인의 투구 동작 등을 셀프 영상으로 제작해 무작정 일본 실업 여자 야구팀으로 보냈다. 물류 회사 아사히산업이 운영하는 ‘아사히 트러스트’ 팀에서 러브콜이 왔다.

–왜 일본이었나요?

“야구 선진국이잖아요. 방망이도 야무지고 되게 세밀한 야구를 해요. 프로 구단 산하에 여자 팀도 있고요. 무엇보다 ‘여자가 왜 야구를 해?’라는 질문에 긴 해명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에요. 한국에서는 언제나 넘치는 의욕을 드러내야 했고, 의욕을 인정받지 못하면 결과를 위한 과정조차 보장이 안 됐어요. 야구가 당연한 곳에서 배워보고 싶었어요. 보여주고도 싶었고요.”

–승부수를 던졌군요.

“근데 너무 힘이 들어갔어요.”

2022년 6월, 첫 연습 경기에서 첫 공을 던진 순간 김라경은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선수로서 직감이 왔어요. 끝났다. 팔에서 드드득, 옷이 찢어질 때 나는 소리가 났거든요.” 일본 현지 병원에서는 예상 외로 단순 골절 진단을 내렸다. “다행이긴 한데, 오자마자 부상을 입었으니…. 한여름에 깁스한 채로 훈련했어요. 근손실 오면 안 되잖아요. 팀에 민폐가 될까 봐 무리를 했죠. 나중엔 피부병까지 생겨서 두 배로 힘들었어요.” 석 달 뒤 깁스를 풀었지만 팔은 예전 같지 않았다. 한국에서 정밀 진찰을 받았다.

–결과가 어땠나요?

“오른쪽 팔꿈치 인대 완전 파열. ‘토미 존’ 부상이라고 하죠. 아, 이제는 인대도 없고 버틸 힘도 없다….”

팔꿈치에 남은 토미 존 수술 자국. 영광의 훈장으로 남았다.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라경

궁지에 몰렸다. 부모님의 한 줌 지지도 사라졌다. “만약 인기 종목을 했더라면 이 순간이 조금은 덜 쓰라렸을까?” 회복에만 전념해야 할 순간에도 도저히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응원단이 출현했다. “몸 상태 관련해 종종 자문을 구하곤 하던 이제형 원장님(두산 베어스 팀 닥터)이 무료로 수술을 해주셨어요. 토미 존 수술 받는 여자 선수는 제가 처음이니까 궁금하다면서….” 스포츠 의학 전문가 김병곤·박상욱·송찬오 트레이너는 재활을 도왔다. 혼자가 아니었으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차라리 한 번 더 끊어져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응원단은 “끊어지면 또 고쳐주겠다”고 했다.

–은인이 많았네요.

“특히 친오빠가 정말 큰 힘이 돼줬어요. 언제나 일편단심 저를 야구 선수로 바라봐줘요. 오빠도 수술을 네 번 받았거든요. 저 수술실 들어갈 때 그랬어요. 좀 아프긴 해도 ‘새삥’으로 갈아 끼우고 다시 시작해보자고.” 김라경은 한결같이 등번호 ‘29’를 달고 뛴다. 오빠 김병근의 프로 데뷔 당시 등번호다.

근육을 키워 부상 전보다 체중을 8㎏ 늘렸다. 2년 6개월간의 재활, 파괴력을 올려 다시 일본 무대를 두드렸다. 결국 지난해 명문팀 ‘세이부 라이온즈 레이디스’와 계약을 맺었다. 다만 다시 시작일 뿐이었다. 창고를 겸하는 숙소 건물에서 먹고 자며 “눈물 나는 타지 생활”을 이어갔다. “실업팀이다 보니 평일에는 부품 회사라든가 라멘집 같은 구단 스폰서에서 근무하고 주말에 시합을 뛰는 식이에요. 저는 접골원(接骨院)을 택했죠.”

–왜 접골원이었나요?

“최대한 말을 많이 하는 곳을 원했어요. 소통 능력을 키우려고요. 거동 불편하신 분들 말동무 해주고, 체조 돕고, 청소도 해가면서 월 70만원 정도 벌었어요. 입에 풀칠할 정도만 일하려고 했어요.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요. 저는 야구 선수니까요.”

–그 정도로 야구가 재밌어요?

“투수한테는 통제권이 있잖아요. 타자는 공을 기다리고, 제가 던져야 사건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던진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죠. 그 긴장감이 진짜 미쳐요.”

◇편견 같은 건 날려 버린다

뉴욕 하이츠 소속 김라경 선수가 관중의 환호 속에 힘차게 마운드로 뛰어가고 있다. /WPBL

김라경과 화상 인터뷰를 진행한 건 지난주 금요일 팀 훈련 직후였다. “한국 팬들에게 손 편지도 받았다”며 “유튜브 중계 댓글 창에 한글이 보이면 그게 욕이어도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올해 개막한 WPBL은 이제 달라진 세상을 웅변한다. 남자 선수들이 전쟁에 차출되자 그 대안으로 출범한 ‘전미 여자 프로 야구 리그’(1943~1955) 당시만 해도 선수들은 치마를 입고 뛰었다. 이번에 창설된 WPBL 4개 구단은 팀 명칭부터 여권 신장과 관련이 깊다. 이를테면 김라경이 소속된 ‘뉴욕 하이츠’는 흑인 여성 사회 운동가 도로시 하이트(Height)의 이름에서 따왔다. 고지(高地)를 뜻하는 이름, 그곳을 기어이 올라왔다.

–과정이 험난했습니다.

“프로가 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작년 말 트라이아웃(선수 선발 테스트)에 참가했어요. 지원자가 600명 정도 됐는데 ‘오징어게임’처럼 3일에 걸쳐 10분의 1을 걸러냈죠. 지명 당일 제 이름이 딱 불리는데, 와…. 저 정말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거든요.”

–처우는 어때요?

“팀당 연봉 총액이 9만5000달러로 제한되다 보니, 개인이 받는 돈은 1000만원이 채 안 돼요. 상징적인 수준이죠. 그래도 여기는 야구가 곧 ‘일’이 되는 곳이에요. 시합은 딱 두 달만 열리고, 여전히 미래는 불안정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야구 선수로 살 수 있는 거죠. 연고지가 나뉘어 있어도 모든 선수가 하나의 숙소에 묵고, 하나의 연습장을 사용하고, 셔틀버스도 공유해요. 경쟁자라기보다 다 같은 동료처럼 느껴져요.”

올해 WPBL에 진출한 한국 선수는 김라경을 포함해 김현아(보스턴·포수)와 박주아(샌프란시스코·내야수)까지 모두 세 명이다. 여자 야구 불모지에서는 믿기 힘든 성과지만 고민은 현재 진행형. “저희 세 선수 모두 같은 마음이에요. 한국 돌아가면 어떻게 하지? 올해 딱 한 시즌만 계약한 상태고,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들은 바가 없어요. 그래도 일단 올해 최선을 다해야죠.”

야구를 위한 일상의 9할은 고통”이라고 했다. 그래도 “언니 덕에 야구 시작했다”는 소녀들의 목소리에 초심을 다잡는다. /플리커

–여자 야구, 지속 가능할까요?

“2021년에 ‘JDB(Just Do Baseball) 여자 외인 구단’을 창단한 적이 있어요. 선수를 꿈꾸는 어린 후배들 모아서 ‘우리도 야구하고 있어요’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방팔방 뛰면서 유니폼 제작하고, 연습장 대여하고…. 탈모가 올 정도였어요. 정기적으로 경기할 수 있는 연고지를 마련하려고 지자체 30~40곳에 제안서를 돌렸어요. 결국 안 됐죠. 슬프지만 제 능력을 확인했어요. 먼저 선수로 우뚝 서자. 그렇게라도 앞길을 열어주자.”

–후배들이 늘었나요?

“얼마 전에 열두 살 최서윤 선수가 유소년 국가대표 발탁됐다고 연락이 왔어요. 하나둘 스스로 커가는 게 너무 대견해요. 버티고 버티다 보니 어떻게 막바지에 조금 길이 열리기는 했는데…. 부모님이 고민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계속 야구 시켜도 될까요?’ 물어보시는데, 쉽게 대답할 수가 없는 거예요.”

–뭐라고 대답했어요?

“아직은 어리고 이렇게 좋아하니 조금만 지켜봐 주세요. 저도 열심히 해볼 테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인 것 같아요. 행복은 결코 포기의 영역이 아니라는 거.”

지난달 30일 김라경은 샌프란시스코와의 경기에 선발 투수로 출전했다. 가장 큰 위기는 3회에 왔다. 박주아 선수와의 승부에서 초구 몸에 맞는 볼을 내주는 바람에 1아웃 만루 위기에 몰린 것이다. 김라경은 “위기에 처하고 그걸 잘 모면하는 게 야구의 가장 큰 재미”라고 말했다. 이후 땅볼 아웃을 유도하고, 후속 타자는 삼진으로 잡아낸 뒤 팀이 2점 앞선 상태에서 김라경은 마운드를 내려왔다. 아쉽게 팀은 마지막 회에 만루 홈런을 맞고 역전패했다. 늘 이길 수는 없다. 그것이 야구다. “이런 말을 해도 될 나이인지는 모르겠는데, 야구는 정말 세상의 축소판 같아요.” 경기 시작 전 그는 항상 운동장 흙바닥에 ‘스마일’을 그려 넣는다.

–기도하는 건가요?

“웃으면 복이 온다잖아요.”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