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기억, 끝낼 수 없는 사랑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남모를 사랑의 고통을 대신 쓴 편지로 표현한 한시들이 있다(칼럼 106회 참조).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년)의 제목이 유래한 알렉산더 포프의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가 실존 여성을 대변한 것처럼, 당나라 이백의 다음 시도 어떤 여성을 대신하여 쓴 편지다.
편지를 태우겠다는 다짐도, 기억을 지우겠다는 계약도 사랑의 고통을 없애려는 시도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에서 눈길을 끄는 구절은 남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비단에 수놓은 회문시(回文詩)의 고사와 곡진하게 연결시킨 표현이다. 회문시는 전진(前秦) 시기 소혜(蘇蕙)가 자신을 두고 떠난 남편 두도(竇滔)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지은 작품으로, 어느 방향으로 돌려 읽어도 시가 되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뜻이 통하는 회문시의 순환성은 사랑의 기억을 지운다는 모티프로 마지막 내용이 다시 처음으로 연결되는 ‘이터널 선샤인’의 구조와도 닮아 있다. 영화는 조엘이 클레먼타인을 몬탁행 기차에서 처음 만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사실 그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내용이기도 하다.
시 역시 원정(遠征) 간 남편을 그리워하는 부인의 마음을 색다른 구성과 표현 방식으로 풀어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으로 전개되던 시는 읽어주지 않을까 두려워 썼던 편지를 태워버리겠다는 말로 마무리되며 사랑의 고통을 부각시킨다. 영화에선 사랑의 아픈 기억을 지우려는 주인공 남녀 간의 엇갈린 사랑이 독특한 비선형적 내러티브로 펼쳐진다.
사랑의 고통을 회피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자기 부정과 파국을 야기한다. 영화에서 주인공 조엘은 자신의 기억을 지운 연인 클레먼타인에 대한 복수심으로 라쿠나 회사와 기억을 지우기로 계약한다. 한시 속 아내는 자신을 잊은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편지를 태워버리겠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조엘과 클레먼타인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한시 속 아내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거두지 못한다.
편지를 태우겠다는 다짐도, 기억을 지우겠다는 계약도 사랑의 고통을 없애려는 시도다. 하지만 그 시도 자체가 도리어 사랑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결코 소멸되지 않는 사랑의 고통이 사랑을 영원한 기억으로 남게 하는 것일까.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워킹맘’ 내세운 용혜인, 아이돌봄 지원법엔 반대표
- [속보]경찰, 김병기 의원 뇌물 혐의 구속영장 신청
- ‘슈퍼 엔저’ 꺾이나…美 압박에 ‘달러당 155엔’ 선까지 뚝
- 기소유예된 김승원 로비 의혹…경찰 “재수사 법리 검토”
- 대형 관문에 인공기 펄럭…‘北中 육상교역’ 신압록강대교 개통 임박
- 직원 복지예산 깎은 추미애, 전세 12억 관사 논란
- 샐러드에 1㎝ 유리조각…체인점주 “내가 일부러 넣었냐” 적반하장
- 최근 1년새 집값 가장 많이 뛴 곳은…29.5% 오른 ‘이곳’
- 李 “트럼프, 한미동맹에 변화하는 시대 요구 반영하자는 것”
- 김민석 “김정은의 2국가론, 동의 어렵지만 현실 반영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