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것은 금이 아니라 은이었다, 신간 <은, 욕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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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볼리비아 고원 해발 4000m에 자리한 포토시.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곳의 '풍요의 산', 세로티코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는 막대한 은을 품은 광산이 펼쳐졌다.
스페인에 쏟아져 들어온 은으로 통화량이 상품 생산보다 빠르게 늘면서 16~17세기 유럽의 생활물가는 지역에 따라 네 배까지 뛰었다.
한때 은화로 대륙과 대륙을 연결했던 금속이 첨단 산업을 움직이는 원자재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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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볼리비아 고원 해발 4000m에 자리한 포토시.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곳의 '풍요의 산', 세로티코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는 막대한 은을 품은 광산이 펼쳐졌다. 은을 캐려는 사람들이 몰리면서 포토시는 16세기 말 인구 16만명의 대도시로 팽창했다. 17세기 초 세계에서 유통되는 은의 약 40%가 이곳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 번영의 지하에서는 원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은을 캐고 있었다.
독일 역사학자 틸만 벤디코프스키가 쓴 <은, 욕망의 세계>는 세계사를 은의 이동 경로를 따라 다시 읽는다. 흔히 부와 탐욕의 역사를 금과 연결하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그보다 값싸고 흔했던 은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은은 초기 세계화의 '윤활유'였다. 금이 주로 권력과 사치의 상징이었다면 은은 실제 거래에 쓰였다. 은이 있어야 물건과 사람이 움직였다.
남아메리카에서 캐낸 은은 라마 등에 실려 태평양 연안으로 향하고, 배와 육로를 갈아타며 파나마와 쿠바를 거쳐 스페인 세비야까지 이동했다. 이어 은은 제노바·안트베르펜·암스테르담을 지나 아시아로 흘렀다. 특히 은 수요가 컸던 중국은 거대한 흡수처였다. 그 반대편에서는 중국의 비단·도자기·차, 아메리카의 설탕과 카카오, 유럽의 직물 등이 움직였다. 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가 하나의 교역망으로 연결됐다.
은이 가져온 것은 풍요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에 쏟아져 들어온 은으로 통화량이 상품 생산보다 빠르게 늘면서 16~17세기 유럽의 생활물가는 지역에 따라 네 배까지 뛰었다. 상인은 기회를 얻었지만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팍팍해졌다. 광산에서는 강제노동과 사고, 질병, 수은 중독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은을 아끼기 위해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팔았던 역사도 이 욕망의 사슬에 놓인다.
저자는 은화 위조와 해적의 약탈에서 나치의 '은 사냥'까지 추적한다. 1938년 '수정의 밤' 이후 나치는 독일 유대인들의 귀금속을 빼앗았고, 함부르크에서만 수개월 사이 약 20t의 은이 압수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은의 시대는 화폐가 사라지면서 끝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은은 현대에 들어 새로운 쓰임을 얻었다. 금속 가운데 열과 전기를 가장 잘 전달하는 특성 덕분에 전자제품과 의료기기 등 산업 현장 곳곳에 들어간다. 특히 태양광 발전 설비에도 은이 쓰인다. 한때 은화로 대륙과 대륙을 연결했던 금속이 첨단 산업을 움직이는 원자재가 된 셈이다. 형태와 쓰임은 달라졌지만 희소한 자원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계속된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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