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로 걸을 수 있으니 찍을 수 있다”

유선희 기자 2026. 9. 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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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으니 찍을 수 있다."

2026년 구순을 맞은 일본의 사진 거장 구와바라 시세이 작가는 아직도 현장에 취재를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1964년 일본 한 잡지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뒤 무려 100여 차례나 한국을 찾은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 한 해 전인 1964년 서울대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낡은 판잣집이 빼곡히 들어찬 청계천, 동두천 미군기지촌,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등 한국의 굵직한 역사적 현장을 사진에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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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 60년간 10만 컷에 담아 “통일 한반도 오가는 한국인들 찍는 게 마지막 미션”…구순 보도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삶 담은 다큐 ‘사진의 얼굴’
일본 보도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씨가 인터뷰를 위해 2026년 8월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아직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으니 찍을 수 있다.”

2026년 구순을 맞은 일본의 사진 거장 구와바라 시세이 작가는 아직도 현장에 취재를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1962년 최초로 미나마타병의 참상을 사진으로 알리며 명성을 얻은 그는 아직도 미나마타병 희생자 위령제가 열리는 5월이면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를 찾아 유족들을 만나고 사진을 찍는다. “사회에 대한 관찰력과 현장을 향한 끊임없는 욕심”이 노구를 일으킨다고 했다.

그는 일본의 어느 작가보다 한국을 많이 찍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평생 찍은 100만 컷의 사진 가운데 10만 컷 정도가 한국에 관한 기록이다. 2026년 9월2일 개봉한 다큐멘터리영화 ‘사진의 얼굴’(감독 고희영)은 그의 작가 인생을 돌아본 작품이다. 개봉에 맞춰 방한한 구와바라 작가를 8월2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여전히 커다란 카메라를 어깨에 멘 채였다.

구와바라 시세이 작가가 찍은 ‘무언의 데모’(1965)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 당시 빗속에서 묵묵히 걸어가는 학생들 모습을 담았다. 숨비 제공

청계천에 매료된 일본 신예 사진작가

1964년 일본 한 잡지 특파원 자격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뒤 무려 100여 차례나 한국을 찾은 그는 한-일 국교 정상화 한 해 전인 1964년 서울대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시작으로 낡은 판잣집이 빼곡히 들어찬 청계천, 동두천 미군기지촌,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등 한국의 굵직한 역사적 현장을 사진에 담아왔다. 2024년엔 대통령 탄핵 찬반 시위 현장도 찍었다.

한국에 대한 이런 관심은 그의 고향이 한반도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시마네현이었기에 시작됐다. 그가 중학생일 때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이 고향 동네에 여럿 있었다. “온돌방을 보고 특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 한국말도 (나쁜 말 포함해) 10여 개 배웠다.(웃음) 미나마타병 취재로 일본사진비평가협회 신인상을 받아 데뷔했을 때 다들 다음 작업물이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한국을 테마로 찍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애착을 느낀 현장은 ‘청계천’이었다. 1965년 한국에 왔을 때 전쟁 피란민들이 청계천에 그대로 정착해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 동료 사진작가들이 ‘그렇게 초라하고 남루한 사진은 찍지 말라’고 말렸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촌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청계천이 내가 묵었던 호텔과 가까워 매일 아침 갔다. 주민들과 친해져 차도 마시고 담소도 나눴다. 거기엔 ‘삶’과 ‘행복’이 있었다.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나를 말렸던 사람들이 청계천이 복개되자 ‘옛날 풍경을 잘 찍어 남겨둬 다행’이라고 했다.(웃음) 60년이 지난 지금, 청계천은 한국의 다이내믹한 경제발전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판잣집이 빼곡했던 그곳은 이제 빌딩숲이 됐다. 볼 때마다 놀랍다.”

구와바라 시세이 작가가 찍은 한국의 1960년대 청계천 사진. 숨비 제공

렌즈에 못 담아 후회로 남은 5·18

10만 컷이라는 방대한 한국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하기) 매우 어렵다”면서도 베트남전 파병 때 맹호부대 한 장병이 어머니와 헤어지는 장면을 찍은 컷을 꼽았다. “어머니가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장면이다. 망원렌즈로 찍은 터라 대화 내용을 못 들었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살아서 돌아와라’였을 거다. 열 번 정도 셔터를 눌렀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외신기자라 정권에 예민한 역사의 현장을 담아내는 데 수월한 면도 분명 있었지만, 일본인인 까닭에 ‘이유 없는 욕설’도 많이 들었다. ‘쪽바리’ ‘개새끼’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단지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사진의 힘”을 믿으며 버텼다. 남한에선 추방되기도 했고, 북한에선 입국금지 조처를 당하기도 했지만, 한국을 향한 앵글을 돌리지 않은 이유다.

방대한 분량의 한국 사진을 찍었음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그가 놓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이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1980년 5월18일 한국에 있었기에 더 아쉬웠다. “당시 경북 문경에서 한국 도자기와 도공 사진에 전념하고 있었다. 아내가 일본에서 전화해 ‘큰일이 났으니 절대 전라도 광주엔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제야 광주로 들어갈 길을 찾았지만, 이미 다 막혀 있었다. 나중에 다른 기자들이 찍은 광주 사진을 보고 매우 놀랐다. 저널리스트로서 패배감을 느꼈고 회한이 남았다. 그리고 일생의 깨달음도 얻었다. 사진은 영화와 달리 현실의 그 순간을 찍어야 하기에 현장에 없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그는 구순의 나이에도 아직 한국을 테마로 한 사진을 꿈꾼다. 그가 ‘한국 사진의 완성’으로 꼽은 것은 ‘남북통일’이다. “젊었을 때부터 남북한이 통일됐을 때, 한반도 사람들이 자유로이 왕래하는 사진을 찍는 것이 마지막 미션이 되리라 생각했다. 독일도 베트남도 통일됐지만 한국은 여전히 분단국가다. 한국의 경제적 풍요로움과 북한의 사상 강화 등을 생각하면 내 살아생전 통일이 될까 싶어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을 듯싶다.”

일본 보도사진의 거장 구와바라 시세이 작가가 인터뷰를 위해 2026년 8월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았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물풀 같은 인생의 버팀목, 한국인 아내

구와바라 작가는 자신이 카메라를 들고 한국, 베트남, 캄보디아, 구소련 등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 혼자 묵묵히 가정을 지킨 아내 최화자씨에 대한 미안함을 여러 번 표현했다. 한곳에 소속되지 않고 늘 프리랜서로 일한 탓에 ‘취재의 자유’를 얻었지만, 일정한 수입은 보장받지 못했다. “아직도 도쿄에서 월세를 산다.(웃음) 평생을 물 위에 떠 있는 물풀 같은 인생을 살아 가장으로서 역할을 못했다. 1969년 취재하러 한국에 왔다가 일본어 통역으로 만나 이듬해 결혼한 아내가 혼자 고생이 막심했다. 내 작업물 지분의 5할은 아내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3년여간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내레이션을 넣는 작업이 제일 힘들었다는 구와바라 작가. “24개의 내레이션이 있었는데, 찍고 또 찍고…. ‘아이고 죽겠다’는 한국말이 절로 나왔다.(웃음) 내가 배우도 아니고.”

엄살을 부리면서도 영화가 개봉한다니 한껏 기대감을 나타냈다. “내 사진은 격동의 시대를 거친 한국에 대한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래도 작은 기록을 남길 수 있어 뿌듯하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이 영화에 어떻게 반응해줄지 설렌다.”

구와바라 작가는 인터뷰 내내 영화 개봉 기념으로 받은 굿즈인 일회용 카메라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손에 들자 아흔 살 작가는 마치 아홉 살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는 “어린 시절 한쪽 눈을 다쳐 실명했지만, 카메라는 다른 쪽 눈으로 초점을 맞추고 뷰파인더를 보면 되니 찍을 수 있었다. 다리가 시원치 않아 몇 년이나 더 찍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아직도 뭐든 찍고 싶은 본능이 동한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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