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무덤 찾아 헤매는 이 남자의 삶 [차형석의 별별인물 탐구생활]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한 해 평균 5~6회 해외 출장을 간다고 하면 부러워하곤 한다. 해외 출장지는 숲이거나 산비탈이거나 인적 드문 오지다. 간혹 동료와 동행하는데, 해외 출장 한번 같이 갔다 오면 더 이상 '부럽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인섭 지사는 1960년대부터 연해주를 중심으로 러시아 아무르주까지 해외 독립운동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에 힘써온 사람이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 해 평균 5~6회 해외 출장을 간다고 하면 부러워하곤 한다. 해외 출장지는 숲이거나 산비탈이거나 인적 드문 오지다. 미국에 출장 가서 그 흔한 카페 한번 들르지 않고 돌아온 적도 있다. 간혹 동료와 동행하는데, 해외 출장 한번 같이 갔다 오면 더 이상 ‘부럽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찾는 곳은 해외 독립유공자의 묘지다. 안준범 국가보훈부 전문관은 최근 펴낸 책 제목 그대로 ‘무덤 찾는 남자’다.

안준범 전문관은 2012년부터 국가보훈부에서 일했다. ‘국외 독립유공자 묘소 실태 조사 및 유해 봉환’이 그의 업무다. 독립유공자는 1만8000여 명. 묘소 유무, 위치(해외·국내) 등에 따라 분류한다. 안 전문관은 해외에 있는 독립유공자의 묘소 실태를 조사한다. 묘소가 훼손되면 유족을 만나 정부에서 어떤 점을 도울 수 있을지 알리고 보수를 지원한다. 후손들이 묘소 관리가 어렵다고 하면, 유족과 협의해 유해를 국립묘지로 봉환(받들어 모시고 돌아옴)하는 일을 한다. 어디에 묻혔는지 확인되지 않은 독립유공자의 묘소를 찾는 것도 그의 일이다. 15년째 이 일을 해왔다.
해외 출장을 가기 전 짧게는 3개월, 길게는 5개월 동안 준비한다. 독립유공자의 회고록·서한문·당시 신문·논문 등 여러 자료를 섭렵한다. 대학원에서 한국 근대사를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된다. ‘반(半)연구자’다. 러시아·중앙아시아 등 출장을 위해서 키릴문자를 익히기도 했다. “미국 등 다른 나라의 묘비에는 그 나라 언어 표기와 한글 이름이 동시에 적힌 경우가 많았다. 러시아에는 키릴문자만 적혀 있었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존해야 해서 답답했다. 그 출장을 다녀온 뒤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처음 외운 단어는 역시 ‘묘지’를 뜻하는 러시아어였다.
출장 갈 곳의 구글 위성사진도 매번 살펴야 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묘지 이름이 없는 경우도 있다. 현지 주민들이 묘지명을 모르기도 한다. 위성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할 때가 꽤 있어 미리 준비해야 한다.”
서한문 한 장이 열어준 묘지 추적
2019년 우즈베키스탄 지역 출장 준비 과정도 비슷했다. 이인섭 지사(2006년 애국장)의 서한문이 단초였다. 이인섭 지사는 1960년대부터 연해주를 중심으로 러시아 아무르주까지 해외 독립운동의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에 힘써온 사람이다. 옛 소련 각지에 흩어져 살던 독립군 출신 인사들의 회상기와 개인 소장 자료를 수집·정리했다. 그렇게 모은 서한문의 양도 방대했다. 그 자료 중 유학관이라는 인물이 쓴 ‘윤동섭 의병대에 대한 회상기’가 눈에 띄었다. 그 회상기 원고 상단에 유학관의 주소(시르다리야, 보크잘나야 거리)가 적혀 있었다.
안준범 전문관은 유학관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사했다. 2012년 건국포장을 받은 독립유공자인데, 묘소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편지를 보낼 당시 이미 60대 중반이었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던 시기였으니 사망할 때까지 그 지역 어딘가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러시아어로 ‘보크잘’은 기차역을 뜻하니, 역 근처에 거주했을 듯했다. 1960~1970년대 사망한 고려인들이 주로 안장된 공동묘지를 중심으로 조사해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우즈베키스탄 현지에 도착해 시르다리야 고려문화협회 관계자들을 면담했다. 70대 이상 노인들도 ‘모르는 이름’이라고 했다. 1960년대나 1970년대에 사망한 고려인이 많이 묻힌 공동묘지를 물었더니, “여기 고려인들은 죽으면 시 외곽에 있는 스타라야 묘지에 다 묻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폭염 속에 도착한 스타라야 묘지는 드넓었다. 관리사무소도 관리인도 보이지 않았다. 안내판에 전화번호만 하나 적혀 있는 상태였다. 두 시간 동안 고려인 묘역 묘비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도대체 이 묘지는 얼마나 넓은가. 묘지 규모라도 확인하려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광활한 묘비의 바다였다. 유학관 지사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끝까지 뒤져보고 싶었다. 다시 묘비를 차근차근 보기 시작했다. 풀숲을 헤치고 안쪽 묘비를 보고 나오다가 길가에 커다란 별 문양이 새겨진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키릴문자로 ‘유학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동명이인인가 싶어 공훈록에 기록된 생년월일(1892년 12월26일)을 확인했더니 일치했다. 묘비에는 1986년 3월4일 사망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이렇게 유학관의 묘를 찾았다. 출장지에서 현지 가이드에게 ‘보물찾기다’ ‘인디애나 존스 같네’ 하는 말을 들을 만하다.

묘지 관리가 더 이상 어렵거나 묘소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을 때는 유족에게 유해 봉환을 권한다. 유해를 봉환하려면 유족의 동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던 곳이라서’ ‘후손이 다 이곳에 자리를 잡아서’ 등의 이유로 묘를 한국으로 옮길 필요가 있냐고 반대하는 유족이 있으면 지원 절차를 안내한다.
최초의 유해 봉환은 1946년 일본에 안장되어 있던 윤봉길 의사(1962년 대한민국장), 이봉창 의사(1962년 대통령장), 백정기 의사(1963년 독립장)의 유해를 모셔온 것에서 시작됐다. 민간 차원의 봉환으로, 백범 김구가 주도했다. 정부 차원에서 최초로 추진한 것은 1975년. 당시 원호처(현 국가보훈부)가 미국에 안장된 장인환 지사(1962년 대통령장)·현순 지사(1963년 독립장), 일본에 안장된 서상한 지사(1963년 독립장)의 유해를 봉환했다. 옛 사회주의권 국가에 묘가 있는 경우는 유해 봉환이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됐다. 2026년 8월 현재 총 156위의 유해를 봉환했다.

통상 순국선열의 날(11월17일)이 있는 11월에 ‘유해 봉환’이 많은 편이다. 8월 말부터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유해 봉환은 협의의 연속이다. 유해 반출을 위해 현지 정부, 항공사와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 국가보훈부뿐만 아니라 국방부·경찰청 등 유관 기관이 협업해 진행한다. 유해가 인천국제공항으로 도착하기 전에 공항 관계자들과 협의를 마쳐야 한다. 공항 구역마다 소관 기관이 다르다. 인천국제공항공사·법무부·관세청·질병관리청 등과 각각 소통해야 한다.
현지에서 벌어지는 뜻하지 않은 일에도 대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카자흐스탄은 이슬람 국가라 율법의 영향으로 화장을 하지 않는다. 화장 시설이 전혀 없다는 걸 알고서 현지 장례업체를 통해 인접한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에 가서 화장을 하는 방법을 찾았다. “유해 봉환 업무를 맡으면서 국가 간 시신 및 유골을 운송하고 그 절차를 대행하는 국제 장의업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웃음).”
장군의 귀환, 눈물이 핑 도는 이유
안준범 전문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2021년 8월15일 홍범도 장군(2021년 대한민국장) 유해 봉환이다. 2019년부터 2년 넘게 준비했다.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가 묘소를 잘 관리했으나 묘소를 관리할 고려인이 지속적으로 줄고 있었다. 정부가 고려인 사회를 대상으로 꾸준히 의견을 들었다. 고려인 사회가 유해 봉환을 지지하고 나선 이후 정부가 본격적으로 업무에 착수했다. 2020년 3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추진을 공식 발표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지체되었다.
2021년 8월15일 유해 봉환이 있기 전 한 달 동안 안준범 전문관은 다른 실무자 여섯 명과 함께 현지에 머물며 준비 작업을 했다. 평소 수십 가지를 챙겨야 했다면, 이때는 코로나19 때문에 수백 가지를 챙겨야 했다.
유해가 서울로 떠나는 날 새벽녘. 정장으로 갈아입고 묘소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공항 활주로에서 공군 특별수송기가 눈에 들어왔다. “낯선 나라, 낯선 땅에 서 있는 비행기 동체에 적힌 ‘REPUBLIC OF KOREA AIR FORCE(대한민국 공군)’라는 글자를 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라고 그는 회상한다. 한 달 동안 ‘장군의 귀환, 이제야 모시러 왔습니다’ 행사 준비를 마치고 귀국하니 체중이 15㎏ 빠져 있었다.

대학원에서 한국 근대사를 공부한 그는 이전에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4년 동안 조사관으로 근무했다. 친일 경찰관과 밀정 활동을 조사·분석하는 업무를 맡았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상훈 관련 기록 등 여러 자료를 봤다. 주로 일본어로 된 자료가 많았다. 예를 들어 ‘만주사변 때 어느 지역에 출동해 불령선인을 토벌했기에 이 상을 수여한다’는 내용을 찾고, 연구서 등을 참고해 분석했다. “친일을 한 사람이건, 독립운동을 했지만 아직 묘소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건,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것이 내 운명이자 숙명 같다. 친일 경찰을 찾을 때는 슬프고 착잡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이 생애 마지막에 머문 장소를 찾아내고, 사라진 역사의 한 장면을 다시 세상 밖으로 끌어올리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무덤 찾는 남자’의 말이다. 그는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161위의 묘소를 찾았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