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고양이 사진만 찍어도 작가가 된다… 사소함을 엮는 '진'의 세계

정예림 2026. 9. 3.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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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고 엉뚱한 것부터 솔직하고 진지한 주제까지, 개인의 작은 이야기가 진(zine)이라는 이름의 출판물이 되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의 문화공간에서 다양한 진 작품을 전시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마련된 페어(장터) 행사, '오리진페어'였다.

"제도권 문법과 작품의 완결성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작업 전환 이유를 밝힌 황씨는 진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볼륨으로 가볍게 엮을 수 있는 언어"라고 정의했다.

지난해부터 서울 동대문구 독립서점 '무아레 서점'에서 격월로 진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는 책방지기 이가영(39)씨는 "아주 사적이고 사소한 관심사 하나도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며 "다른 출판 장르가 궁극적으로 독자의 공감이나 보편성을 고려한다면, 진은 창작자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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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관심사·경험 바탕한 소량 제작 독립출판물
곳곳서 제작 워크숍… 전시·거래할 수 있는 진페어도
주제·형식 구애 없어 "나만의 기록을 가볍고 빠르게"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파라다이스 아트랩 워크룸에서 열린 진(zine) 페어 '오리진페어'에 전시된 진들의 모습. 정예림 인턴기자

‘동네 고양이 사진집’, ‘락 페스티벌에 가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들고 가고 싶은 깃발 15선’,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동그라미 도감', '죽기 전 주어진 10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적어본 편지'…

사소하고 엉뚱한 것부터 솔직하고 진지한 주제까지, 개인의 작은 이야기가 진(zine)이라는 이름의 출판물이 되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의 문화공간에서 다양한 진 작품을 전시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마련된 페어(장터) 행사, ‘오리진페어’였다. 80여 팀이 만든 130여 개 출품작은, A4용지를 접어 기본적인 색칠 도구로 꾸민 8쪽짜리 미니북부터 편지봉투 형태의 작품, 돌이나 실을 활용한 작품까지 크기와 분량, 재료와 형태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진,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볍게 엮는 언어

진은 독립출판물의 한 갈래로,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이 자신의 관심사와 경험을 DIY(Do it yourself·직접 만들기) 방식으로 소량 제작해 유통하는 출판물이다. 글, 사진, 그림, 콜라주, 오브제 등 제작 방식과 형식, 주제와 분량 등에 제한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진이라는 용어는, 1930년대 미국 SF 팬들이 관심사를 공유하고자 만든 동인지를 뜻하는 팬진(fanzine)에서 비롯했다. 매거진(magazine)과 팬(fan)의 합성어인 팬진이 진으로 줄여 불리게 되는 동안, 이 독립출판 문화는 록·펑크 음악, 코믹스, 서브컬처 팬덤을 거쳐 페미니즘·퀴어 커뮤니티로 확장되며 기존 매체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기 어려웠던 이들이 직접 만들고 유통하는 매체로 기능해왔다.

지난달 21일 서울시 중구 파라다이스 아트랩 워크룸에서 열린 진(zine) 페어 '오리진페어'에 전시된 진들의 모습. '오리진페어' 인스타그램 캡처

국내에서도 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진을 만들어 사고팔 수 있는 자리가 늘어나고 있다. 올해 3월에는 서점 유어마인드와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 텔레포트가 공동 주최한 진 페어가 열렸다. 주최 측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틀간 108팀이 참여하고 5,000여 명이 방문했다고 밝혔다. 지난달에는 독립서점 휴간북스가 진 마켓 개최를 알린 게시글이 인스타그램에서 1,500회 이상의 좋아요를 기록했다. 지난달 29일부터 이틀간 열린 ‘2026 군산북페어’는 진 부문을 신설해 전시하기도 했다.

오리진페어를 기획한 황지애(25)씨는 순수미술을 기반으로 작업해오다가 지난해부터 진 작업을 시작했다. "제도권 문법과 작품의 완결성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작업 전환 이유를 밝힌 황씨는 진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볼륨으로 가볍게 엮을 수 있는 언어”라고 정의했다.

'오리진페어'에 전시된 진들의 모습. 위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죽기 전 주어진 10분,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적어본 편지 진', '인도네시아에서 발견한 원들을 기록한 진', '동네 고양이 사진들을 모은 진 ', '서른두 살에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를 진단받은 경험을 기록한 진'이다. 정예림 인턴기자

누구나 작가 되는 진 제작 워크숍

장터에 출품된 전문적 작품을 보며 진에 거리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만 있다면 예술적 감각이나 훈련이 없어도 진을 만들 수 있다.

실제 서점, 문화기관, 시민단체 등에선 누구나 참여해 진을 직접 제작해 보는 워크숍이 활발히 열리고 있다. 자유 주제로 각자 만들고 싶은 진을 제작하는 워크숍부터 반려동물, 동네, 영화, 음악 등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서로의 관심과 경험을 나누며 만드는 워크숍까지 방식도 다양하다. 지난해부터 서울 동대문구 독립서점 '무아레 서점'에서 격월로 진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는 책방지기 이가영(39)씨는 "아주 사적이고 사소한 관심사 하나도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며 "다른 출판 장르가 궁극적으로 독자의 공감이나 보편성을 고려한다면, 진은 창작자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 무아레 서점에서 진행된 '도시의 이미지 Zine으로 만들기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이 진을 만들고 있는 모습. 무아레 서점 제공

지난달 21일 오후 무아레 서점에서 이씨가 진행한 워크숍에 참여했다. '도시'를 주제로, 장소에 대한 기억과 경험을 하나의 이미지로 시각화하는 방식이었다. 일상의 기억과 감각을 기록하고 싶어서, 출판계 동향을 알고 싶어서, 진은 잘 모르지만 무언가 만들어보고 싶어서, 서로 다른 이유로 모인 8명이 책상에 둘러앉았다. 각자의 자리에는 흰 종이와 함께 콜라주용 잡지·신문 조각, 채색 도구, 스티커, 가위와 풀 등이 놓여 있었다.

워크숍 현장에 준비된 진 제작을 위한 준비물. 도시의 이미지로 채워낼 종이 두 장과 콜라주용 잡지 및 신문 조각, 채색 도구, 가위와 풀 등이 놓여 있다. 종이는 '인피니트 풀북'이라는 판형으로 접혀있다. 정예림 인턴기자

제작 방식은 단순했다. ‘도시’에 관해 기록하고 싶은 이야기로 흰 종이를 자유롭게 채워 넣는 것. “안에서 시작해도, 밖에서 시작해도 됩니다. 접어서 만들기도, 펼쳐서 만들기도 해요. 정말 마음대로 제작하시면 됩니다.” 제작 방식에 어떤 제한도 없다는 점이 빈 종이 채우는 일을 더 막막하게도 했지만, 이씨는 진에 ‘잘 만든다’는 기준은 없다고 강조했다.

구체적 계획 없이 일단 손에 잡힌 콜라주 조각 속 이미지를 이리저리 찢고 붙이며 작업을 이어갔다. 유희재씨 역시 “무의식에 몸을 맡겨 제작하게 됐다”며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의도치 않은 이미지들이 진의 매력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전현정씨는 “너무 잘하지 않아도 되고, ‘또 만들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했다.

참가자들의 이런 경험이 바로 이씨가 원하는 바다. 그는 "디자이너로 일하며 일정 수준의 작업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해소하고자 진 작업을 시작했다"며 "나처럼 '미감'에 대한 피로도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워크숍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이어 "진 워크숍은 타인의 기준에서 벗어나 손이 가는 대로 움직이며 긴장과 강박을 내려놓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도시의 이미지 진으로 만들기' 워크숍 참가자들이 완성한 진의 모습. 무아레 서점 제공

작업이 끝난 뒤 각자 만든 진을 돌려보며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워크숍의 또 다른 재미다. 서울의 소리를 시각화한 진, 오래 생활해온 장소에 쌓인 기억을 담은 진, 서울 자치구별 이미지를 모아놓은 진 등 도시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각자의 사적인 이야기가 서로 다른 작품으로 완성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은 책방에 전시되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아카이빙되기도 하고, 스캔과 복제를 통해 재생산의 단계로 나아가기도 한다.


진의 재부상 이유는

'오리진페어' 현장에서 방문객들이 진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 오리진페어 인스타그램 캡처

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건 한 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1970년대 펑크록 열풍과 맞물려 진 문화가 발전했던 영국에서도 최근 진이 다시 유행하는 양상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7월 보도에서 진의 재부상을 알고리즘 피로와 인공지능(AI) 콘텐츠에 대한 반작용으로 분석하면서, 직접 만들고 복사기를 찍어내는 진을 두고 “스크롤로 보는 어떤 것보다 더 리얼하다”고 평가하는 음악 팬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진의 종주국' 미국에서는 지난해 온라인상 검열과 감시, 알고리즘 통제를 벗어나 이민 단속 대응법이나 시위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매체로 진이 활용됐다.

진에서 느끼는 대안적 감수성은 무아레 서점 워크숍에서도 감지됐다. 유씨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해지고 있는 세상에서 손으로 만들고 감각하는 물성에 매력을 느꼈다”고 말했다. 일상의 추상적 감각을 글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워 음악을 취미로 삼고 있다는 전씨는 “진 역시 글뿐만 아니라 그림이나 콜라주 등 다양한 형식으로 취향에 따라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일상의 감각을 기록하는 데 좋은 매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빠름' '포착'이 '수작업' '물성'과 나란히 매력으로 꼽히는 건, 진이 단순히 복고적이지 않고 현재적인 매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씨는 “비교적 빠르고 가볍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나만의 작업을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이 하나의 ‘기록 놀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예림 인턴기자 herewego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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