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잃은 아버지…똑똑해진 AI, 김애란의 시선으로 본 묘한 풍경

최한종 2026. 9. 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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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47)에게는 오랫동안 '젊은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다만 젊은 시절의 김애란에게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려운 존재였다. 김애란은 "아버지를 직면하면 내가 다칠 것 같았다"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야기를 조금 더 허구적으로 가져갔다"고 말했다.

김애란은 오랜 시간 허구를 거쳐 여러 모습의 아버지를 만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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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7년 만에 산문집
<그랬다고 적었다> 발간
허구·상상의 아버지 모습 아닌
조용한 응시·이해로 시선 바뀌어
조금씩 말을 잃어가는 아버지와
언어모델로 발전하는 AI 사이에서
인간의 불완전함과 쇠락 모습 그려
사진=ⓒ이승재


김애란(47)에게는 오랫동안 ‘젊은 거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2002년 스물셋에 등단해 스타 작가가 됐고 2013년엔 이상문학상을 역대 최연소 수상했다. 그런 그가 문단에서 작품활동을 한 지도 어느덧 25년에 가까워지고 있다. 김애란이 7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산문집 <그랬다고 적었다>에는 전작을 낸 뒤 켜켜이 쌓인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이번 산문집에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부쩍 많다. 어머니 이야기가 인상적이던 전작과 달라진 점이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와 마주 앉아 직접 인터뷰까지 했다. 김애란은 최근 한국경제 아르떼와의 인터뷰에서 “꼭 소설이나 산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며 “흩어져 사라질지 모르는 시간을 기록해 어디에 발표하지 않더라도 간직하고 훗날 형제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회에서 직시로, 렌즈를 바꾸다

부모 이야기는 김애란 문학의 오래된 뿌리다. 첫 단편집 제목부터 <달려라, 아비>였다. 다만 젊은 시절의 김애란에게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어려운 존재였다. 실제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상상과 환상을 통해 멀리 돌아갔다. 김애란은 “아버지를 직면하면 내가 다칠 것 같았다”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야기를 조금 더 허구적으로 가져갔다”고 말했다.

김애란은 오랜 시간 허구를 거쳐 여러 모습의 아버지를 만나왔다. 그 끝에 이제는 그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번엔 산문으로 현실의 아버지를 담아내며 “조용한 응시와 이해 쪽으로 렌즈를 바꿔 썼다”고 했다.

그렇게 책 안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오래 일해온 사람의 자부심과 후회, 미래에 대한 아쉬움을 함께 품은 인물이다. 50여 년간 이발사로 살아온 그는 의식이 흐려진 뒤에도 눈을 감은 채 허공에 대고 가위질하곤 했다.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고 물으면 “일이 가장 하고 싶지”라고 했다가, 이내 “그런데 손이 떨려서 어려울 것 같아”라고 덧붙였다. 누워서도 가족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말 잃는 인간, 말 배우는 AI

그가 아버지의 시각에서 바라본 세상은 뜻밖에 인공지능(AI)이라는 동시대 화두와도 포개진다. 김애란은 아버지 발병으로 속을 앓아가던 시기 챗GPT와의 대화를 통해 위로받은 순간을 돌아본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존재라고 하니 여러모로 현명하고 좋은 답을 갖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묘한 대비가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조금씩 말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같은 시기 AI는 놀라운 속도로 말을 익히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라서 아프고, 죽고, 모자라고, 부족하고, 실수하면서 일어나는 일의 풍경과 AI 프로그램의 매끄러움, 완전함, 속도와 같은 것이 대비돼 보였다”고 설명했다.

김애란은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AI와 인간의 차이로 ‘망설임’을 꼽았다. 인간의 주저함에는 힘겹게 지켜내는 배려와 품위가 담겨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작가로서 AI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호기심과 기대, 불안과 걱정을 다 갖고 지켜보고 있어요. 어떤 입장을 딱 정해 놓고 보기보다 걱정이 조금 더 큰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죠.”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옅어지기

이번 산문집은 그의 문학관을 털어놓으며 시작한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자신의 ‘농도’를 조금씩 옅게 만들려 한다고 썼다. 소설을 쓰다가 자신이 비워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서고, 다른 생이 차오르는 듯한 순간을 경험한 게 계기다. 그가 요즘 꾸는 꿈은 역설적으로 ‘내가 되지 않는 꿈’이다.

작품 활동 초기 1인칭의 세계에 몰두하던 그는 이제 3인칭으로 옮겨가고 있다. 김애란은 “작품 활동 기간이 오래된 터라 이번 산문집을 여는 글로는 그간의 변화가 드러나는 글을 앞에 두고 싶었다”며 “신인 때는 1인칭의 강렬함과 절박함이 있었다면, 이제는 3인칭의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것에 관심이 간다”고 설명했다.

표제작 <그랬다고 적었다>에선 문학에 대한 김애란의 자신감도 엿볼 수 있다. 그는 “내게 ‘글쓰기’와 ‘글 읽기’는 직업이거나 취미이기 이전에 삶의 방식이며 훗날 직업적 의미를 잃게 된다고 해도 나는 이 존재 방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고 적었다.

확신이 보인다고 하자 김애란은 “대체로 쩔쩔매면서 쓴다”며 웃었다. “독자분은 결과물만 보시니까 제가 의젓한 자세로, 어떤 기개를 갖고 쓴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 글이 마음에 든다면 그것은 확신 때문이 아니라 불안과 혼란 끝에 한 줌에 쥐게 된 자세와 마음이어서 그런 것 같아요. 말을 세워 놓고 제가 기대는 것이죠.”

김애란은 책 첫머리에 “‘그랬다’고 적는 동안 떠올린 얼굴, 당신께”라고 썼다. 그는 “제 주요 독자층은 제 또래가 많다”며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여러 어려움을 같이 겪어나가겠구나 혹은 누군가는 나보다 먼저 겪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신도 그랬겠군요’ ‘그때 마음은 어땠나요’ 하는 마음으로 독자들의 얼굴이 포개졌다”고 말했다.

책 덮으면 남는 물비린내

책이 시종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에는 코트 수선에 얽힌 허풍 섞인 일화도 등장한다. 김애란은 “과장은 이야기를 맛깔나게 만들어주는 것 중 하나”라며 “앞의 이야기가 조금 무겁다 보니 나가는 문에서는 독자들이 웃으면서 책을 덮었으면 했다. 초기작에서 보인 ‘명랑한 얼굴’의 흔적을 넣었다고나 할까요”라고 했다.

김애란은 책 읽는 일을 ‘한 집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에 비유했다. 그 집의 공기가 몸에 배듯,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그 흔적이 독자에게 남는다는 것이다. 이번 산문집이라는 집을 나선 독자에게는 어떤 냄새가 배어 있을 것 같냐고 묻자, 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물비린내”라고 답했다. 강가나 바다에 다녀온 사람의 옷에 남는 냄새처럼, 이 책에도 시간의 흔적이 스며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세월은 강물과 같다고 하잖아요. 굳이 표현한다면 시간의 냄새, 물비린내나 바깥바람 냄새 같은 게 아닐까요.”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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