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우스의 '붉은 원액'…동굴 속 거인 괴물도 홀렸다

정인성 2026. 9. 3.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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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 팬 사이에는 유명한 밈이 있다.

원작 속 오디세우스는 정통 전략파보다는 임기응변과 꾀에 능한 기교파 타입이다.

사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는 10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다.

와인 맛에 반해 연거푸 석 잔을 마신 키클롭스는 기분이 좋아져 오디세우스를 '가장 나중에 잡아먹겠다'는 가혹한 선물을 약속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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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숨은 주인공' 와인
신작 영화 ‘오디세이’의 한 장면.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가 원작이다. ⓒ유니버설픽처스


할리우드 영화 팬 사이에는 유명한 밈이 있다. 바로 ‘맷 데이먼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영화는 무조건 성공한다’는 법칙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미국으로 귀환하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부터 화성에서 조난당해 지구 복귀를 시도하는 ‘마션’까지 데이먼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늘 쉽지 않았다.

최근 흥행 질주를 이어가고 있는 영화 ‘오디세이’ 속 여정 역시 만만치 않다. 그가 연기한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한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오기까지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도 데이먼의 귀갓길은 고됐지만, 그만큼 영화는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호메로스의 원작 <오디세이아>로 관심을 이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독창적 관점의 ‘오디세이’

눈이 먼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와 탈출하는 오디세우스 일행.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크리스토퍼 놀런의 ‘오디세이’는 원작 <오디세이아>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관점을 녹여냈다. 원작 속 오디세우스는 정통 전략파보다는 임기응변과 꾀에 능한 기교파 타입이다. 참전을 피하기 위해 밭에 소금을 뿌리며 미친 척했고, 키클롭스(외눈박이 거인)를 속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노바디’(아무도 아닌 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 작전을 기획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놀런 버전의 오디세우스는 결이 조금 다르다. 가장 핵심인 트로이 목마를 제외한 자잘한 기교 에피소드를 생략하는 대신, 전쟁 영웅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이 안고 있는 내면의 고뇌와 진실을 깊이 있게 조명했다. 얼마 전 박찬욱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놀런은 ‘원작을 가져와 자신만의 것으로 재해석하고, 그 안에서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고 답했다. <오디세이아> 역시 트로이 전쟁 후 약 400년 뒤에 쓰이며 저자의 시대적 관점이 깊게 스며들었듯, 놀런 역시 21세기적 재해석을 더한 것이다.

영화 ‘오디세이’에서 페넬로페 역을 맡은 앤 해서웨이. ⓒ유니버설픽처스


사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는 10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다. 식량을 구하러 간 동굴에서 키클롭스에게 갇혀 동료들이 잡아먹히고, 키르케의 섬에서는 마법 약을 마신 정찰대가 돼지로 변하는 수모를 겪는다. 세이렌의 유혹에 부하를 잃고, 배 전체를 삼키는 소용돌이와 괴물 사이에서 가혹한 희생을 강요받기도 한다. 결국 모든 배와 동료를 잃고 홀로 떠내려간 요정 칼립소의 섬에서 불사의 삶을 제안받으며 7년을 묶여 있었다. 전쟁 10년, 방황 10년. 고향에 다다르기까지 무려 2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비밀 병기가 된 ‘와인’

이처럼 숱한 고난의 여정 속에서 서사의 중요한 열쇠로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 바로 술, 즉 고대 그리스의 와인이다. 가장 대표적인 대목은 단연 키클롭스의 동굴 에피소드다. 오디세우스는 향긋한 와인을 가득 채운 염소가죽 부대 하나를 챙긴 채, 정예 부하 열두 명을 이끌고 거인의 동굴 안으로 발을 내디딘다.

“그것은 가히 신적인 음료였소. 그의 집안에서 그것에 관해 알고 있는 하녀나 시녀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그 자신과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부만이 알고 있었지요.”(오디세이아 中)

고대 그리스에서 와인과 물을 섞는 데 사용한 도기 ‘크라테르’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이 와인은 에우안테스의 아들 마론에게 받은 물을 섞지 않은 달콤한 원액이었다. 당시 고대 그리스에는 지금과 달리 와인에 물을 타서 마시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원액 그대로 마시는 행위는 야만인의 습성으로 여겨졌을 정도다. 고대 그리스 시민은 ‘크라테르’라는 큰 그릇에 와인과 물을 섞어 마시며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즐겼는데, 이 모임이 바로 오늘날 심포지엄의 어원이 된 ‘심포지온(Symposion)’이다. 일반적인 비율이 와인과 물 1 대 3 정도라면, 오디세우스가 챙긴 와인은 무려 1 대 20의 비율로 물을 섞어야 할 만큼 강렬하게 농축된 독주였다.

동굴에 갇혀 부하 둘이 잡아먹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오디세우스는 기지를 발휘해 이 와인을 거인에게 권한다. 와인 맛에 반해 연거푸 석 잔을 마신 키클롭스는 기분이 좋아져 오디세우스를 ‘가장 나중에 잡아먹겠다’는 가혹한 선물을 약속하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 순간 오디세우스는 불에 달군 올리브나무 몽둥이로 거인의 하나뿐인 눈을 찌르고 탈출에 성공한다.

 고대 기법 계승한 ‘파시토’

시칠리아 판텔레리아 섬에서 생산되는‘벤 리에’ 와인. ⓒ돈나푸카타 와이너리


그렇다면 고대인들은 왜 와인을 이토록 진하게 만들어 물에 섞어 마셨을까? 비밀은 보관 기술에 있다. 냉장 장비가 없던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와인이 쉽게 산화돼 식초로 변하곤 했다. 이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당도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수확한 포도를 짚 멍석 위에 올려 바짝 말려 수분을 증발시켰다. 이 과정에서 포도 알맹이 속 당분과 산도가 농축되고 발효 시 알코올도수도 높아져 오랫동안 맛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말린 과일, 꿀, 견과류, 정향 등이 어우러진 진득하고 복합적인 풍미가 완성된다.

고대 그리스의 이 건조 양조 기법은 오늘날 와인 용어로 ‘아파시멘토(Appassimento)’라고 불리며, 이렇게 만든 와인을 ‘파시토(Passito)’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시칠리아 남단 화산섬에서 생산되는 ‘파시토 디 판텔레리아’는 오디세우스가 10년의 방황 속에 지나쳤을 법한 여정의 중심지에서 수천 년 전 고대인들의 지혜를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명주다. 파시토는 국내에서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훌륭한 디저트 와인이다. 포트나 소테른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대단한 완성도에 비해 가격대에 부담이 없다. 영화 ‘오디세이’나 책 <오디세이아>를 감상할 기회가 있다면, 신화 속 영웅의 길을 구원해 준 파시토 한 잔을 곁들여 보기를 권한다.

정인성 책바 대표(wave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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