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청춘, ’7000원의 행복' 뽑으러 간다

이기우 기자 2026. 9. 4. 00:4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현장 르포]
술집·PC방 대신에 뽑기방 찾는 2030
3일 오후 서울 용산아이파크몰의 한 가차숍. 젊은 층 손님들이 뽑기 기계에 붙어 있는 캐릭터 모형을 보고 있다. 가격은 한 번 뽑는 데 통상 7000원이다. /임지훈 기자

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용산아이파크몰 6층. 일명 ‘가차(뽑기)’ 기계 350여 대를 모아놓은 상점은 손님 30~40명이 몰려 북적였다. 대부분 20·30대였다. 남자 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은 김지희(22)씨는 “용산아이파크몰에 올 때마다 이곳에 들른다”며 “뽑은 피규어는 꼭 인스타그램에 올린다”고 했다.

이곳 가차 기계에선 ‘포켓몬스터’나 ‘귀멸의 칼날’ 등 인기 애니메이션 피규어(캐릭터 모형), 강아지·고양이 같은 동물 모형을 뽑을 수 있다. 가격은 한 번 뽑는 데 7000원짜리가 가장 많았고, 1만2000원짜리도 있었다.

최근 서울 곳곳에 ‘가차숍(뽑기 가게)’이 들어서고 있다. 가차숍은 ‘덕질의 성지’로 유명했던 서초구 국제전자센터나 마포구 홍대거리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최근 들어 관악구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이나 성북구 성신여대 등 대학가 상권에도 가차숍이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다. 2030세대가 장난감 뽑기에 열광하면서 자고 나면 한두 곳씩 생길 정도다.

그래픽=양인성

가차는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릴 때 나는 금속 마찰음을 표현하는 일본 의성어 ‘가차(がちゃ)’에서 따온 말이다. 돈을 넣고 플라스틱 캡슐 속에 들어 있는 캐릭터 상품을 무작위로 뽑는 기계다. 과거에는 한 번 뽑는 데 2000~3000원이었지만 최근에는 7000~1만2000원까지 올랐다. 내용물도 과거엔 어린이 장난감이 많았지만 애니메이션·게임 캐릭터가 인기를 끌면서 성인 수집품으로 확장됐다.

20·30대 사이에서 가차 열풍이 부는 것은 짧은 시간에 확실한 만족을 원하는 소비 성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청년들에게 취업이나 결혼, 내 집 마련 같은 목표는 갈수록 멀게 느껴진다. 그와 달리 가차는 소액으로도 즉각 결과물이 생긴다는 것이다. 팍팍한 청춘들이 7000원짜리 행복에 열광한다는 얘기다. 청년들은 가차 기계에서 원하는 캐릭터를 뽑아 소셜미디어에 인증하거나 다른 사람과 교환도 한다. 일종의 취향 공유다.

직장인 이모(29)씨는 “인터넷에서 원하는 제품을 사는 게 더 싸다는 걸 알면서도 가차 기계에서 원하는 물건을 뽑았을 때 희열에 빠져든다”며 “친구들과 만나면 카페에 가듯 가차숍에 들른다”고 했다. 청년 사이에 ‘키덜트(아이 같은 취미를 즐기는 어른)’ 문화가 확산한 것도 가차숍 흥행을 불렀다. 어른이 돼 어느 정도 구매력을 갖춘 청년들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만화 캐릭터 피규어를 수집하며 행복감을 느낀다는 얘기다.

국세청 통계를 보면 지난 7월 말 기준 전국 장난감 가게는 4035곳으로 1년 전보다 660곳(19.6%) 늘었다. 두 달 전(3929곳)과 비교하면 106곳이 늘었다. 하루나 이틀에 한 개꼴로 새로운 가게가 들어선 것이다. 국세청은 “최근 늘고 있는 가차숍과 피규어 매장 등 장난감 가게가 증가한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20·30대가 주로 찾던 술집, PC방 등은 감소 추세다. 7월 말 기준 전국 호프주점은 1만9598곳으로 1년 전보다 1905곳(8.9%) 줄었다. 선술집 등 간이주점은 8559곳에서 7803곳으로 8.8%, PC방은 6990곳에서 6615곳으로 5.4% 줄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부근 한 부동산 중개인은 “음식점·주점은 인건비와 권리금, 임대료가 크게 올라 자리를 잡기 어려워졌다”며 “무인 가차숍은 인건비와 권리금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어 창업 문의가 늘었다”고 했다. 작년 홍대 근처에 가차숍을 연 한 업주는 “홍대 일대에만 가차숍이 100곳이 넘는다”며 “최근에는 매장이 늘면서 수익성이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가차숍이 과소비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에는 동전을 넣어 뽑던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카드 결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뽑기 가격까지 높아져, 최근에는 한 번에 1만원이 넘는 가차 기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홍대 근처 가차숍에서 만난 직장인 최한주(31)씨는 “일본에서는 300엔(약 2500원)이면 뽑을 수 있는데, 한국에서는 7000원이 넘는 경우가 흔하다”며 “가차숍에서 어린이가 부모에게 계속 뽑아달라고 조르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