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 수필 ] 덕유산의 여름과 상고대

황대연 객원기자 2026. 9. 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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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이 독서와 같구나.

今見遊山似讀書(금견유산사독서)
덕유산 설천봉 상제루
겨울 덕유산 상고대

[<사람과 산>  황대연  객원기자]       겨울 덕유산은 상고대가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름다운 상고대를 찾아 겨울 덕유산은 몇 차례 가봤으나 여름 덕유산의 모습은 아직 보지 못했다. 덕유산의 여름이 보고 싶어 배낭을 꾸렸다. 무주리조트에서 설천봉까지는 곤돌라로 올라간다. 바로 옆에는 스키어들이 타고 오르내리던 리프트가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며 긴 잠에 빠져있다.

설천봉 상제루에 이르러 곤돌라에서 내리자, 숲속에서 불어온 바람이 마중한다. 시원함을 넘어 서늘한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쏙 들어가게 하고 반갑다며 옷자락을 마구 흔들어 댄다.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 가는 길은 온통 녹음이 짙게 우거져 싱그럽다. 곳곳에는 원추리와 주목이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 노란색 꽃을 활짝 피운 원추리가 바람에 살랑이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으니 다가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다. 바짝 다가가 잠시 귀 기울여 본다.

           "날 좀 보세요. 나 여기 있어요."

원추리의 속삭임은 앳되고 고운 새색시의 수줍은 미소를 연성케 한다. 원추리는 아침에 눈부시게 피어나고 저녁이면 미련 없이 시들어 버린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지도, 집착하지도 않고 내려놓는다. 그 모습에서 방하착(放下著)의 교훈을 얻는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가던 길을 잊고 마냥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올해도 피었으니 내년에도 피어날 테고, 내후년에도 그 자리에 피어나지 않을까. 그때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고 아쉬운 작별을 고한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산다는 주목은 생을 다하고 고목이 되면 아름다움이 더 깊어진다. 사람은 왜 그렇지 못할까? 노인이 되면 아름다움은커녕 대체로 더 추해진다. 물론 봄꽃보다 더 아름다운 단풍도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인간은 속세에 지치고 젖어버리기 때문이리라. 세속을 벗어나 무위자연의 삶을 누리는 은둔 거사와도 같은 주목은 무심하고도 꼿꼿한 자태로 신령스러운 기운을 더해간다. 인간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무구한 세월의 아름다움이다.

잠시 눈을 감아본다. 3년 전, 사진작가인 친구와 함께 이곳에 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계절은 겨울이었다. 순백의 눈꽃 세상을 찾은 스키어, 관광객, 등산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하얀 산호초처럼 보이는 상고대와 설경은 어느 곳에 카메라를 대도 멋진 작품이 되었다.

상고대는 눈이 내려 눈꽃을 피운 게 아니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 대기 중 수증기가 나무나 풀에 달라붙어 얼어붙은 것이다. 덕유산 상고대가 다른 산에 비해 유난히 아름다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산 아래쪽에 금강이 흐르기 때문에 습도가 높고,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여서 영하의 찬 기온과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즉 습도, 기온, 바람, 세 가지 조건이 딱 맞아떨어져 상고대가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의 계절은 푸른 여름. 하늘은 푸른 붓이 훑고 지난 듯 한없이 청정하고 구름은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흘러간다. 덕유산의 주봉인 향적봉(해발 1,614m)에 서자 눈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장관에 할 말을 잊고 만다. 북쪽으로는 백하산과 민주지산, 동쪽으로는 금오산과 가야산, 서쪽으로는 마이산과 연석산,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지척에 백암봉,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으로 이어진 백두대간 산줄기가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산줄기는 마치 용이 춤을 추듯 꿈틀대는 것만 같다. 이토록 아름답고 장쾌한 덕유산의 진면목을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이런 풍경 앞에서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덕유산(德裕山)은 이름 그대로 덕이 넉넉한 산이라고 한다. 어떤 덕을 갖추고 있기에 덕이 넉넉하다고 했을까? 전해 내려오는 두 가지 전설 중 하나는 고려 말 이성계가 이 산에 들어와 수도를 하고 있을 때 호랑이 등 맹수가 많았으나 한 번도 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난(亂)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산으로 피해 들어왔는데 적병들이 오기만 하면 안개가 짙게 끼어 적병들이 사람들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갔다고 하는 전설이 그것dl다. 이같이 곤궁한 사람을 품어주는 산이니, 덕이 넉넉한 산이라 불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백암봉에 이르러 백두대간 능선에 접속한다. 거기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를 따라 무룡산을 향해 나아간다. 등산로는 국립공원답게 잘 정비되어 있고 긴급재난 비상용 전화까지 설치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이 낯설지는 않다. 내가 이 구간을 걸은 게 바로 엊그제만 같은데 벌써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 놀랄 뿐이다.

그때는 백두대간 종주 중이었고, 무박으로 진행하는데 하필 그때 비가 내려 우의를 뒤집어쓰고 산행했다. 그런데도 졸음이 쏟아져 4시간 이상을 비몽사몽간에 걸었었다. 그 노곤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산꾼들의 쉼터인 삿갓재 대피소는 그새 리모델링했는지 쾌적하고 깨끗하게 단장돼 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라는 글귀가 새겨진 작은 나무판이다. 그 널조각도 목욕재계했는지 단정하게 걸려있다. '유산여독서'란 산행은 독서와 같다는 뜻으로, 조선 영조 때 학자 어유봉의 말이다. 그렇다면 산은 하나의 책이라 할 수 있으며, 산행하는 것은 책 속에서 글을 음미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퇴계 이황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讀書人設遊山似(독서인설유산사)
今見遊山似讀書(금견유산사독서)"

사람들은 독서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이 독서와 같구나.
잠시 휴식을 마치고 다시 길을 이어간다. 삿갓봉 방향으로 들어서려 하자, 그곳에 근무하고 있던 국립공원 직원이 길을 막아선다. 정해진 시간이 지났으므로 더 이상 갈 수 없다며 하산하라고 한다. 오후 4시 이후에는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4시 15분이다. 아뿔싸, 이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그런 규정이 있는 줄 미리 알고 휴식 없이 진행했으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산 길에 든다. 황점마을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계곡과 나란히 한다. 계곡에는 맑은 물이 작은 폭포와 소를 이루며 '찰~찰' 흘러내린다. 당장 뛰어들고 싶었으나 상수원 보호 구역이어서 그럴 수는 없다. 이 계곡에 흐르는 물은 삿갓재 아래 삿갓샘에서 발원하여 흐르다가 황강으로 흘러든다. 그러고는 합천호에 잠시 머물다가 낙동강에 합류한다. 하산하는 내내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해서인지 산행에 쌓인 피로가 말끔히 씻겨나간 것만 같다.

우리나라의 산 중 겨울 풍경이 아름다운 산은 많다. 이곳 덕유산을 비롯해 태백산, 설악산, 지리산, 소백산 모두 아름답다. 그중 나는 단연 덕유산을 으뜸으로 친다. 덕유산의 겨울은 가히 설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기회가 될 때마다 덕유산을 찾고는 했다.
그러나 겨울 명산이라는 이름에 가려, 덕유산의 여름을 몰라보았다. 이번에 마주하고 보니 덕유산은 여름 산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원추리 등 야생화와 주목, 싱그러운 녹음, 파란 하늘 그리고 바람과 구름과 물이 있는, 아름다운 여름 산이 바로 덕유산이 아닐까 싶다. 
덕유산 주목
향적봉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능선

글.사진 황대연 객원기자 │ 백두대간 종주 등 2,900여 개의 국내 산과 킬리만자로 등 9개의 해외 산에 올랐다. 저서 『백두대간에 서다』, 『은퇴산꾼 고산에 서다』, 『헤어날 수 없는 사랑』, 『맹물에 조약돌을 삶아 먹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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