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까지 가린 10시간의 사투, 미끄러져도 춤을 멈추지 않은 이유

고승희 2026. 9. 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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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하게, 안개 낀 사람처럼 움직여야 해요. 왼팔을 끌어와 최대한 빨리 앞으로 가져오세요."

세계적인 안무가인 이리 킬리안의 스테이저(stager, 안무 지도자)이 오를리 카일라가 동작 하나하나를 보여주며 설명하자, 40여명의 오디션 지원자가 시시각각 몸을 바꾼다.

스위스 출신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텍사스의 프로 무용단에서 8년간 활동한 다니엘 쿠브르(29)는 "크리스티안 슈푹의 스테이저를 통해 서울시발레단을 알게 됐다"며 "신생 단체라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무용수라면 누구나 춤추고 싶어 하는 레퍼토리를 갖고 있어 지원하게 됐다. 오디션에서 훌륭한 안무가들의 춤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되리라 봤다"고 했다.

내년에 무대에 오를 안무가 요한 잉거 작품의 스테이저인 이반 뒤브회유 역시 "춤은 하나의 언어다. 서울시발레단이 해야 할 일도 발레라는 하나의 언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몸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며 "발레만 할 줄 아는 사람보다 여러 언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몸에 적용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수 줄 아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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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발레단 오디션 현장 가보니
23개국에서 138명, 해외 국적 49명
이리 킬리안 등 네 안무가 작품 올려
서울시발레단 시즌 무용수 선발 오디션 현장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흐릿하게, 안개 낀 사람처럼 움직여야 해요. 왼팔을 끌어와 최대한 빨리 앞으로 가져오세요.”

세계적인 안무가인 이리 킬리안의 스테이저(stager, 안무 지도자)이 오를리 카일라가 동작 하나하나를 보여주며 설명하자, 40여명의 오디션 지원자가 시시각각 몸을 바꾼다. 난생처음 킬리안의 한국 초연 예정작. “똑바로 선 상태에서 자세를 유지하세요. 미역처럼 꿈틀거리는 거예요. 포기하듯이 내려가고, 도착하자마자 왼쪽 다리를 앞으로 밀어요.”

춤은 단절된 동작이 아니다. 밀물과 썰물처럼 밀려들고 쓸어가는 움직임의 연속이다. 하나의 동작은 다음 동작으로 물 흐르듯 유영한다. 수십 명의 춤이 아직은 제각각이다. 단단하게 지탱하는 다리의 각도, 휘청이는 팔의 범위가 저마다 다르다. 다시 카일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스쿼트를 하듯 다리를 넓게 벌린 자세로 바닥을 향하다, 단단한 코어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설 때였다.

“움직임은 골반에서, 코어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폴링 앤 라이즈, 잊지 마세요! ”

카일라의 피드백이 끝나려는 찰나, 한 무용수가 중심을 잃는다. 양말과 바닥 사이의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미끄러질 듯 휘청였다. 무용수는 당황은커녕 멋쩍은 듯 웃더니 이내 동작을 반복하며 몸에 춤을 새긴다.

서울 노들섬 서울시발레단 연습실에서 열린 시즌 무용수 오디션 현장. 23개국에서 지원한 138명의 지원자 중 현장과 영상 심사를 거쳐 선발된 지원자들은 거장의 마스터피스를 온몸으로 익혔다.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나. 옆자리 무용수보다 빨리 오늘 처음 춘 이 춤을 ‘나의 것’으로 소화해야 하는 숙제다.

서울시발레단 더블빌 크리스티안 슈푹 ‘죽음과 소녀’ [세종문화회관 제공]
‘거장 레퍼토리’ 프리미엄, 외국인 지원자 끌었다

총 지원자 138명, 해외 국적자 49명.

창단 2주년을 맞은 신생 단체인데도 서울시발레단은 전 세계 무용수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한국에선 ‘공공 발레단’ 최초의 컨템포러리단체라는 상징성을 안고 출발했지만, 이들의 행보는 남달랐다. 사실 후발주자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발레단 사이에서 자리를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서울시발레단은 창단 첫해 주재만 안무가의 창작 발레를 시작으로 세계적인 거장들의 무대를 끊임없이 불러왔다. 검증도 되지 않은 신생 단체이기에 선뜻 자기 작품을 내주지 않을 때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를 이끄는 ‘안무 거장’ 한스 판 마넨이 서울시발레단의 손을 기꺼이 잡아줬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창단 전 안무가를 물색하고 섭외해야 하는데 다들 무용수 레퍼런스를 달라고 했다. 무용수를 뽑기도 전이었기에 보여줄 것이 없어 거절당했을 때 지난해 12월 돌아가신 한스판마넨 감독이 작품을 승인해 줬다”며 “그 이후로 오하드 나하린, 요한 잉거 등 세계적 안무가들과 협업할 수 있어 서울시발레단이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거장 안무가의 작품을 공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프리미엄’이다. 무용수들 사이에서 서울시발레단이 선망의 무대가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거장들의 춤을 출 무대이기도 하지만, 설사 최종 무대에 서지 못하더라도 오디션 과정을 통해 귀한 작품을 배울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오디션에도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프랑스, 몽골 등지에서 날아온 지원자들이 전체의 35%였다.

서울시발레단 시즌 무용수 선발 오디션 현장 [세종문화회관 제공]

스위스 출신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텍사스의 프로 무용단에서 8년간 활동한 다니엘 쿠브르(29)는 “크리스티안 슈푹의 스테이저를 통해 서울시발레단을 알게 됐다”며 “신생 단체라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무용수라면 누구나 춤추고 싶어 하는 레퍼토리를 갖고 있어 지원하게 됐다. 오디션에서 훌륭한 안무가들의 춤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되리라 봤다”고 했다. 크리스티안 슈푹은 최근 ‘죽음과 소녀’로 서울시발레단과 인연을 맺었다.

1차 오디션에서 뽑힌 43명(외국인 5명) 중 절반은 고배를 마셔야 하는 상황이다. 최종 경쟁률로 약 7대1. 2차 오디션은 기존 발레단에선 보기 드문 방식이다. ‘시즌 무용수’ 20명 안팎을 뽑는 동시에 내년 시즌 작품을 올릴 네 안무가가 자기 작품에 출연할 무용수 캐스팅을 겸한다. 스테이저들은 각각 2시간 30분 동안 무용수들과 수업을 진행하며 이들의 역량을 치밀하게 관찰한다. 지원자들에게 주어진 조건은 같다. 40여명의 무용수 대부분이 춰본 적이 없는 춤을 오디션에서 익히는 것이 첫 과제다. 네 안무가는 이 과정이 담긴 영상을 보고 무용수를 낙점한다.

거울 가린 오디션장…‘잘 추는 무용수’보다 중요한 건?

3면을 검은 천으로 뒤덮은 오디션 현장. ‘거울’의 시각적 의존도를 거세하자 무용수들은 자기 몸과 움직임을 확인할 수 없는 막막함을 마주했다.

끊임없이 거울 속 자신을 확인하며 ‘자기 검열’을 하던 무용수들에겐 낯선 경험이었다. 카일라는 “무용수들이 자기 모습을 보고 동작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움직임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거울을 가렸다”며 “단순히 예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 내부에서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발레단 시즌 무용수 선발 오디션 현장 [세종문화회관 제공]

오디션이 구하려는 인재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카일라는 “처음 스텝을 배웠을 때와 세션 마지막에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중점을 뒀다. 주어진 정보를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짧은 시간 안에 얼마나 변형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보다는 발전하고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내년에 무대에 오를 안무가 요한 잉거 작품의 스테이저인 이반 뒤브회유 역시 “춤은 하나의 언어다. 서울시발레단이 해야 할 일도 발레라는 하나의 언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몸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며 “발레만 할 줄 아는 사람보다 여러 언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몸에 적용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수 줄 아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두 심사위원은 무용수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보다 ‘변화하는 과정’에 주목해 한 사람 한 사람을 ‘매의 눈’으로 살폈다. 어디에나 ‘낭중지추’처럼 튀어나온 인재가 있었다. 스테이저가 보여주는 3분 가량의 동작들을 성능 좋은 복사기처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주체성’이 춤으로 폭발하는 찰나를 파고 들었다.

카일라는 “무용수의 키나 팔의 길이, 비율과 같은 미학적인 부분은 중요하지 않다”며 “우리가 제시하는 움직임의 질감과 방향, 에너지의 강도, 반응성과 정확성을 본다”며 “중요한 것은 무용수의 몸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와 그 에너지가 전달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물론 기본기는 중요하다. ‘발레단’이라는 정체성을 안고 있기에 여성 무용수에겐 토슈즈를 신고 무대를 장악할 수 있는 기초 능력을 봤다. 모든 무용수에겐 안정적인 발과 골반, 단단한 코어를 딛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신체 통제력도 요구됐다. 이반 뒤브회유는 ”현장에서 중요한 덕목은 새로운 것을 얼마나 빨리 인지하고 받아들이느냐“라며 ”테크닉 시험이 아닌 학습 능력과 반응 속도를 관찰했다“고 말했다.

서울시발레단 더블빌 크리스티안 슈푹 ‘죽음과 소녀’ [세종문화회관 제공]
정답 아닌 탐구의 과정…새로운 춤의 언어 품을 씨앗 찾기

서울시발레단의 오디션은 기계적인 ‘입단 테스트’도, 정답을 맞추는 시험대도 아니었다. 완성형 무용수를 ‘채용’하는 자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혹독한 10시간의 사투를 통해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진 못했지만, 언젠가는 화려하게 만개할 가능성을 안은 ‘발레단의 씨앗’을 뽑는 과정이었다. 두 심사위원 역시 저마다의 작품에 들어맞는 무용수 캐스팅을 고집하기보다, 신생 단체인 서울시발레단의 토양을 다져줄 원석을 찾았다.

뒤브회유는 “무용단을 운영하는 것은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다”며 “특정 작품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한 명을 찾는 것은 단편적인 춤의 언어 하나만을 구하는 것이다. 당장 어떤 꽃을 피울지 알 수 없더라도, 튼튼한 씨앗을 심어 발레단이라는 생태계 안에서 오랫동안 다양한 움직임으로 만개할 인재를 발굴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발레단은 고전발레 중심의 한국 발레계에 ‘컨템포러리’라는 새로운 ‘춤의 정원’을 만들어가고 있다. 관객들은 이미 신세계에 적응 중이다. 창단 2년 만에 누적 관객 2만 5000 명을 넘어섰다. 평균 객석 점유율은 약 86%에 달했다. 지난 5월 무대에 올린 신작 강효형 안무가의 ‘인 더 밤부 포레스트’는 역대 최고인 98.7%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이 생태계가 척박한 땅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는 의미다.

이날의 오디션은 발레단의 다음 2년을 만들어갈 주인공들을 ‘발굴’하는 자리다. 뒤브회유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무용수들을 통해 하나의 언어를 넘어 20여개의 언어를 가진 춤의 생태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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