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현금 전달책, 수사기관이 너무 쉽게 기소·처벌”
항소심 ‘조직에 돈 전달’ 무죄 판결
90쪽 판결문에 “노동력 편취 당해”
“피고인은 기껏해야 보이스피싱 조직의 주변부를 떠돌다 검거된 끄나풀일 뿐이다. 조직에 속아 노동력을 편취당한, 또 다른 의미에서의 ‘피해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
지난 7월 선고된 한 보이스피싱 현금 전달책 A(20대)씨의 항소심 무죄 판결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돈을 전달했다는 증거가 명백해 1심은 A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을 맡은 대전지법 형사4부(재판장 구창모)는 이를 무죄로 뒤집었다.
재판부는 보이스피싱 전달책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90여 쪽에 이르는 긴 판결문에서 “보이스피싱 범죄에 엄벌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수사기관과 법원이 말단 전달책을 너무 쉽게 기소·처벌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대전에 사는 A씨는 2023년 5월 구인 앱을 통해 만난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대출 고객의 거래 실적을 만들어주는 중개업을 하는데, 현금을 전달만 해주면 30만원을 주겠다”는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았다. 이에 A씨는 전남 나주에 있는 한 카페 등에서 보이스피싱 피해자 2명을 만나 현금 총 2600만원을 받은 뒤 일당이 알려준 계좌로 입금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다.
A씨는 피해자를 만난 카페에서 자신의 신용카드로 커피를 사 마셨고 CCTV에 얼굴도 버젓이 찍혀 있었다. 특히 검거된 뒤 경찰도 모르고 있던 현금 수거 사실을 먼저 털어놨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그는 재판에서 줄곧 “보이스피싱 범죄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항소심은 A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빚을 갚기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그 역시도 보이스피싱 일당에 속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범죄를 알고 가담하는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며 “A씨 역시 일당에 속은 또 다른 피해자일 수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무죄 판단에 그치지 않고, 수사기관과 법원이 ‘왜 의심하지 못했느냐’는 이유로 너무 쉽게 책임을 묻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이스피싱 사건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기록을 보는 판사와 달리, A씨 같은 단순 가담자는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당이 꾸며낸 설명을 믿고 행동했을 수 있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또 “주범이 잡히지 않으니 잡힌 전달책이라도 엄벌하라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무죄추정의 원칙이 후퇴할 위험에 놓인다”면서 “수사기관과 법원은 이들(단순 가담자)을 희생양으로 삼아 보이스피싱 범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 재판부는 앞서 두 차례 또 다른 전달책에게도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해당 판결을 파기했다. 이번 사건 역시 검사의 상고로 대법원에 올라가 있는 상태다.
판결문을 쓴 구창모 재판장은 본지 통화에서 “거대한 국가 권력 앞에서 피고인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재판”이라며 “법원이 사정을 세밀히 살펴봤다는 점을 판결문으로라도 확인시켜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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