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풍수지리] “죽어서도 조선을 지키겠다”는 김산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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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봉대산 자락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김산수 장군과 그의 아들 김득복 장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봉대산은 기장의 대표적인 호국 유적지로 알려진 김산수, 김득복 장군 묘의 주산(主山·뒷산)이며, 기장의 봉수대는 남한 지역에서 확인된 봉수대 유적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규모이다.
봉대산에서 뻗어 나온 두툼한 용맥(龍脈·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이 남동진을 거듭하며 전진하다가 서서히 몸을 낮추어 자리를 잡은 곳에 김산수, 김득복 장군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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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봉대산 자락에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김산수 장군과 그의 아들 김득복 장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봉대산 지명은 산 정상에 횃불과 연기로 변방의 긴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수대(烽燧臺)가 설치되어 있던 것에서 유래했다. 봉대산은 기장의 대표적인 호국 유적지로 알려진 김산수, 김득복 장군 묘의 주산(主山·뒷산)이며, 기장의 봉수대는 남한 지역에서 확인된 봉수대 유적 중 가장 오래되고 큰 규모이다. 김산수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기장 지역에서 김득복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기장·동래 지역뿐만 아니라 경주, 울산 등 경상도 주요 요충지로 이동하며 왜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김산수 장군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울산 학성 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봉대산에서 뻗어 나온 두툼한 용맥(龍脈·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이 남동진을 거듭하며 전진하다가 서서히 몸을 낮추어 자리를 잡은 곳에 김산수, 김득복 장군의 묘가 있다. 묘역의 배치를 보면 상단에 김산수 장군과 정부인인 학성 이씨 부부 합장묘가 있고, 중단에는 현풍 곽씨(김득복 장군 정부인) 묘가 있으며, 하단에 김득복 장군 묘가 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현풍 곽씨의 시아버지인 김산수 장군이 울산 학성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당시 전쟁의 와중에 시아버지와 남편이 한날에 전사했다는 잘못된 비보를 들은 현풍 곽씨가 가문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현풍 곽씨의 정절을 높이 받들고, 그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시아버지 묘 바로 아래에 현풍 곽씨 묘를 두었으며, 이후 사망한 남편 묘를 가장 아래에 조성했다.
조선시대는 묘에 대한 유교적 예법을 철저히 지켰기에 남편보다 아내의 묘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금기시했다. 남편보다 부인이 위로 올라간 묘는 역장(逆葬)이라 하여 흉하게 보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은 예도 있었다. 부인이 남편보다 일찍 사망하여 남편이 들어갈 좋은 자리에 부인을 안치하고, 나중에 남편이 사망했을 때 기존 묘를 파헤치거나 그 위로 쓰는 것을 풍수적으로 흉하다고 판단해 남편을 부인 묘의 아래에 안장한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김득복 장군과 현풍 곽씨 묘와 같이 부인이 정려(열녀문)를 받아 남편보다 먼저 사망했을 때, 남편의 신후지지(身後之地·생전에 미리 잡아둔 묏자리)에 부인의 묏자리를 조성한 경우가 그것이다. 부자 간의 묘가 역장인 사례도 꽤 있는데, 고려시대 뛰어난 외교관이자 재상이었던 서희 장군 묘는 그의 아버지 서필에 비해 무려 80m나 더 올라간 곳에 있으며,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함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알려진 율곡 이이의 묘가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묘보다 위에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벼슬이 높은 후손이 조상보다 같은 산줄기의 더 높은 곳에 묘를 쓴 사례가 상당히 있는데, 백성은 역장을 후레자식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하여 금기시하던 것을 사대부나 고관대작 집안에서 종종 행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유는 자식의 벼슬이나 명성, 학문적 성취가 부모보다 높은 경우 자식을 위쪽(상석·명당)에 안치하는 양반가에 형성된 풍습으로 똑똑한 자식을 명당에 안치함으로써 가문이 대대손손 발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산수, 김득복 장군 부자 묘역 앞쪽에는 물길이 묘역을 감싸며 돌아나가면서 묘역의 땅 기운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생기를 응집시키고 있다. 좌우로 요동을 치며 내려오던 용맥은 서서히 진행하는 속도를 줄이다가 김산수 장군 묘터에서 최종 안주를 했다. 묘역은 주변에 비해 볼록한 형세를 하고 있어 정기를 품은 명당의 기본 요건을 갖추었다. 따라서 혈(穴)이 맺힌 명당은 김산수 장군 묘이며, 현풍 곽씨와 김득복 장군 묘는 여기(餘氣·혈을 맺고 남은 기운)가 스며든 곳으로 무해지지(無害之地) 상급에 속하는 좋은 자리로 여겨도 무방하다. 좌청룡(좌측산)과 우백호(우측산), 안산(앞산)은 묘역 주변에 빽빽하게 심은 나무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김산수 장군은 “내가 죽거든 기장 해변에 묻어, 죽어서도 왜구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바다를 지키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주재민 (화산풍수지리연구소장)
(사주명리·수맥·작명연구원 055-297-3882)
(E-mail : ju46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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